제3장 신학의 발전기
제1절 중세 신학(8-15C)
제1항 중세초기(8-11C)
5C부터 시작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고대 시대의 붕괴와 소단위 민족 국가의 형성기인 중세 초기에는 교회가 야만인들을 개종시키고 사회질서를 세우고 새로 생긴 신생민족국가를 상대로 교회의 위상을 세우기에 바쁜시기였다. 대중은 너무나 무식하고 겨우 주교좌 성당의 교리학교나 수도회 부속학교에서 인문교육과 교리교육을 유지하는데 신학의 조류는 아우구스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 그늘에서 맴돌고 있다. 10C는 정말 문화적으로 보아 암흑시기였다. 11C에는 Berengarius (+1088)같은이가 교부들의 재판이 아닌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가 S. Petrus Damianus(+1072)같은 전통두의자들의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11C후반기부터 칸타베리 대 주교인 S. Anselmus(1109)는 신학을 이성의 요구와 구조에 맞도록 건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그에게 있어서 신학을 한다는것은 신앙을 전제로 하되 신앙과는 별도로 하는 전적으로 독립되는 지적 활동이었고 이 시대에 동. 서교회는 분리되였고 (+1054)바로 이 시대에는 신학에 철학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고 교황권의 확립과 성장을 밑바침하는 교회법이 발달하였고 신학안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제2항 School(12-15C)
12C에 가까이 오면서 중세 사회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가고 도시가 형성되어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문물의 교환이 성행하면서 학문의 발전을 바라볼수 있었다. 교회는 이 시기에 확고한 교황권을 세우게 되어 지방 주교들이나 지방 귀족들의 힘을 누르고 전 유럽에 교황의 명령이 통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전 유럽은 그리스도교화되었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교회의 지도권이 확립되었다.
한편 십자군의 영향으로 서방에 도입된 Aristoteles철학이 Platonism을 대신하여 모든 학문의 도구가 되었다.
처음에는 Aristoteles의 논증과 추리의 도구인 논리학과 인식론이 도입되었으나 점차 세상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인식 즉 물리학,윤리학,형이상학까지 신학에 도입되어 소위 스콜라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스콜라철학은 글자 그대로 하교 교육으로서 논리적이고 실증적이고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이다. 이 스콜라 신학은 개념 구별을 엄밀하고 정확하게 하고 논리의 전게를 3단 논법에 의한 일사불란한 체계안에 이룩하고 주관적인식 보다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학풍이다.
이런 학풍은 안셀모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Petrus Abelardus(+1142)는 이런 방법을 철저히 밀고 나가서 이해하지 못한것은 믿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일반 사물은 물론이고 계시 진리까지도 철학적 설명을 가했고 Teologia라는 단어를 보편화 시켰다. Abelartus식 스콜라 철학에대해서 S. Bernardus (+1153)는 신학이 신앙생활의 일부가 아닌 순수학문이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12C말에서 13C초에 걸쳐서 파리,옥스포드,볼로냐,나폴리등에 현대적 의미의 대학이 조직되고 거기서 스콜라 철학은 급속도로 조직되어갔다.
이 시대의 저명학 신학자로서는 S. Albertus(+1280) 그리고 그의 제자 S. Thomas Aquinas(+1274)이다. Thomas는 Albertus를 따라서 객관적 인식으로서의 신학의 고유성을 주장한다.
고대의 교부들이 신학을 항상 신앙생활의 일부로서 간주한데 반하여 신심에서 독립한 지식으로서의 신학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위해 그는 Aristoteles의 철학적 인간 인식과 세계인식을 그 형식뿐아니라 내용까지 채택하여 승화시키고 비상한 사변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체계를 이룬다. 그는 신을 정점으로 하는 세계관을 세우고 모든 문제를 하느님과의 관련하에서 고찰하는 것이 신학이라 하고 인생과 우주에 관한 그때까지의 지식을 신학에 흡수하여 조직화하였다. 그의 사고의 특징은 사물을 일단 세밀하게 분석하여 인식한 후에 대규모의 종합적인 건물로 재 구성하는 조직력이다.
Thomas가 새로운 종합적인 신학을 건설하는 동안 S. Bonaventura(+1274)는 Augustinus의 흐름을 심화시켜서 신학이 객관적 인식이 아니라 신앙의 정서적 습성이라 한다.
이 외에 무수한 유명 무명 신학자를 배출하였으나 그들의 공통점은 자연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굳게 믿고 있다는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을 조직적인 체계안에 수용하고 있다.
13C말경부터는 이 원칙에 대하여 회의가 생기게 되었다. Duns Scotus (1266-1308)는 우리의 자연 이성은 자연계 밖의 것은 인식할수 없기때문에 우리의 인식개념을 하느님께 적용하는 유추법(Analogia)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의지에 의한 계시는 그대로 믿는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함. 이렇게 하여 예민한 두뇌의 소유자인 Scotus는 자기도 모르게 Schola신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학문과 신앙을 조화시키기 보다 그저 병립시키는 태도는 William occam(+1350)이 유명론(唯名論)을 주장한데 이르러 14-15C에는 스콜라 신학이 정체에 빠지고 종교나 신앙 문제에 대한 인간 이성의 무력함을 말하는 경향은 사람들의 관심을 초자연 세계보다 직접적인 인간의 문제에로 돌리게 하고 아직까지 불신앙의 시대에는 이르지는 않았지만 신앙문제는 무조건 승인할 따름이지 연구하고 탐색할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