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겨자씨’ 와 같은 시작
교회의 원천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나자렛 예수다. 그는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던 팔레스티나의 갈릴레아 북부 출신 유대인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BC37-AD14)시대에 탄생하였고(루가2,1) 티베리우스(Tiberius AD14-37)시대에 활약했다(BC6,7-AD30). ‘목수의 아들’로 ‘비천한 여종’으로 자처한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지체 낮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당시 갈릴레아의 4분수령은 헤로데(Herodes Antipas BC4-AD39; 루가 3,1)였고 유대지방의 로마 판무관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 AD26-36)치하에서 죽었다(마르15,1참조).
AD30년을 전후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1,15)고 외치며 공적활동을 전개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언행과 현존으로 이를 구현했다. 그는 모세보다 더한 전권을 가진 자로 행세하며 죄인을 용서하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표징을 들어 내 보이기도 하였다.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를 촉구했으나 자신이 엄격한 고행을 하지 않고 민중의 삶에 뛰어들어 먹고 마시며 잔치에도 초대받아 참석함으로써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축제를 즐겼다(루가7,4참조). 그가 촉구했던 회개는 비탄에서 기쁨으로, 하느님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희망에로의 회개였다. 그가 선포한 ‘주님의 은총의 해’란 묶인 사람들을 해방하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구원이 실현되는 계기였다. 이것을 자신의 존재와 언행으로 구현했다(루가 4,18참조).
머리 누일 곳조차 없는 가난한 유랑생활이었지만 열두 명의 제자들 외에도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요 의인으로 자처하여 죄인들을 처벌하고 의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가난하고 버림받고 율법을 모르거나 이행하지 않는 변두리 인생들, 창녀나 간음한 부도덕한 무리, 점령자들에 협력한 세리나 이교도들과 교제하여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11,19)로 비난받기도 한 민중의 친구로 행세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날의 정의는 율법이 아니라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는 ‘은총의 정의’였다. 정의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라면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관계의 구조개혁이었다. 이것이 곧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었다.
진정한 자유인 예수는 그 때문에 율법과 도덕, 사회질서의 수호자들인 기득권자들로부터 비난과 배척을 당하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었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는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독성죄인으로, 점령 세력으로부터는 사회질서 교란자로 낙인 찍혀 보시오 빌라도(AD26-36)재임시 기원30년경 국사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처지의 극에 달한 고통 중에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매달려 굵고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마르15,34참조) 실망한 제자들은 낙향하여 일거리를 찾고 있었고 기득권자들은 두발 뻗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이 있었고 불신과 의심 그리고 비웃음마저 있었지만(마르16,14; 마태28,17; 루가24,11 등) 마침내 성령의 도움으로 부활을 믿고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재음미하게 되었으며 그분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이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대중집회에서 설교했을 때(성령강림) 그들은 놀라운 성령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