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나)

2.3.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예수의 설교 활동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였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제일성(第一聲)으로 보도하는 이 말씀은 복음 전체의 표제(表題)이기도 하다. 공관복음에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이 대략 100번 정도 나타난다. 마태오는 간단히 “나라”라고 표현한다: 예수께서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태 4,23; 9,35; 참조 13,19; 24,14).
예수 당시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종교적 분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
(1) 혁명당원들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에 대한 이방민족의 지배에 대응하는 세력으로서의 하느님의 다스림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외국의 점령군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사람들은 다윗 가문 출신(다윗이란 이름은 이스라엘의 정치사의 전성기를 기억하도록 한다)의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나서 이방의 억업자들을 쳐부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후에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서 다스릴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면 멀리서 이방민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몰려올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하느님은 세상에서 당신의 메시아를 통해서 다스리실 것이다. 혁명당원들은 이런 희망을 로마인들을 반대하여 무력 봉기를 일으키는 정치적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2) 랍비들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는, 하느님의 가시적인 다스림이 이스라엘에서 실현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에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지금은 숨겨져 있다. 그러나 율법이 다시 충실히 지켜지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어도 두 번의 안식일 동안 율법을 지킨다면 하느님의 다스림이 다시 드러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리세이파 사람들의 윤리적인 엄격주의와 죄인들에 대한 준엄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죄와 죄인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3)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묵시문학에서는 구제불가능하게 악한 옛 시대가 곧 지나가고 완전히 다르고 새롭고 좋은 시대가 올 것을 희망하였다. 이런 변화는 오직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서 일어나고, 인간은 인내하면서 하느님께 충실히 머무르고 새로운 시대를 기다려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는 대부분 공관복음서에 찾아 볼 수 있다. 그런에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하느님 나라는 위의 세가지 방향 중의 어느 하나와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1)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자신과 자신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참조: 루가 11,20). 그러나 그는 혁명당원들이 기대하던 의미의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 메시아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자체를 피하였다. 그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참조: 마르 11,1-10)은 자신이 무력을 사용하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가 아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2) 랍비들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무엇보다도 인간의 윤리적 행동에 초점을 두었는데, 예수는 이와는 달리 하느님 나라가 우선은 선물임을 강조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우선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선포한 후에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행동에로의 요구가 나온다. 보물과 진주를 비유(마태 13,44-46)에서도 같은 구조가 발견된다. 한 사람이 진주를 발견한 것으로 이 비유는 시작된다. 즉 우선은 보물이나 진주를 발견하고 기뻐하는데, 바로 이 기쁨에서 보물이나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새로운 행동이 자라난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와 같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는 윤리적인 노력이 아니라 행복을 주는 선물이 자리한다.
(3) 묵시문학에서는 옛 시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비로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21). 새로운 시대는 옛 시대가 끝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옛 시대가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타당한 행동은 하느님 나라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즉 회개이다. 이 회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예수는 묵시문학에서와는 달리 의인들을 악인들과 대치시키지 않고 모든 이가 회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어디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자세한 내용 설명이나 정의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결정적으로 새로운 점은 나자렛 예수와 함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내용적인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예수와 그의 행동과 말씀에 대해서 말해야만 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근거를 두고서 하느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1)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 가까이 오시는 것으로서, 이 가까움은 인간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힘을 북돋아 준다.
(2) 하느님 나라는 인간을 괴롭히고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서부터 인간을 치유하고 해방시킨다. 즉 온갖 질병, 비인간화로 이끄는 여러 세력들, 낙망(落望), 인간 상호간의 통교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들(듣지 못함, 말하지 못함, 보지 못함), 내일에 대한 과도한 걱정 등에서의 치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3) 하느님 나라는 인간 상호간의 새로운 태도를 의미한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불의한 태도가 종식되고, 타인을 지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형제, 자매로 대하며, 지금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이 다시 화합하고, 용서에서 자라난 평화가 이룩된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 나라는 세상을 바꾸는 길로서의 사랑이 충만한 곳이다.
(4) 하느님 나라는 충만한 삶을 의미한다: 빵과 포도주가 모든 이들을 위해서 남아 돌아갈 만큼 충분한 곳이다.
(5) 하느님 나라는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을 의미한다.
예수가 이런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기 위해서 내세운 전형적인 상징은 (혼인)잔치인데,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었다. 그는 비유에서 자주 이 상징을 사용하였고 실제로 잔치에 참여하였다. 잔치로 비유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기쁨, 공동체, 나눔,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배부름을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 안에서 이스라엘의 옛 약속들과 희망, 특히 인간의 육신과 세상도 포함하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 집약된다. 옛 약속들이 계속되고 능가되며 부분적으로 변형된다. 예를 들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희망은 모든 이들이 배부르게 되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계속된다. 하느님의 보호와 배려에 대한 희망은 이미 제2이사야에서 용서에 대한 희망으로 변하였는데, 예수에게서는 죄인의 조건 없는 용서로 나타남으로써 구약의 율법주의적 경향을 능가한다. 또한 묵시문학의 본질적인 요소들도 수용되는데, 무엇보다도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과 보편주의에로의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옛 시대와 새 시대에 관한 관계에 있어서는 묵시문학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는 급격한 변화로서의) 세상의 종말 이후에가 아니라 이미 이 세상 안에서 시작된다: 낡은 세상 안에서 새로운 것의 씨앗으로서. 또한 묵시문학과는 달리 이미 시작된 새 시대(하느님 나라)를 맞기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하는데, 이로써 구약에서 약속과 행동에로의 촉구를 밀접하게 본 것이 계속 지속된다고 하겠다.
옛 시대와 새 시대와 관련해서 묵시문학과는 다른 입장을 위함으로써 신약성서 안에서 어떤 긴장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미 현존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가 11,20).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21).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나라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 미래의 것으로 나타난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가 11,2; 마태 6,10). 루가복음의 행복선언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주어지기로 약속된다. 그러나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미래에 배부르게 되고, 지금 우는 사람들은 미래에 웃게 될 것이다(루가 6,20-21). 최후만찬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하느님 나라는 미래(아마도 아주 가까운 미래)의 것으로 나타난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더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마르 14,25).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현재와 미래를 둘 다 포함한다: 이미 여기 있지만 아직은 아니고, 이미 작용하지만 아직은 기다려야 하고, 이미 체험할 수 있지만 아직은 희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런 긴장을 자주 “이미”와 “그러나 아직 아니”(더 나은 표현으로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라고 표현하면서, 하느님 나라는 종말론적 성격을 지녔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아직 전적으로 미래에 해당하는 사건과 상태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겪은 체험에 대해서, 즉 지금 효력을 내고 있지만 동시에 더 위대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는 실재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세상과 역사에 대해서 어떤 관계 속에 살아야 하는가가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라고 촉구한다. 용서할 준비(마태 18,,21-35), 자신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와 화해할 준비(마태 5,23), 곤경에 처한 이에 대한 투신(마태 25,31-46; 루가 10,25-37),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사랑(루가 6,27) 등을 요구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치유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치유하는 행동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의미라고 하겠다(마태 10,7-8; 루가 9,2; 10,9).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믿음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서 거기에 상응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아직 기다려야할 무엇이라고 말한다. 이는 국지적인 희망의 성취에 만족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전체 인간을 위해서 궁극적이고 총체적인 구원을 이룩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가르치신대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주도권과 완성이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인식은 인간을 성공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절망에서 벗어나게 한다. 하느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은 현재 세상과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투신을 촉구하고, 미래적 성격은 자신과 업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는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2.4. 그리스도 재림의 기대
신약성서 서간에서는 이미 일찍이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말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이라는 말로 변한다(예를 들어서 1고린 15,24). 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발견되는 변화, 즉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설교에서는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변화에 상응하는 것이다. 두 가지 변화는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실현되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다. 또한 그러므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완성될 것에 대한 희망이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 그의 “재림”(예를 들어서 1테살 1,10; 1고린 11,26; 16,22, 묵시 22,20)을 희망하는 것으로 변한다.
희랍어 παρυσια는 원래 “현존”과 “도착”을 의미한다. 그리스 문화권에서 이 단어는 군주의 장엄한 국가 방문, 특히 지방 도시 방문에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 주님의 재림을 언급할 때 바로 이런 표상이 배경에 있다고 하겠다(예를 들어서 마태 24,3.27.37.39; 1고린 15,23; 1테살 2,19; 3,13; 4,15; 5,23; 2테살 2,1.8 등). 그러나 내용상 더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적 배경이다. 하느님께서 볼 수 있도록 역사에 개입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야훼의 날”, 혹은 (간단히 표현해서) “그날”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이날에 하느님은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지속적이고 긴밀한 일치를 이룩하실 것이다(예를 들어서 이사 2,12-21; 11,10-11; 13,6; 아모 2,16; 8,9.13; 미가 2,4). 신약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야훼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되었다. 하느님의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신약성서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그리스도인의 첫 세대는 종말임박의 기대, 다시 말해서 미구에, 아직 그들이 생애 동안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기대 속에 살았다“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이 세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3,30). “주님이 내림하실 때까지 남아 있을 우리 산 사람들은…”(1테살 4,15). 이런 종말임박의 기대를 배경에서 테살로니카 인들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서 바오로는 1테살 4,13-18에서 대답한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도 재림을 체험할 것이다. 그들이 죽었지만 부활하여서 죽음의 무력화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죽은 이들을 바라보면서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죽음을 넘어서 연장된 것이다.
첫 세대가 모두 죽고 역사는 계속 진행되면서 다시금 새롭게 도전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오지 않는 것인가? (특히 루가의 기록에 따른) 신앙의 대답은 역사를 배분(配分)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가가신 저 예수는, 그분이 하늘로 가시는 것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생각에 붙잡혀서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사도 1,11-13).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예수의 승천이후 올리브 산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루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교회 공동체의 전형적인 장소이다(참조: 사도 1,12-14). 지금은 그리스께서 신자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교회의 복음 선포 중에, 빵을 나누는 가운데 오신다(참조: 루가 24,13-35). 주님의 결정적인 도래는 먼 장래로 미루어졌고, 그 사이의 시간은 교회의 시간으로서, 지금은 이 시간이 더 중요한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있는 점은 요한복음의 오랜된 전승층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철저한 현재적 해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은 오늘, 날마다 신앙의 결단을 통해서,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이미 신앙과 불신앙의 결단 안에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그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요한 3,18). 죽은 이들을 생명에로 부르는 삶에로 부르시는 하느님 아들의 마지막 날의 부르심이 지금 이미 이루어진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 과연 듣는 이들은 살 것입니다”(요한 5,25). 이렇게 해서 주님의 재림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종말에 대한 신앙이 먼 미래에 대한 희미한 희망으로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재림을 아직 기다려야할 세상의 완성으로 선포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후대의 편집의 과정에서) 미래적 언사를 원래의 순전한 현재적 종말론에 첨부하였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이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될 때가 오고 있습니다”(5,28).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 날이 강조되어 언급된다: “내게 주신 사람은 누구나 내가 잃어 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6,39).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6,54). 이렇게 해서 우리가 현재 대하는 요한복음의 최종편집에서는 종말에 대한 현재적, 미래적 언사들이 병행해서 나타난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기다림의 변화는 신앙의 전승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즉 과거의 전승내용과 새로운 체험 사이의 상호관계(correlation) 안에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체험(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죽음과 세대를 넘어서 계속되는 역사)은 처음의 신앙적 기대(그리스도의 결정적인 도래는 우리 세대에 일어난다)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 또한 역사의 체험을 변하게 한다. 즉 역사의 결정적인 완성은 아직 기다려야 하지만, 이미 역사 안에서의 상황, 인간 상호간의 만남, 개별적인 결단를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희망의 전승은, 새로운 역사적 체험은 물론 처음의 결정적인 신앙적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이미”와 “아직 기다려야 하는”의 긴장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 긴장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특징지우는 것이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희망은 바로 그리스도론적으로 옮겨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라고 할 때, “이미”와 “아직 기다려야 하는”의 긴장이 그리스도 재림에 해당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를 말한다: (1) 미래적 측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날이 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시고 그의 생애와 함께 이미 시작한 세상,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고 연루되어 있는 지금의 세상은 그리스도의 강대한 현존을 통해서 변화될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께 적대적인 한에서는) 심판을 받고, (하느님의 영에 각인된 한에서는) 완성될 것이다. (2) 현재적 측면: 역사가 비록 방해받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듯이 보이더라도,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예상(豫想)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웃사랑이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가려짐 없이 대하게 될 바로 그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이 만남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이미 심판이 이루어지고, 이 만남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일치가 자라나는 한에서 이미 죽음의 극복, 부활, 영원한 생명이 있게되며, 이 만남 안에서 세상의 한쪽이 이미 변화되는 한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게 된다.
두 가지 측면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함께 속하여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은 현재 안에서의 그 희망의 부분적인 성취로 잘려져서 조각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재림의 희망은 오로지 끝없이 먼 미래만을 향하는 것도 아니다. 재림의 희망은 현재를 우리가 바라는 미래의 완성의 시작으로 만든다.

2.5.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의 연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과 세상의 심판에 대한 신앙이 서로 연결된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는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참조: 사도 10,42; 17,31). 세상의 심판에 대한 믿음 또한 구약성서에서 오랜 전사(前史)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는 항상 하느님께로부터 정의를 기대하였다.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그분께 호소할 수 있다. 그분 앞에서 죄는 죄로서 밝혀기지 때문이다. 이것이 구약성서에 나타난 근본적인 신앙적 확신이다. 억압당하고 권리를 잃어버린 이들 편에 서게되면 여기에 희망이 간직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을 보여주는 것이 무죄하게 박해를 받는 이들이 하느님께 자신의 권리를 찾아주시도록 간청하는 여러 시편들이다(예를 들어서 시편 4; 7; 17; 26; 27; 35; 64). 오랜 동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개개인의 삶 안에서 인과응보가 이루어진다는 데에 희망을 걸었다. 이스라엘이 계약의 조항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동안 잘 살 것이다(참조 출애 20,12; 신명 5,16). 하느님께서 의인에게는 성공을 주시지만,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른다”(시편 1,6). “악을 심으면 재난을 거둔다”(잠언 22,8).
그런데 이스라엘은 고통의 길(유배)을 걷고, 의인이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욥), 행한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 항상 맞아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체험은 모든 시대에 힘을 미치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신앙이 그분께서 미래에, “야훼의 날”에 역사에 개입하시리라는 희망으로 변하도록 하였다. 하느님께서 오셔서 적대적(敵對的)인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이사 13-27). 그러나 하느님은 이스라엘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분의 자신의 백성이 저지른 사치와 불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갚음을 하실 것이다(이사 2,6-4,1). 이민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하느님의 오심은 두려울 것이다(아모 5,16-20; 6장 전체).
그러나 심판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전멸시키거나 끝없이 고통을 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화와 구원이다. 마지막에는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두고 기뻐하실 것이다.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여 레위 후순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그 한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다”(말라 3,2-4). 여기서 나중에 그리스도교가 종말을 상상하는데(연옥불, 지옥불)에 큰 영향을 미친 불의 표상을 만나게 된다(그외에도 불의 표상이 발견되는 성서구절: 이사 1,25; 48,10; 에제 22,17-22). 주목해야 할 점은 첫째로, 불은 분명히 표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또 이와 함께 “빨래터의 잿물”이라는 다른 표상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불이라는 표상은 정화하고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지니고 있다. 심판은 고통스럽지만, 고통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목표로 한다.
대예언자 시대에는 하느님의 심판(야훼의 날)이 역사 안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하느님의 심판은 역사적인 파국, 정치적, 군사적 패배, 혼란, 약탈, 비인간적 지배체제 그리고 유배를 통해서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시금 역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이런 사건들을 시험과 정화의 기회로 삼으신다. 묵시문학에서는 야훼의 날이 “마지막 날”로 변화된다: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역사는 종결될 것이다.
묵시문학적 심판의 기대를 배경으로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선포된다. 마테오와 루가는 세례자 요한을 가까온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참회설교자로 묘사한다(마태 3,10.12 병행구절). 예수의 선포에서도 불과 어둠, 이빨을 갈면서 울부짖는다는 표상으로 표현된 위협의 말씀(예를 들어서 마태 7,19; 22,13; 24,51; 25,41)이 어떤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위협외에 다른 주제가 회개를 하도록 돕는다: 안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밖에 머물러 잔치를 놓치지 말라는 촉구(마태 25,1-13; 루가 14,16-24),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자신을 아버지와 비슷하게 느끼게 하는 숭고한 삶에로의 초대(마태 5,45.48) 등이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의 설교가 위협적이라기 보다는 초대하는 형태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초대는 결단의 상황을 초래한다. 오지 않는 사람, 즉 새로운 삶, 하느님과의 친교, 예수가 선포한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국 바깥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므로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와 함께 심판도 가까이 온다. 예수의 모든 심판의 말씀은 결단의 상황을 인식하도록 깨우고 경고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심판이 가까웠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해방의 효과를 낸다. 즉 이런 앎은 세상의 권력자들에 대해서 내적인 자유를 부여하며(마태 10,28), 아울러 인간들 사이의 모든 판단을 상대화하고 금지하기까지 한다(마태 7,1).
신약성서에 나타난 심판의 신학이 지니는 특색은 도래할 심판관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 10,42에 따르면 사도들의 설교가 바로 이 점을 정점(頂點)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분부하시어,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사실을 백성엑 선포하고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종말에 관한 모든 진술이 그러하듯이 여기에서도 미래에 대해서 단지 어떤 정보, 이를테면 종말의 드라마에서 역할 분담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역사의 “방향”, 이 역사 안에서 취해야 할 결정적인 태도에 대한 기준, 희망의 전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하시리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세상의 역사는 종국에는 예수의 뜻대로 결정될 것이다. 그가 알려주고 실천한 세상, 그가 이해하고 설명한 하느님의 나라에 장래성(將來性)이 있을 것이다.
(2) 예수의 말씀과 실천은 심판의 결정적인 기준이다. 즉 어떤 태도가 윤리적으로 성공적인 삶이냐 혹은 실패한 삶이냐를 판가름하는데에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그를 받아들이느냐 혹은 그를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를 수용하고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참조: 마태 7,21-23). 이런 점은 마태 25,31-46의 최후심판에 대한 말씀에서 명백하게 표현된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심판을 하신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께서 배울 수 있었던 바로 그 태도, 즉 궁핍한 이들을 돌보는 태도이다.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이런 이들을 돕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잘못으로 판명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 말씀은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도 시중들지 않았다는 것입니까?”하고 놀라서 묻는 사람들에게 대한 답변으로서, 심판에서 결정적인 것은 실천이고 그래서 이웃의 어려움에 대한 관심이 종교적 동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밝혀준다.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심판관을 생각했느냐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느냐는 점이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관이라는 것은 종말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처신 전체를 희망적인 전망 안에 자리하도록 한다. 심판관은 사도행전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밝히듯이 “두루 다시시며 선한 일을 하시고 악마에 짓눌린 모든 사람들을 고쳐 주신”(사도 10,38) 바로 그분이고, 요한복음이 선포한 바대로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 12,47) 오신 분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날의 심판자라고 말할 때 그분이 다른 분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즉 예전에는 구세주이며 구원자였지만 종말에는 오직 복수를 하는 분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진술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앙체험의 역사에서(그리고 이 역사를 돕는 하느님의 충실함에 대한 신앙에서) 형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일어날 것이냐에 대한 예상은 항상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미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종말론에 관련해서 말한다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심판을 기점으로 예수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기준으로 다가올 심판을 해석해야 한다. 즉 종말의 심판은 심판자에 의해서 특징지워질 것인데, 그 심판자는 우리가 모든 사람의 구원과 행복을 원하시는 구세주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후대의 신자들과는 달리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려움이 아닌 희망 속에서 기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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