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미래전망

3. 2. 교회의 미래전망
교회의 미래에 대한 시도는 불가피하게 어두움과 불확식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많은 것들이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바람직한 해결책을 구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예측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때늦지 않게 분석과 예상을, 또 전망을 미리미리 해야 한다. 그저 종래에 해오던 것이나 답습하면서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만은 없다.
오늘날 교회상황은 하나의 과도기, 즉 ‘동질적인 그리스도교 사회’→‘뚜렷이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교회’로 넘어가는 이런 과도기적인 상황이다. 서구사회에서는 태어나면서 그리스도교의 동질성에 속하게 된다. 천년을 관리해온 이 서방세계의 획일적인 그리스도교성은 이제, 과연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만이었던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의 효과만은 아니었다는게 신학적인 반성이다. 지난날 서구 교회가 가졌던 이 동질적인 그리스도교성은 사실은 세속적인 성격의 문화와 사회가 가지고 있던 동질성의 이면이었다. 사실 우리 가톨릭 교회 내에 자리잡고 있는 기본방향은 지금까지 계승되어 온 전통에 대한 옹호였지,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동질적인 사회의 이러한 잔존 요소들, 그리스도교적인 잔존 요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수한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정말 전교지역처럼 비그리스도교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을 얻으려는 공세적인 태도과 되어야지 옛날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요소들을 계속 고수하려는 이러한 태도, 이것은 이미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또한 오늘날 교회는 비동시대적인 사람들이 교회 안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19세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하면, 21세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동시에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다. 구식과 신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극단적인 상호배척을 분열만 조장한다. 모든 집단은 원칙적으로 저마다의 생존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실질적인 일치를 지향하는 타협이 불가피하다. 교회내의 다원주의, 또 집단적인 대립과 집단적이 이기주의, 본당주의. 이런 것도 고찰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동지보다도 적을 더욱 관대하게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한다. 내 탓이요라고 고백한다. 이 죄인의 근거는 아집과 독단, 자만, 이기주의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고백해야 함과 동시에 실제로 많은 경우에 이 고백을 우리와 견해와 다른 저쪽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사실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아직도 우리 교회의 직무 담당자들 역시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편에 드는 것에 젖어 있다.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어른들은 탄식한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고 있다면서.. 예를 들면 혼인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인생경험을 쌓은 사람들을 사제로 서품할 수 있다는 주장.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제로 서품할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라너는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이혼한 재혼자들에 대해서 성사를 허용해야 한다. 라너는 원칙적으로 긍정한다. 근데 이런식으로 우리나라에서 누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또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양자택일이라는 흑백논리에 젖어 있다. 내편 아니면 네편, 의리 이런것들. 교회편 아니면 반대편. 사실은 객관적인 교의말고 내놓는 의견들은 충분한 신학적인 반성이 없이 나온 것들로 그야말로 잠정적이고 유동적인 것들이다. 그야말로 의견이다. 객관적인 교의가 아니다. 이런 잠정적인 것들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더 나아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신앙 안에서 유일한 존재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문화적, 사회적인 요소가 더 이상 교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신앙이라는 뿌리, 여기에서만 교회가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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