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미래전망- 친교

3. 2. 1. 친교
미래의 교회는 이 친교의 의미를 정말로 실재화하여야 한다. 친교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인간 상호간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공의회는 교회를 일치의 성사로 표현한다(LG 1). 교회 내에는 아직도 불일치와 분열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 또 집단 이기주의와 적대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말로만 교회는 친교라고 떠들어 왔는가를 반증하고 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불일치와 분열이 있다. 신학교 내에서, 수도원 공동체 내에서, 본당 공동체 내에서, 신심 단체 내에서, 성가대에서,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대화는 친교의 실질적인 조건이다. 명령과 지시만으로는 안된다. 맹목적인 순종의 요구도 이제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교회 구조의 대화, 수직선 상의 대화가 필연적이다. 교황청과 교구, 주교와 사제, 장상과 수도자 사이에. 하지만 아직도 요원한 것이 사실이다. 수평선 상이 대화도 필연적이다. 교구와 교구, 본당과 본당, 수도회 간에,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간에. 하지만 대화가 요원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사제총회에서 주교와 사제들이 과연 대화할 수 있는가? 또 신부들은 주교와 대화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면서 신부들은 평신도와 대화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본당에서 평신도 협의회를 할 때 신자가 얘기를 하면 쓸데없는 얘기라고 눌러 버린다.
또 한국교회의 교구와 교구간의 장벽이 때로는 개신교 교파 간의 장벽보다 더 높다는 것도 우리는 얼마나 체험하는가? 큰 교구와 작은 교구 사이에 인적, 경제적 교류가 얼마나 있는가? 서울 교구 한 개 본당의 예산이 안동교구나 춘천교구와 같은 조그만 교구 예산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 교구의 경계선이나 본당의 구역선이 편의상 생긴 실정법의 산물이지, 신학적으로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교구, 본당을 너무 절대시한다. 교구나 본당은 주교나 신부의 봉건적 영토가 아니다. 또 신부들 상호간에, 수도자들 상호간에 영적이고 인격적인 대화가 얼마나 이루어지는가? 속으로는 많이 곪아있고 여러 가지 적대감정이 남아있는데. 다원성은 오늘날 충분한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치를 해야 한다. 즉 친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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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미래전망- 친교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 2. 1. 친교
    미래의 교회는 이 친교의 의미를 정말로 실재화하여야 한다. 친교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인간 상호간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공의회는 교회를 일치의 성사로 표현한다(LG 1). 교회 내에는 아직도 불일치와 분열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 또 집단 이기주의와 적대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말로만 교회는 친교라고 떠들어 왔는가를 반증하고 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불일치와 분열이 있다. 신학교 내에서, 수도원 공동체 내에서, 본당 공동체 내에서, 신심 단체 내에서, 성가대에서,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대화는 친교의 실질적인 조건이다. 명령과 지시만으로는 안된다. 맹목적인 순종의 요구도 이제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교회 구조의 대화, 수직선 상의 대화가 필연적이다. 교황청과 교구, 주교와 사제, 장상과 수도자 사이에. 하지만 아직도 요원한 것이 사실이다. 수평선 상이 대화도 필연적이다. 교구와 교구, 본당과 본당, 수도회 간에,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간에. 하지만 대화가 요원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사제총회에서 주교와 사제들이 과연 대화할 수 있는가? 또 신부들은 주교와 대화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면서 신부들은 평신도와 대화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본당에서 평신도 협의회를 할 때 신자가 얘기를 하면 쓸데없는 얘기라고 눌러 버린다.
    또 한국교회의 교구와 교구간의 장벽이 때로는 개신교 교파 간의 장벽보다 더 높다는 것도 우리는 얼마나 체험하는가? 큰 교구와 작은 교구 사이에 인적, 경제적 교류가 얼마나 있는가? 서울 교구 한 개 본당의 예산이 안동교구나 춘천교구와 같은 조그만 교구 예산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 교구의 경계선이나 본당의 구역선이 편의상 생긴 실정법의 산물이지, 신학적으로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교구, 본당을 너무 절대시한다. 교구나 본당은 주교나 신부의 봉건적 영토가 아니다. 또 신부들 상호간에, 수도자들 상호간에 영적이고 인격적인 대화가 얼마나 이루어지는가? 속으로는 많이 곪아있고 여러 가지 적대감정이 남아있는데. 다원성은 오늘날 충분한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치를 해야 한다. 즉 친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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