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Filioque 논쟁
847년 Konstantinopel의 총대주교로 이냐시오가 임명되었다. 85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황제 미카엘 3세(842-867)는 총대주교 이냐시오를 사임시키고 평신도였던 Konstantinopel의 철학교수 포시우스(810-895)를 총대주교로 발탁. 일주일만에 사제, 주교로 서품, 총대주교좌에 착좌(860). 863년 교황 니콜라이 1세(858-867)는 포시우스의 선출을 위법으로 규정하고 이냐시우스의 복직을 요구하였다. Konstantinopel에서는 교황이 동방교회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비난.
이때 Filioque 문제로 양교회가 다시 대립. 문제는 불가리아에서 터졌다. 원래 불가리아는 동방교회에서 복음화시킨 나라로 불가리아왕 보리스 1세(852-889)는 동방교회에 주교파견을 요청하였으나 포시우스는 선교사들만 파견. 이에 보리스 1세는 로마교황에게 요청, 교황 니콜라이 1세는 두명의 주교를 파견. 불가리아에 파견된 서방교회 성직자들은 Nicaea-Konstantinopel 신경, ‘성령은 성부로부터 좇아나시고’라는 성령의 유출에 대한 고백 부분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좇아나시오’라고 ‘성자에게서(Filioque)’를 삽입하여 사용하였다. 6C말에 서방교회에서 ‘Filioque’가 삽입되어 사용하다가(세례, 기타 전례에서) 9C부터는 미사에서 사용되던 이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두고, 원래의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사용하던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의 2중유출이라고 보아 서방교회를 비난. 교황 레오 3세(795-816)는 ‘성령의 2중유출’을 교리로 인정.
867년 포시우스는 이 ‘Filioque’를 이단교리로 배척, Konstantinopel에서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교황 니콜라이 1세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이 분열의 위기에서 황실에 혁명이 일어나 황제 미카엘 3세가 암살 당하고 바실리우스 1세(867-886)가 황제로 즉위, 포시우스를 사임시키고 이냐시우스를 총대주교에 복직시켰다. 교황청은 다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관계를 개선하였으나 포시우스 지지 세력의 강한 저항을 받았다. 이냐시우스 사후(877) 교황 요한 8세(872-882)는 로마의 수위권을 보장받기 위해 포시우스를 합법적 총대주교로 승인하지만 이 Filioque 논쟁으로 양교회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그 배후에는 결국 수위권에 대한 논쟁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