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관의 여러 모델-제도로서의 교회(Church as Institution)

4. 교회관의 여러 모델

1. 제도로서의 교회(Church as Institution)

콘스탄티노 대제가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AD 313) 데오도시오 황제가 국교로 삼음으로써(395)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교회는 소집단에서 탈피하여 대규모의 종교 집단화하여 제국종교로 변모하게 되었다. 교회는 정치, 지리적으로 로마제국의 영토와 일치하게 되고 제국의 정치 조직적인 분활과 구조를 이어받았다(Societas Christiana, Christendom). 교황은 황제의 서열에 이르게 되고, 주교들도 국가 공무직의 높은 서열에 끼어 특전을 누리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 궁정의 화려한 문장, 복장, 의례 등을 흡수하였다. 5, 6세기에 이르러 서로마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세속 정치적인 일들까지 로마주교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절대권력을 갖게 되었다. 13C 인노첸트 13세부터 교황이 왕권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예)Gregorius VII, 1073-1086
“로마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설립되었다. 로마 주교만이 올바로 보편적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그 홀로 새로운 법령을 반포하고 회중을 모으며 주교회의의 요청 없이도 주교들을 파면할 권리가 있다. 어느 주교회의도 그의 의향 없이 교회를 대변한다고 지칭할 수 없다….그의 요청은 불가침이며 그를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로마 교회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성서가 증언하듯 영원히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합치되지 않는 자는 아무도 가톨릭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초세기 신학은 형이상학적(신플라톤주의) 신학으로 하나의 철학 체계를 수용한 신학이다. 이 철학적 신 혹은 최고유의 자리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이 형이상학적 신학은 중세사회를 봉건사회로 정착시키는데 그 이념으로 크게 이바지했다. 철저한 신분사회, 군주제도, 권위주의적 사고 등은 형이상학적 신학을 그 근본 이념으로 하여 정당화되었다. 권위와 순종은 수직적 관계가 시작하는 유일한 원리였으며 중세 봉건사회의 골격을 이루는 원리였다. 모든 것은 최고유인 절대자를 정점으로 인식되고 질서 지어졌다(피라미드).
교회 자신과 그 구조에 관한 교회의 신학적 사유의 역사는 짧다. 수백년(1500) 동안 사람들은 별다른 이의 없이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따랐다. 그러나 문예부흥(人本主義)과 더불어 16C의 종교개혁이래 18C 말까지 계몽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비판적 이성을 바탕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권위와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도록 한다(주관과 객관의 분리). 전통적으로 신성시되어 온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토론을 견디어 내는 것이 타당한 것이 되었다. 이에 교회 자체가 사유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교회의 개혁가들은 제도교회는 참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신도들의 모임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은 반종교개혁적 자세를 갖고 교황직과 교황제도 그리고 성직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교회를 옹호하였다. 예수회 회원이며 신학자요 추기경이었던 벨라르미노(R. Bellarminus, 1542-1621)는 제도주의적 교회관 정립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그의 교회관은 금세기 중엽까지 전통신학의 교회론에서 필수적인 교과서가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사를 받으며, 정당한 목자들 특히 교황의 지도 하에 모인 사람들의 단체”이고, “로마 백성이나 프랑스 왕국이나 베니스 공화국처럼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이는 제국적 제도인 당국자들의 권리와 권한 개념이 교회의 본질로 정의되고 있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이후 이런 개념들이 법제화되어 교회의 모든 권한은 교황에, 교구는 주교에, 본당은 본당신부에게 집중된다. 제도주의적 교회관은 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교황이 무류권을 가진 교회는 완전한 사회(Societas perpecta) 로서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완전한 사회의 모형으로서 다른 사회와 구분되고 자체로 완전하여 모든 인간사회 위에 군림한다. 이는 교회의 반세계적 자세로서 현대주의를 배격하였다(비오 9세, 1792-1878, Syllabus로 단죄). 교회의 시대에 대한 몰이해는 시대의 선구자들을 종교개혁으로 잃고(16C), 갈리깔리즘에 대항하는 헛수고로 지배층을 잃었으며(17C), 사고력의 빈곤으로 위대한 사상가를 잃었고(18C), 교육의 후진성으로 과학자와 기술자를 잃었으며(19C), 노동헌장(Rerum Novarum)이 자본론 보다 반세기나 뒤짐으로써 노동자와 대중을 잃었다(20C).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가 선포한 것은 하느님 나라였는데 막상 온 것은 교회뿐이었다고 비꼬고, 개신교는 앞선 성서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더 성서적이라고 외쳤고, 가톨릭 내부에도 신신학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제도주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줄곧 영향을 미쳐 왔다.
이러한 제도주의적인 교회관에서는 교회의 권한과 기능이 일반적으로 교도, 성화, 통치라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교도직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성화직에 있어서도 은총을 나누어주는 자와 받는 자, 통치직에 있어서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로 구분된다. 신자는 신앙을 고백해야 하고, 성사생활을 해야 하며, 목자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야 한다. 신자 자격도 법으로 엄격히 규정되며 타종교인, 이단자 및 배교자, 예비자와 파문된 자는 배제된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는 구원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거부하기에 선교 노력을 강조한다. 선교는 교회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서 가능한 것이기에 선교의 성공 도도 숫자의 많고 적음에 달렸으며 주일미사 참석 수와 성사자수에 따라 측정된다. 이 제도주의적 교회관은 일반적으로 성직주의(clericalism), 법률주의(juridicism), 그리고 개선주의(triumphalism) 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하위의 사람으로 수동적인 역할만 하는 피리밋형의 체제를 구축한다. 또한 통치권뿐만 아니라 교도권과 성화권까지 법률화하여 영적 직무들도 교회법 규정에 순응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것이 된다. 개선주의는 사탄과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군대에 비유대고 신앙을 위해 고통과 죽음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신앙을 위해 투쟁할 수 있어야 하며(순교, 십자군), 공격과 방어라는 개념으로 교회는 세상과 맞서야 한다.
교회가 제도 없이는 자신의 정체를 보존하고 사명을 수행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교회는 실재로 초세기부터 제도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제도주의는 제도자체를 절대시하거나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말한다. 종교개혁이래 제도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실재로 모두가 다 적용된 것은 아니다. 제도적 개념은 ‘은총의 공동체’ 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보다 영신적이고 유기적인 관념들과 배합되었다. 교회의 현대적인 생활과 사회로부터의 격리는 결국 요한 23세로 하여금 교회와 인간사회와 문화와의 새로운 관계정립(aggiornamento)을 위해 공의회를 소집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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