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사)

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세다. 하느님을 거스려 또 하나의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자세다. 애시당초부터 인간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느님이 주신 계약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든가 양자택일을 해야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교의신학은 죄의 본질로 보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계획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것이요, 생명에로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요, 파멸의 결과를 자초하는 것으로 보았다. 죄 또는 죄로 말미암아 형벌로 주어지는 결과는 죽음의 양식과 관련되어 있다. 구약성서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생물학적인 사멸성은 매우 근본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당신께서 만드신 이 인생의 덧없음을 기억하소서. 어느 누가 영원히 살아 죽음을 만나지 않으리이까”(시편 89,47-48). 다시말해 인간은 본성상 죽어야 할 존재다. 그러면서도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죽음의 형식이 묘사된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5,12-15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 지혜서 1,12-15에서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의 죽음을 가져온다. 빗나간 생활을 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하지 말고 그릇된 행위로 파멸을 초래하지 말라.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는 멸망의 독소가 없고,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덕스러운 자들은 지옥을 모르며, 의인은 죽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두가지 형식을 본다. 여기서의 관심은 두번째 형식의 죽음에 관한 것임을 본다. 오늘날 교의신학의 과제는 창조질서로부터 유래하는 비자연적인, 죄로 말미암아 조건 지워진 죽음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는 이점에서 커다란 공백을 남기고 있다. 다만 서서히 , 죽은 자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중재로 어떤 희망이 싹트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창조주 하느님은 죽음 건너편에서도 그 권능을 사용하시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리라는 것이다.
한편 죄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죄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의 행위로서 특별하게 두드러지는 행위이다.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요, 계명의 위반이요, 하느님께의 불순종이다. 죄는 몰라서,무지해서 빠지는 함정이 아니다. 오히려 죄는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범하는 행위다. 죄의 행위에는 역시 어떤 선한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결국은 목적과 어긋나는 어떤 것을 즐기려는 가운데 하느님의 의지를 거스리는 것이다. 죄인은 본인에게 유리한 것, 어떤 선한 것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의 절대성과 하느님이 원하신 창조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서 죄는 발생하지 않는다. 죄는 창조와 대비해서 점점 축적되고 커져가게 되는 일종의 폭력으로 구약성서에서 묘사되고 있다(창세기 6,11.13). 죄로 말미암아 피조물은 그의 자유라는 선물을 악화시킨다. 부패하게 하고 거기에 휩쓸려 모든 것을 고통에 빠져들게 한다. 측정해 볼 도리없는 신비들은 이성적인 어떤 방법으로도 항상 신비로 남게 마련이다. 죄 역시 그의 확산, 악을 범하고 악을 당하게 되는 연대성, 악에로의 관성에 있어서 신비다. 이러한 신비에 직면해서 교의신학은 성서에서 그 실마리를 찿고자 한다.
3. 신약성서의 창조신학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창조론에서 인간의 최종의미와 그 역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하나의 구원론이 등장한다. 또 세상의 심판과 육신의 부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종말론도 이 구원론을 근거로 등장한다. 신약성서도 창조주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미 마련하고 있는 마지막 완성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건이 유일하고 독특한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신약성서는 구원의 기쁨이라는 측면을 잊고 있지 않다. 예수 역시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사건, 창조된 실재의 종말을 선포하면서 창조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하게 창조가 구약성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데 비해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복음선포에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의외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대의 사고 속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새삼 많은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공관복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창조신앙을 전제하고, 그 하느님의 창조신앙을 자신의 하느님 나라의 설교의 전제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약은 창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신약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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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세다. 하느님을 거스려 또 하나의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자세다. 애시당초부터 인간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느님이 주신 계약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든가 양자택일을 해야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교의신학은 죄의 본질로 보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계획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것이요, 생명에로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요, 파멸의 결과를 자초하는 것으로 보았다. 죄 또는 죄로 말미암아 형벌로 주어지는 결과는 죽음의 양식과 관련되어 있다. 구약성서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생물학적인 사멸성은 매우 근본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당신께서 만드신 이 인생의 덧없음을 기억하소서. 어느 누가 영원히 살아 죽음을 만나지 않으리이까”(시편 89,47-48). 다시말해 인간은 본성상 죽어야 할 존재다. 그러면서도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죽음의 형식이 묘사된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5,12-15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 지혜서 1,12-15에서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의 죽음을 가져온다. 빗나간 생활을 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하지 말고 그릇된 행위로 파멸을 초래하지 말라.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는 멸망의 독소가 없고,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덕스러운 자들은 지옥을 모르며, 의인은 죽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두가지 형식을 본다. 여기서의 관심은 두번째 형식의 죽음에 관한 것임을 본다. 오늘날 교의신학의 과제는 창조질서로부터 유래하는 비자연적인, 죄로 말미암아 조건 지워진 죽음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는 이점에서 커다란 공백을 남기고 있다. 다만 서서히 , 죽은 자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중재로 어떤 희망이 싹트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창조주 하느님은 죽음 건너편에서도 그 권능을 사용하시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리라는 것이다.
    한편 죄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죄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의 행위로서 특별하게 두드러지는 행위이다.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요, 계명의 위반이요, 하느님께의 불순종이다. 죄는 몰라서,무지해서 빠지는 함정이 아니다. 오히려 죄는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범하는 행위다. 죄의 행위에는 역시 어떤 선한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결국은 목적과 어긋나는 어떤 것을 즐기려는 가운데 하느님의 의지를 거스리는 것이다. 죄인은 본인에게 유리한 것, 어떤 선한 것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의 절대성과 하느님이 원하신 창조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서 죄는 발생하지 않는다. 죄는 창조와 대비해서 점점 축적되고 커져가게 되는 일종의 폭력으로 구약성서에서 묘사되고 있다(창세기 6,11.13). 죄로 말미암아 피조물은 그의 자유라는 선물을 악화시킨다. 부패하게 하고 거기에 휩쓸려 모든 것을 고통에 빠져들게 한다. 측정해 볼 도리없는 신비들은 이성적인 어떤 방법으로도 항상 신비로 남게 마련이다. 죄 역시 그의 확산, 악을 범하고 악을 당하게 되는 연대성, 악에로의 관성에 있어서 신비다. 이러한 신비에 직면해서 교의신학은 성서에서 그 실마리를 찿고자 한다.
    3. 신약성서의 창조신학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창조론에서 인간의 최종의미와 그 역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하나의 구원론이 등장한다. 또 세상의 심판과 육신의 부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종말론도 이 구원론을 근거로 등장한다. 신약성서도 창조주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미 마련하고 있는 마지막 완성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건이 유일하고 독특한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신약성서는 구원의 기쁨이라는 측면을 잊고 있지 않다. 예수 역시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사건, 창조된 실재의 종말을 선포하면서 창조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하게 창조가 구약성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데 비해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복음선포에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의외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대의 사고 속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새삼 많은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공관복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창조신앙을 전제하고, 그 하느님의 창조신앙을 자신의 하느님 나라의 설교의 전제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약은 창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신약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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