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I. 세상의 완성
1. 서론
1.1. 오늘날의 문제점
1) 세상의 종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오늘날 사실상 많은 부담을 안고 있다. 19-20세기의 종교비판 이래로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인간 품위에 맞게 조성해야하는 과제를 회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한마디로 내세를 위해서 현세가 무시된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현세의 삶은 ‘하와의 자손이 귀향살이하는 눈물의 골짜기’로서, 온갖 유혹과 죄의 위험을 피하고 수많은 고통과 역경을 견디어 냄으로써 내세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세상과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래서 오늘날 막스 철학에서는 개인의 죽음을 다시 중심 주제로 놓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종말 신앙에 대해서는 불신을 내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막스 철학자 가르다브스키(Vitezslav Gardavsky)는 하느님과 영혼 불멸에 대한 신앙은 죽음에서 진지함을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일회적인 현재의 삶, 궁극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시간, 모든 만남들이 지극히 소중한 현재의 삶을 평가절하한다고 주장하였다. 참조: V.Gardavsky, “Der maxistische Atheismus als Metaphysik”, in: ders., Gott ist nicht ganz tot, München, 1871, 227-236.
얼마전에 우리 나라에서 예수의 재림과 휴거가 가까웠다고 하면서 가정과 사회를 버리고 자신만의 구원을 준비하고자 열중하던 이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주장이 다시 힘을 얻게 된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이 과연 맞아들어가는 것일까? 교회는 그 동안에 종말에 대한 희망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성서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미래의 이름으로 현세를 등안시하는가?
2) 지난 수십년간 인류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증가되었다. 60, 70년대에는 인간의 능력과 노력등을 통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에 낼 수 있다는 희망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실제로 국수주의, 나치즘이 종식되고 기술과 과학의 발달로 이전에는 없었던 편리와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 반대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능력이 점점더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서 핵의 개발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되지만, 그보다는 강대국 간의 무기 경쟁으로. 더 치닫고 있다. 현재 강대국은 인류를 멸망시키고도 남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외에도 산업의 발달은 생태계를 파괴하여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신념은 흔들리게 되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자라나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의 의식 속에는 발전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병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3) 그외에도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대두되었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60,70년대에 정치적 영역과 인간의 능력에 집중하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아무튼 신학 분야를 벗어나서 수많은 서적들이 그 동안 도외시하였던 주제인 죽음에 대해서 다루었다. 특히 현대 의학의 힘을 빌어서 “의학적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서 죽음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환자들에 대한 보고서가 많이 읽혀지고 있다. 또한 동양의 종교에 근거를 두고있는 전생, 환생 이론이 서양에서는 물론 얼마전 우리 나라에서도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죽음과 죽음 건너편의 세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자신에게 새롭게 물어야 할 것이다.
1.2. 종말론의 변천
終末論(eschatalogia)은 교의신학의 한 분야로서 전통적으로는 “마지막 것들”(ta eschata)에 관해서 가르쳤다. 즉 죽음, 심판(私심판), 연옥, 천당, 지옥, 세상의 종말(公심판)에 대해서 다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제들은 미래 어느 때엔가 순전히 외부로부터 세상과 인간에게 다가오는 사건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에 비해서 현대 신학에서는 종말론을 어떤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피조계의 미래로서, 순전히 외부로부터 인간과 세계에 덮쳐오는 무엇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삶의 완성으로서, 순전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와도 관련된 것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종말론은 완성에 대한 희망, 그를 근거로 한 현재의 삶을 숙고하는 과목이라고 하겠다.
개인의 완성은 통상적으로 개인적 종말론에서, 인류 혹은 세상의 완성은 일반적 종말론에서 다룬다. 우리도 이런 방법적 구분을 받아들인다. 두 주제가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쉽게 놓칠 위험이 있기에 이런 구분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서술을 가능하게 하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예전의 교과서에서와는 달리 우리는 개인적 종말론에 앞서 일반적 종말론을 살펴보겠다. 이런 순서는 성서의 구세사의 흐름에 더 부합하는 동시에 내적인 논리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개인에 대한 희망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라는 더 큰 맥락 안에 서있다.
여기서 “세상”을 말할 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세상”은 하느님 이외에 (1) (인간을 포함한) 피조계 전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2) 인간 이외에 인간의 주위에 있는 실재로서, 인간에게 영향을 주고 도전에로 이끌며 인간에 의해 다시금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의미의 “세상”은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나의 세상”) 관계적 개념이라고 하겠다. 종말론에서는 어떤 의미의 “세상”의 완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가? 지상의 동물과 식물의 미래에 대해서도 얘기하는가? 은하계와 그 안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얘기하는가? 혹은 근본적으로 이 지상의 인간의 미래에 한정하면서 인간을 둘러싼 세계, 인간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 세계를 다룰뿐인가? 이 질문은 조직신학적 고찰에서 다시 제기하게 된다.
2. 성서적 근거
유다-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역사는 그 시초부터 희망의 역사였다. 이 희망은 개개인의 미래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죽은 이들의 부활 혹은 불멸의 영혼에 대해서 말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그 희망은 땅, 후손 그리고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내용으로 하는 옛 약속과 함께 시작되었다.
2.1. 옛 약속들
처음부터 희망의 역사인 유다-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역사는 하나의 약속으로 시작한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창세 12,1-2; 참조: 창세 13,14-17 그리고 15,1-5). 여기서 이미 세가지 전통적인 약속의 내용이 나타난다: 땅, 후손, 하느님의 보호이다. 그런데 이 약속에는 요청, 즉 길을 가라는 부름이 뒤따른다.
출애급의 역사도 비슷하게 시작된다.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하느님은 해방과 차지하게 될 땅에 대해서 언급하신다(출애 3,7-12). 약속된 땅 매혹적으로 아름답게 묘사된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이라는 것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능가한다. 그런데 다시 약속에 요구가 뒤따른다. 모세는 파라오와 협상을 해야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행해야 한다: 즉 백성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내야 한다. 이렇게 약속과 희망이 역사를 진행시킨다. 시나이 산에서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특별한 보호를 약속하시는데, 이로써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을 뭇 민족 가운데에서 선택하신다(출애 19,4-6). 이 주제도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상기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약속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탈출하면서 그리고 갈대바다를 건너면서 체험한 것을 근거로 한다.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이제 이스라엘은 자유의 땅으로 향한 여행을 하느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행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이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와 배려를 누린다는 것, 즉 “사제의 왕국”을 차지하게 된다: 백성 전체는 -사제들의 특권으로 간주되는 것-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즉 “거룩한 백성”,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다시금 약속은 하나의 요청과 연결되는데, 이번에는 조건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새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나중에 땅, 후손, 보호(계약)이라는 세가지 약속에 네 번째의 것이 추가된다. 즉 이스라엘의 왕권이다(예를 들어서 2사무 7,8-16). 땅을 굳건하게 소유하고 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고자하는 이스라엘의 희망은 이제 야훼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돕는 다윗 왕조의 지속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왕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2사무 11-12) 왕국은 분열되고, 이어서 전쟁의 패배, 이민족의 지배, 유배가 뒤따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에는 온갖 좌절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약속들을 넘어서는 희망이 자라난다. 이사야는 유다 왕국이 약화되고 북왕조는 망할 기미가 보이는 기원전 8세기에 새로운 평화의 왕의 약속하면서 다윗 왕조와 결부된 과거의 희망을 새롭고도 증가된 형태로 표현한다(이사 9,1-6): 하느님은 이민족의 지배를 끝내실뿐만 아니라 과거의 희망을 능가해서 전쟁 자체를 없애시고 그래서 군화와 피투성이가 된 군복이 더 이상은 없게 될 것이다. 영원한 평화가 있을 것인데, 이는 전쟁이 그치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법과 정의, 살아있는 모든 것 가운데 수립되는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다윗의 왕좌에 앉게 될 새로운 통치자에 의해서 실현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새로운 고통에 억눌려서 다른 희망의 내용이 자라난다. 다시금 깊은 불행에 빠져서 즉 바빌론 유배라는 중에 이스라엘은 출애급을 상기시키면서도 이보다 훨씬 더 위대한 새로운 출애급을 선포하는 약속을 듣는다: 화려한 행렬처럼 이스라엘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연 사물조차도 함께 기뻐할 것이다(이사 43,16-20; 55,12). 새로운 출애급이 지향하는 목표는 더 빛나는 색채로 채색되어 묘사된다. 즉 그 목표는 예전과 같이 넓고 비옥한 땅이 아니라 수도 예루살렘, 파괴되기는 했지만 곧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움으로 다시 건축될 예루살렘이다(이사 54,11-12).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희망에도 새로운 색채가 첨가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에집트에서는 야훼를 미처 체험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비참함, 유배살이를 야훼께 대한 자신의 불충실의 결과로 본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바로 이런 상황을 대상으로 주어진다. 선택에 용서가 들어선 것이다. 이는 첫 번째를 능가하는 “새로운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과거에는 당신 백성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시고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질서인 “율법”을 돌판에 새겨 주셨지만, 이제는 당신의 법을 “그들의 가슴”에 새겨주실 것이다(예레 31,31-33).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정치적인 약속(에제 36,26)이 내면의 개선(改善)과 연결된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의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에제 36,26). 에제키엘은 말라버린 뼈들에 하느님 자신이 숨을 불어 넣어 다시 살려내는 환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절망 속에 소멸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려내어 고향으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였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에제 37,5.12.14).
다음에서는 옛 희망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몆가지 관점을 간추려 본다.
(1) 우선 희망의 내용은 세계 내적인 것으로서, 그 희망의 성취는 구원하고 보호하며 생동케하는 하느님의 가까이하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2) 자라나는 희망
이스라엘의 역사는 직선적 상승의 역사, 분명한 발전의 역사라고 표현할수는 없지만, 희망이 점점 더 확장되는 역사라고 하겠다. 아브라함에게는 목초지가 약속되었지만 출애급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약속되었다. 나중에 바빌론 유배 중에 보석으로 단장된 도성 예루살렘의 상징이 추가된다. 마지막으로 그 도성은 모든 민족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다(이사 2,2-3). 후손에 대한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속적인 정치적 존립에 대한 희망으로 자라났다. 명망이 있고 영속적인 왕조에 대한 약속은 평화의 왕에 대한 약속으로 바뀐다.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안정에 대한 희망은 낙원과 같은 평화의 나라에 대한 기다림으로 변화된다(이사 11,6-8; 65,17-25).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는 시나이에서의 보호 계약으로 발전하였고, 이 계약은 다시 용서와 새로운 계약을 통해서 능가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점점 더 넓은 희망의 지평으로 향하는 여행처럼 보인다.
(3) 약속과 기대
약속들은 역사적 체험과 더불어 변화되고 성장한다. 이 약속들은 백성들의 당면한 관심를 비껴가기 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된 기대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약속은 인간이 갖는 기대를 있는 그대로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때로는 인간의 기대와 상치된다. 잘못된 희망, 즉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간과하고서도 좋은 시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자라나는 곳에는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심판의 말을 하면서 환상을 깨우치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서 왕정시대에 나타난 화폐 경제로 부유하게 되어서 모든 집과 토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기대를 뒤엎는 심판의 말씀이 내린다. 이사야 예언자는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온 세상을 혼자 살 듯이 차지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집은 흉가가 되어 인기척이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이사 5,8-9). 또한 술에 취하는 데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은 유배, 굶주림, 목마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다(이사 5,11 이하). 경건하지만 환상 속에 사는 이들의 기대도 무너진다. 하느님의 성전을 그들 가운데에 모셔놓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보호 안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인 약자들(유랑인, 고아, 과부)의 권리를 돌보지 않는 이들은 판관시대에 실로의 성전이 당한 운명보다 더 나은 운명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 너희는 생활태도를 고쳐라. 그래야 나는 너희를 여기에서 살게 하리라.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어 안심하지 말고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그런데 너희는 그런 빈말만 믿어 안심하고 있다. 그러다가 모두 허사가 된다…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을 믿고 안심하지만, 나는 실로를 해치웠듯이 이 곳을 해치우고 말리라…”(예레 7,1-15; 1사무 4 참조).
하느님의 약속은 기존의 기대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현존하는 사회 구조를 신학적으로 추인하는 것도 아니다. 약속은 자주 사회비판적이고 그래서 잘못된 기대를 깨부수며 희망을 정화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약속은 현재의 세상 저 건너편의 빈 공간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인간을 지금 움직여가는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4) 희망의 근거
약속된 미래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여러 약속들에서는 과거의 역사적 체험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서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이 그러하다.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았다”(출애 19,4). 다윗에게 내린 약속도 이와 유사하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는 목동들 가운데서 너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네 앞에서 너의 원수들을 쳐부수었다…”(2사무 7,8-9). 바빌론 유배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 즉 “새로운 출애급”에 대한 희망은 첫번째 출애급에 대한 기억을 근거로 생성된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바다에 큰 길을 내시고 거세 물길을 뚫고 한길을 내신이…”(이사 43,16). 희망은 계속 자라나고, 그에 대한 표상은 변화한다. 그러나 두 번째 출애급이라는 주제에서 잘 나타나듯이 새로운 표상에서 과거의 희망의 표상과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희망은 역사적 체험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과거의 성공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사건을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희망의 근거는 아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보았다. 출애급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알아 보았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자신의 정치적 성장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와 보호를 인지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간직한 희망은 궁극적으로 역사적인 사건 배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하느님 자신에게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5) 행동에로 초대하는 약속
희망의 근거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놓여있다고 할 때, 인간은 약속의 성취를 단지 인내롭게 기다리고 그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자주 약속의 말씀은 곧바로 행동에로의 초대와 연결된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이 약속되는데, 동시에 자신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 가축떼를 이끌고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출애급 사건과 이와 아주 비슷하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느님은 동시에 모세에게 출발을 준비하도록 요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거듭해서) 광야를 거치는 오랜 행군을 견디어낼 것을 요구하신다. 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약속된 땅을 향해 가는 데에서 있다. 에집트의 고기가마에로 돌아가려는 모든 생각은 불신앙을 의미한다. 출애급 역사 전체에서 드러나는 약속과 행동에로의 초대의 밀접한 연결은 요르단을 건너기에 앞서 내린 하느님의 말씀에서 간결하게 표현된다. “너희가 요른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주민을 모조리 쫒아내고 돌로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깨드려 버려라! 산당들도 모조리 허물어 버려라. 너희는 그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살아라. 그 땅은 내가 너희의 유산으로 주는 것이다”(민수 33,52-53).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선사해주시는 땅을 정복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하는 정의와 평화(예를 들어서 이사 2,1-4)는 이스라엘이 선을 행하는 것을 배우고 억눌린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는 것(참조: 이사 1,17)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의와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 바빌론 유배살이를 하는 이들에게 내린 모든 약속은 용기를 북돋아주고 새로운 출애급을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약속과 행동에로의 초대 사이에는 내적인 연관이 있다. 약속은 그 자체가 부르심이라고 하겠다. 약속은 인간 자유에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이를 실현하도록 부른다. 이렇게 약속을 통해서 실제의 역사, 즉 인간이 자유로이 행한 역사가 형성된다.
2.2. 묵시문학
묵시문학은 본질적으로 다른 희망의 표상을 제시한다. 묵시문학은 유다이즘이 -정치적, 종교적으로- 극도의 비관주의로 흐를 수 있는 시대(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100년)에 속한다. 그리스와 로마인의 이민족 지배하에서 독립국가를 개건할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사라진 듯 보였고, 많은 이들은 권력자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다니엘서의 배경을 이루는 셀류코스왕조 시대의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시대(기원전 175-164)는 경건한 유다인들에게는 참혹한 시간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야훼 제사는 금지되었고 번제의 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이 세워졌다. 할례와 인식일도 폐지되었다. 그때까지 율법에 충실하던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갔고 또한 다수의 사람들을 광야로 피해갔다. 이에 반발해서 일어난 저항 운동은 마카베오의 주도하에 종교적 자유를 다시 얻는데 성곡하였다. 그 이후 하스모네아 왕들의 통치하에서 비교적 자주적인 유다 왕국 설립을 성공하였지만, 정치적인 권력자들은 이방인의 헬레니즘에 동화하여서 이스라엘의 경건한 이들은 이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과거에 있었던 희망의 전망, 즉 하느님께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에게 가까이 오신다는 희망은 사라진 듯이 보였다.
그래서 일부 야훼 신앙에 충실한 유다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형태의 희망이 자라났다. 사람들은 명백하게 부정적으로 흐르는 역사도 하느님께서 주재하신다고 믿었다: 하느님은 역사를 멸망에로 몰아대시는데, 이는 그 다음에 새로운, 더 나은 세상의 도래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에게 숨겨져 있지만, 하느님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계획을 들여다보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보는 자”에 대해서, 즉 하느님께서 역사의 경과를 “계시하시고” 박해받는 공동체에 무엇을 보았는지 전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게 된다. 그래서 희랍어로 계시라는 의미를 지닌 “apokalypsis”란 단어가 이런 움직임의 고유 명칭이 된 것이다(우리 말로는 “黙示문학”이라고 번역한다).
묵시문학의 중요 요소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시대가 피안으로부터 현세(옛 시대)로 돌입하여서 현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2) 새로운 시대는 지금 이미 하늘에 숨겨져 있다. “幻視者”에게는 하늘의 신비가 계시된다.
(3) “묵시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시대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곧 무엇이 일어날지를 알려준다(다니 8-11). 묵시문학에서는 전체 역사가 도식적으로 언급된다.
(4) 지금 세상의 종말에는 하느님께 적대되는 모든 세력에 대한 심판을 온다. 그리고는 사람을 모습을 한 사람이 모든 민족들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다니 7,13-14)
(5) 새로운 시대가 시작하기 전에 특별한 혼란과 시험 그리고 전염병의 시간이 있게 된다(다니 12,1). 두 시대는 내용면에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전혀 상반된다. 즉 새로운 시대는 옛 시대가 사라진 다음에야 시작된다. 마지막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현재 당하는 무서운 사건들과 예언된 사건이 역사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근거로 추론할 수 있다
(6)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면 죽은 이들이 부활한다(의로운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악인들은 영원한 치욕이 따른다)(다니 12,2-4).
(7) “묵시자”는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예를 들어서 헤녹, 모세, 다니엘)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이 그에게 이미 알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8)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서 의인과 악인이 갈린다.
(9) 묵시문학적 기록은 박해받는 야훼 신앙인들을 위한 위로의 기록이다. 동시에 하느님의 적대세력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차 있다.
이 모든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리지만, 그 당시의 청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크나큰 위안을 얻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전혀 희망이 없이 무서운 시대에 내버려진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현재를 전체 역사 진행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면서, 현재의 역사가 보이는 것과는 달리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 있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에 의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도록 종말로 내몰려지고 있다고 보았다.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들이 와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묵시문학은 역사를 초월하면서도 역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묵시문학에 나타난 희망은 과거 예언자들의 약속과는 달리 역사 내적인 미래가 아니라 역사 이후의 새로운 시대에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언자들은 역사를 구원역사로 보고서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축복이 실현되는 장소로 보았지만, 묵시문학에서 세상과 역사는 회복할 수 없이 망해버렸다고 간주하고(묵시문학적 비관주의), 그래서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와야한다고 보았다(묵시문학적 이원론). 예언자들이 회개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라고 요청했던 것과는 달리 묵시문학에서는 마지막까지 하느님께 충성하면서 인내할 것을 촉구하였다.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었으나, 묵시문학에서는 종말의 고통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파국을 앞당기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언자들에게서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희망의 대상이었으나 묵시문학에서는 의로운 자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종말론적 희망이 한편으로는 개인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선한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서 확대되었다(개인주의와 보편주의). 여기에 죽음이들도 포함시켜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바로 이 시기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명시적인 신앙이 형성되었다.
묵시문학적 기록은 성서 밖에서도 다수 발견된다. 성서에서도 묵시문학을 수용한 대목(다니엘서, 마르 13장과 병행구절, 요한 묵시록)이 있는데, 이 수용은 상당히 변형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서 마르코 13장에서는 가까이 다가온 마지막에 대한 기대가 약화되어 나타난다(마르 13,5-6.8.21-22). 복음사가는 마지막 때에 대해서 집착하는 대신에 역사 안에서 해야할 것, 즉 복음을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할 것(마르 13,10)을 가르키고, 마지막의 비관적인 상황 안에서(그 상황 이후에가 아니다!) 성령께서 현존하시게 될 것을 약속한다(마르 13,11).
묵시문학이 성서에 나타난 희망의 역사에 주는 의미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성서는 묵시문학으로부터 결정적인 희망의 내용을 얻었다: 하느님은 총체적인 파국을 거쳐서도 미래를 열어주실 수 있다는 신앙, 죽음에서 부활하리라는 희망, 원래는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던 희망을 전체 인류에게 확장시킨 것(보편주의) 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는 묵시문학에서 그리스도교의 희망과는 합치될 수 없는 요소들을 수정하였다: 마지막 때를 계산하려는 경향, 희망하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세상과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이원론적 태도, 그리고 이와 연관해서 인간의 역사를 꾸며가야하는 과제를 포기하려는 것, 하느님의 다스림은 모든 악한 세력을 완전히 소멸한 다음에야 시작될 수 있다는 견해 등을 수정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