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성서적 인간학 개요
제관계문헌이든지 또는 야휘스트계 문헌이든지, 예언서, 지혜문학 모두 역사와 자연을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인간학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비록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는 못하드라도 인간학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칼 바르트라는 개신교 신학자가 성서에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다가 이렇게 탄식한 적이 있다.
“아직도 교의신학자가 양심과 확신에 따라서 신.구약성서의 연구가들이 물려준 결론을 자기에게 관련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지 못한 것같다”.
이 이야기는 성서에 충실하게 바탕을두고 있지 못한 교의 신학자들을 질책한 것이지만,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만큼 인간 자신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으로도 들린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나와 상관된 문제들, 정치,경제, 문화, 하느님, 교회… 그러나 정작 나에 관한 질문을 얼마만큼 심각하게 다루었는가?
솔직하게 우리들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라”고 했다. 그 한마디로 그는 위대한 철학자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우리는 그 해답을 찿을 수 없을 거라는 결론을 미리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긴 해도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대한 질문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을 아니라고 본다.
2.1.5.1 인간: 영혼, 영, 육의 종합으로서의 인간
우선 성서의 인간이해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이론적이기보다 체험적이라는 사실이 그 기본이 되고 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본래 성서적인 개념도 의도도 아니다. 이런 오해는 이미 히브리어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셈족 사상에서 마음, 영혼, 육신, 정신등과같은 개념 뿐만 아니라 귀와 입, 손과 발같은 개념들도 서로 동등하게 교환되는일들이 드물지 않게 발견되고 이런 육체의 부분을 지시하면서 그 지체가 지니고 있느 활동과 연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 오는 저 발이여! ”(이사 52,7).
여기서 지체의 어느 부분을 말함으로써 그 기능을 표현하는 종합적인 사고를 보게된다. 이러한 종합적인 사고 방식의 히브리어를 우리의 언어로 바꾸고 어떤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대부분 그 뜻을 그르치고 만다.
여기서 구약성서의 인간학을 자세히 볼 수는 없고, 몇가지 중요 단어를 중심으로 살펴 본 후, 결론을 말하고자 한다.
1) 우선 <네페쉬>라는 단어를 인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단어는 목구멍, 목,욕구, 영혼, 생명, 사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구약성서에 약 755회 사용되고 있는데, 희랍어 번역은 600번 정도를 이 단어를 psyche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번역은 주로 영혼으로 번역하고 있다. 우선 창세기 2,7에 나타난다. 우리말 공동 번역에서는 “숨을 쉬는 존재”로 번역되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공동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흙덩이를 떼어다가 사람을 만들고서 코 속으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네페쉬가 되었다“
ㄱ)목구멍을 표현하는 네페쉬는 배고픔, 목마름등의 갈망을 지닌 인간을 표현한다고 보여진다.
ㄴ)목을 의미할 때, 역시 네페쉬는 생명과 죽음과 관련된다. 우리 나라말 역시 “목 잘렸다”는 말은 “삶의 기반을 상실했다”는 뜻과 아울러 생명과 삶과 깊이 연관을 지니고 있다. 목은 신체의 일부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전체를 의미하는 데, 바로 억눌리고 위험에 빠져서 도움이 필요한 인간을 드러낸다.
ㄷ) 욕구를 나타날 때 네페쉬는 역시 생명보존과 생명구출의 방책을 갈망하는 곤궁한 인간, 위험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ㄹ) 신체의 지체 목, 또는 목구멍을 지시하는 네페쉬는 더 넓은 의미에서 생명자체를 의미한다. 네페쉬는 생명과 직결된 기관으로 음식과 공기를 절재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이런 경우 종합적 사고에서 곧장 네페쉬가 바로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시편 30,4 에 “야훼여, 당신이 나의 네페쉬를 하계에서 끌어 올리셨읍니다”라는 귀절을 대하게 되는데, 여기서 네페쉬를 단순히 목, 또는 목구멍으로 번역할 수 없다. 오히려 여기서 생명자체를 의미한다.
ㅁ) 네페쉬를 생명으로 번역할 수 없는 곳도 있다. 가령 레위기 17,10에 “누구든지…어떤 피를 먹는 자는, 피를 먹는 그 네페쉬에게서는 내가 내 얼굴을 돌리겠다”는 귀절을 만난다. 여기서 네페쉬는 오히려 사람이요, 존재를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사람은 “무엇을 먹는 네페쉬”로 불린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같은 의미로 “식구‘라는 단어가 있다. 먹는 입을 의미하지만 입이 아니라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용법을 관찰하면 네페쉬는 주로 고난에 시달리며 생명을 갈망하는 인간을 지시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니까 구약성서는 인간은 갈망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바사르> 라는 용어가 인간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네페쉬는 간혹 하느님께도 사용되고 있으나, 바사르는 한번도 하느님께 적용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동물의 경우 자주 사용된다. 예컨데 구약성서에 273회나 사용되는 이 단어는 동물의 경우에 적용된 것이 104회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단어는 인간과 동물에게 공통된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 단어는 살, 몸, 일가친척, 허약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ㄱ) 살. 창세기 2,28에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바사르로 메꾸었다고 한다. 여기서 뼈와 대조되는 살로 번역된다. 신체의 특정된 부위로서 남녀의 성기를 지시하는 곳도 여러군데 있다.우리 나라말에도 남녀가 “살을 섞었다”고 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 것이다.
ㄴ)민수기 8,7에 ”면도로 그들의 온 바사르를 밀어라“ 여기서 몸전체를 면도로 밀어라 하는 의미다. 욥기 4,15”영이 나의 앞을 지날때 나의 바사르에 있는 털이 곤두섰다“. 즉 바사르는 몸을 의미하고 있다.
ㄷ) 살붙이, 골육지친등의 살 또는 몸과 연결되어 일가친적을 의미하기도 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 처치하려고 할 때 유다가 나서서 형제들에게 “그는 우리 동기(동생)이요, 우리의 바사르다”(창세 37,27)라고 말한다. 레위기 18,6은 근친상간, 또는 혈족간의 성교를 금지하는 법에서 “너희는 아무도 자기 바사르의 몸에 접근하여 그 부끄럼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라고 명하고 있다. 이러한 친족성은 노아 홍수에서 더 넓게 적용되어 나타난다. “홍수를 내어 하늘아래 생명의 호흡을 하는 모든 바사르를 다 쓸어 버리리라”(창세 6,17). 여기서는 바사르가 살아있는 모든 인류의 인종적인 친족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ㄹ) 마지막을 볼 수있는 것이 허약성의 의미다. 욥기 10,4에서 욥은 하느님께 ”하느님,당신의 눈도 바사르의 눈과 같으시며, 사람이 보는 것만큼 밖에는 보지 못하십니까?“하고 대든다. 시편 56,4에 ”나는 하느님을 믿어 두려운 것 없사오니, 나에게 바사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읍니까?“라는 귀절이 있다. 하느님과 대조된 인간의 전형적인 것으로서의 바사르는 무력하고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바사르는 본래가 자기 자체 안에서 몰락할 것으로서의 인간임을 보여준다. ”사람은 바사르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창세 6,3). 바사르로서의 인간은 거룩한 하느님 앞에서 몰락할 존재만이 아니라, 죄악에도 빠지기 쉬운 존재이다. 바사르라는 용어를 통해서 구약성서는 인간이 이미 몰락할 운명을 지닌 피조물로서의 무력을 나타낼뿐 아니라 하느님 뜻에 대한 진실함과 순종에 있어서도 허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3) 구약성서의 인간이해를 위해 보아야 할 세번쩨 단어는 <루아하> 이다. 우선 루아하는 바람을 지시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390여번 사용된 가운데 113회가 바람을 의미하고, 인간이나 동물보다는 하느님께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루아하는 바람, 숨, 생명력, 영, 정서, 의지력으로 번역될 수 있다.
ㄱ) 창세기 1,2에 루아하가 물위를 떠도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낮의 루아하는 시원하고 생기를 일으키는 서늘한 미풍을 뜻한다(창세 3,8).야휘스트계작가는 루아하를 변혁을 일으키는 힘으로 이해하였다고 보여진다. 민수기 11,31에서는 바람이 불어 메추라기를 몰고 온다. 루아하는 이처럼 언제나 야훼의 작업의 도구로 나타난다. 다시말해 루아하는 신적인 전능의 어떤 것으로 허약한 인간의 바사르와 대조되어 나타난다.
ㄴ) 하느님은 이 루아하로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었다. “당신이 당신의 루아하를 불러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롭와 집니다”(시편 104, 30). 생명과 죽음은 바로 루아하에 달려 있다. 제관게 문헌의 홍수 설화는 생명체가 바로 “생명의 호흡을 지니고 있는 육체”, 다시 말해서 생명의 루아하를 지니고 있는 바사르라고 말한다((창세 6,17; 7,15). 여기서 우리는 루아하를 숨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ㄷ)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나는 그에게 나의 루아하를 주어,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이사 42,1)는 귀절이 있다. 여기서 루아하는 영 또는 하느님의 전권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이러한 전권으로서의 영의 모습은 왕을 도유하는 모습에서, 판관들을 세우는 모습에서 항상 나타난다. 이처럼 영으로 또는 숨으로,바람으로 표현 되는 루아하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느님의 전권을 지닌 존재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성적인 인간을 지시하는 <렙>, 또는 <레바브>라는 단어가 있다. 더욱 자세한 것은 한스 발터 볼프 의 ”구약성서의 인간학“(신학 총서 제 10권, 분도 출판사)을 참조할 수있다.
어떻든 이상과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육체적으로 몰락할 운명의 허약한 존재요, 그럼에도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존재로서 하느님에 의해서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고 육체를 멸시하거나 영혼을 귀한 것으로 차별하지도 않고, 구태여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화시겨 이야기 하고 있다. 하느님에게도 마음과 손과발, 눈 즉 감각할 수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이 구체적인 한 인간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앞서서 구약성서는 그들 특유의 단어로써 하느님의 육화를 미리 그려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하느님의 의인화법은 하느님을 인간으로 전락시킨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올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안에서 이루어 진 하느님의 육화는 하느님의 위치를 실격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품위를 하느님께서 인정하셨다는 말로 알아 들을 수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를 논할 수 있다고 본다.
2.1.5.2 교의 신학적인 종합적 결론
이제까지 우리는 성서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산으로 물려 받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을 창조주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야훼 하느님이 역사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바로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교의라는 것이 교회가 권위있게 가르치는 이론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마땅히 성서적 계시를 권위있게 해석하여야만 한다. 여기서 권위라는 것은 목에 힘을 주는 것,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의 신학은 어쩔 수 없이 성서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성서 신학과 교의 신학의 경게가 애매모호할 때가 있다. 가톨릭 교회의 창조이론은 구약성서를 자료로해서 두가지 전망에서 해석하고 있다. 창조의 주역으로서 창조자에 관한 것과 창조 작업으로서 세상,인간, 천사처럼 하느님의 창조물에 관한 것이다.
1. 우선 창조자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 교의가 그 창조자가 신적존재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증언으로부터 그 기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여기서 신앙은 확고한 바탕을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분명하게 드러내신 한분이신 하느님 야훼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숨 쉬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나 야훼가 만물을 창조하였다. 나는 혼자서 하늘을 펼치고, 땅을 밟아 늘였다. 그 때 누가 나를 도왔는냐?”(이사 44,24).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Verbum)과 더불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잠언 8,22-27; 지혜서 9,1- 10,1 참조.
그분은 스스로, 다른 어떤 도움도 없이,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거나 영적인 것이거나 어떠한 도움도, 제한도 없이 창조하셨다. Bara라는 동사는 이러한 하느님의 고유한 창조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느님은 세상, 인간, 그리고 역사에 그 기원을 마련해 주셨다. 그 시작과 더불어 그 끝도 마련해 주실 것이다. Bara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이루시는 창조의 방식을 뜻하기도 한다. “하늘과 땅, 바다 위와 바다 속 깊은 곳 어디에서나 야훼께선 무엇이나 뜻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시편 135,6). Bara라는 동사는 전능한 형태의 창조를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인간도 그런 형태의 창조를 이룰 수 없다. 그 것은 오직 헤아릴 수 없고, 흔들릴 수 없는 하느님의 신성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러한 창조 행위는 하느님에게 유일무이한 고유한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세상과 역사의 시작을 부여한 것만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인 세상과 역사의 종말까지도 관리하신다는 사상을 확고하게 한다. 이러한 결론에 대한 증언은 구약성서가 자주 장황하게 모든 것의 시작과 그 끝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카톨릭의 교의는 세상창조가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임을 구약의 지헤문학을(시편 90,2; 잠언 8,22) 빌어 확고한 신앙으로 표현하고 있다.: “산들이 생기기전, 땅과 세상이 생기기전 한 엣날 부터 영원히 당신은 하느님”(시편 90,2).
세상의 물질을 두고 영원하다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찿아 보지 못한다. 그 것은 고대 희랍 사상가들로부터 유래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바, 시간 역시 세상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시간 역시 창조자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구약성서는 아주 적은 양의 기록들만이 이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지혜서 11,17에서 “무형의 물질로부터 세계를 만들어 내신 주님의 전능하신 손이 곰과 사나운 사자들의 무리를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자료는 마카베오 7,28이다. “하늘과 땅을 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자기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카톨릭 교의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한다.
성서의 창조에 관한 많은 증언들은 서로 상이한 관점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성서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창조가 “어디로 부터”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 하느님의 행위에 주목하고 있다. 다시말해 하느님의 영원하신 선성(Bonta)에 관심과 강조점을 두고 있다. 또 한가지 관심은 하느님이 품고 있었던 첫번째 계획을 따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다. 여기서 가톨릭의 교의는 두가지 점을 제시한다.
ㄱ) 하느님은 당신의 지혜를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
ㄴ)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또 창조하시려고 계획하셨던 동기는 그분의 선성에서 비롯된다.간단히 말하면 계시의 원천들과 해석들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창조는 창조주의 지혜로운 사랑으로부터 그 기원을 지닌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성서는 완전한 실재, 완성된 실재를 의미하는 그 종말을 투사하고 있다. 역사와 창조의 종말은 하느님의 영광과 피조물의 선(행복)과 분리될수 없는 긴밀한 연결안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존재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창조주를 찬미한다. 창조물들이 존재하고, 숨쉬고 있고, 성장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된다. 하느님의 영광을 창조의 첫번쩨 목적으로서 규정하고, 이어서 피조물의 선(행복), 혹은 인간의 행복을 창조의 두번째 목적으로 두는 것은 전통적인 교의 신학이 정당하게 개념적 분리를 시도하고 있지만, 간혹 그 자체로 확고한 가치를 지니는 피조물의 실재를 경시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지않았다. 시편을 보면 이와같이 구별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성서는 창조의 제 7일을 언급하는 가운데 창조주의 거룩한 그 날이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창조된 피조물에게도 역시 축복이 되는 날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서는 무엇보다도 파기될 수 없는 하느님의 약속이라는 은총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의 어떤 죄로도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상에 주신 이러한 은총을 상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2.교의 신학에서 보존에 관한 이론은 창조 작업의 이론에서 그 첫머리를 이루고 있다. 이제 성찰해야할 대상은 더 이상 세상이 생겨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어떻게 계속 그 존재를 지속해나가며, 어떤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냐는 것이다. 여기서 관심은 세상과 역사자체에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구약성서는 세밀하게 분석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컨대 지혜서 11,25이하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느님께 드린다. “만일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스스로 부지할 수 있겠으며, 그 분이 불러 주시지 않은 것이 어떻게 스스로 연명할 수 있겠는가?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
이와같은 종합적인 표현안에서 교의신학은 두가지 점을 지적한다. 보존과 하느님의 섭리다. 보존에 관련해서 하느님은 결코 창조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오히려 지탱해 주고 보호해 주며, 무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하신다. 두번째 섭리에 관해서, 하느님은 그의 창조물을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에 따라 창조물의 발전을 이끌고, 그 존재를 지탱해주고 보증해 주신다는 것이다. 섭리에 관한 교의신학의 이론은 성서에서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전제한다. 이런 사상은 성서에서 유래하는 또 다른 사상과 결합하고 있다. 하느님은 창조와 연루되어 있는 진화의 법칙과 그 가치와 관련해서 세상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다스리시면서도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고 있다는 확신을 보이고 있다.
인간을 규정짓는데 무엇보다도 합당한 것은 인간이 바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야휘스트계문헌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의 중심이다. 또 제관계문헌에 의하면, 인간은 모든 창조물의 절정이다. 이러한 사상은 교의 신학으로 하여금 약간은 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게 하고, 우주적인 측면을 조금은 가치가 덜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비판을 받고 있다. 구약성서는 오히려 상당히 균형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예컨대 우주를 지시하는 말로 ”하늘과 땅“을 이야기하며, 자주 동물의 세계를 언급하고있다.
성서적 근거와 교의신학적 해석 사이에 상응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피조성에 대한 신학적인 규정이다. 여기에 두가지 관점이 있다.
ㄱ)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의 인간
ㄴ) 잘못, 또는 원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멀어진 인간이라는 두가지 측면이다. 특히 두번째 측면에 대해서 오늘날 논란이 많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죄의 특징은 무엇인가?) 원죄로 말미암아 결과로 나타나는 죽음과 생물학적 면에서의 끝장으로서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창조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신학은 구약성서를 충실하게 성찰하고 있다. 진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첫 인간은 물질과 연결된 존재로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고수한다. 그 것도 육체와 영혼이 부여된 생명체였다는 것을 고수한다. 다시말해 하느님에 의해 생명체임을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성서적 인간학에 부응한다. 성서는 어떤 결정적인 육체, 신체조직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이 역시 심리적이고 영적인 실재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교의신학이 성서와 다른 점은 이러한 영혼, 마음을 육체와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로 보면서도 서루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 점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으로 두가지 성(남.여)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남녀 모두 동일한 동일 본질을 지닌다. 하느님과의 유사성 즉 하느님의 모상이다.모두 똑같이 자연적인 실재를 초월해서 하느님께 관련을 지니고 있다 초자연적인 것과 연결되어있는 이러한 수신력(ricettivita)는 하나의 위험부담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긍정적인 가능성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 그분으로부터 거룩하게 되고, 풍요롭게 되고 현양된다. 한편 부정적인 가능성은 교만해 질 수 있는 태도이다. 하느님으로 부터 주어진 어떤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세다. 하느님을 거스려 또 하나의 하느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