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열-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동방 교회)(분열의 경과 및 결과)

 

1.2. 분열의 경과 및 결과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동서방 교회 분열의 결정적 단서는 남부 이태리였다. 이 지역은 동로마제국 황제 관할권이었고 총독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11C에 북구에 있던 노르만디족이 남부 이태리를 점령하자 교황 레오 9세(1048-1054)는 노르만디족을 축출하고자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와 군사동맹을 계획. 이렇게 되면 로마 교황의 입지가 한층 강화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로마 교황의 재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Michael Kerullarios(1043-1058)는 교황이 자신의 재치권에 간섭할 것을 두려워하여 서방교회를 먼저 비판하고 나섰다. 우선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서방교회 소속 수도원을 폐쇄한다. 그리고 주요한 비판의 골자는 Filioque를 삽입한 것, 미사때 누룩 없는 빵의 사용, 사제 독신제, 그밖에 서방교회의 여러 관습들을 비판하고 단죄하였다.


로마 교황 레오 9세는 한편으로 동맹협상을 추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공격을 물리치고자 Humbert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였다. 이 담판이 양교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사절단은 처음부터 자신을 갖고 고자세로 황제와 맞섰다. 사절단은 로마교황의 수위권과 서방교회의 관습을 유일한 교회전통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 황제는 중재에 나서서 총대주교에게 사절단을 만날 것을 권유했으나 총대주교는 이를 거부. 이에 Humbert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파문(1054.7.16). 이에 총대주교는 Humbert 추기경과 사절단을 파문. 결정적으로 양교회가 분리. 결정적 분열의 원인은 교리상의 차이가 아니라 수위권에 대한 입장 차이, 인간적 감정이 격한 결과였다.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에는 다음의 4가지가 문제.


① 우선 사절단 및 로마교회의 동방교회에 대한 불이해. 로마는 다른 서방지역 교회처럼 동방교회를 로마교회에 종속적으로 생각.


② 과연 교황 레오 9세로부터 Humbert 추기경에게 파문의 권한이 위임되었는지도 문제.


③ 파문당시에 로마교황은 공석이었다. 교황 레오 9세는 파문전인 1054.4.19일 사망. 후임 빅토리오 2세는 1055.4.13일 선출.


④ 총대주교 Kerullarios는 교황이나 서방교회를 파문한 것이 아니라 Humbert 추기경과 사절단을 파문한 것.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오해와 감정적 대립으로 빚어진 이 결렬은 이후로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상호 파문은 잘못된 것으로 양교회 모두 인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양교회가 대화를 모색.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방문한 자리에서 로마 가톨릭-정교회 합동위원회 결성. 지속적 대화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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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열-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동방 교회)(분열의 경과 및 결과)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2. 분열의 경과 및 결과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동서방 교회 분열의 결정적 단서는 남부 이태리였다. 이 지역은 동로마제국 황제 관할권이었고 총독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11C에 북구에 있던 노르만디족이 남부 이태리를 점령하자 교황 레오 9세(1048-1054)는 노르만디족을 축출하고자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와 군사동맹을 계획. 이렇게 되면 로마 교황의 입지가 한층 강화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로마 교황의 재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Michael Kerullarios(1043-1058)는 교황이 자신의 재치권에 간섭할 것을 두려워하여 서방교회를 먼저 비판하고 나섰다. 우선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서방교회 소속 수도원을 폐쇄한다. 그리고 주요한 비판의 골자는 Filioque를 삽입한 것, 미사때 누룩 없는 빵의 사용, 사제 독신제, 그밖에 서방교회의 여러 관습들을 비판하고 단죄하였다.

    로마 교황 레오 9세는 한편으로 동맹협상을 추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공격을 물리치고자 Humbert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였다. 이 담판이 양교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사절단은 처음부터 자신을 갖고 고자세로 황제와 맞섰다. 사절단은 로마교황의 수위권과 서방교회의 관습을 유일한 교회전통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 황제는 중재에 나서서 총대주교에게 사절단을 만날 것을 권유했으나 총대주교는 이를 거부. 이에 Humbert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파문(1054.7.16). 이에 총대주교는 Humbert 추기경과 사절단을 파문. 결정적으로 양교회가 분리. 결정적 분열의 원인은 교리상의 차이가 아니라 수위권에 대한 입장 차이, 인간적 감정이 격한 결과였다.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에는 다음의 4가지가 문제.

    ① 우선 사절단 및 로마교회의 동방교회에 대한 불이해. 로마는 다른 서방지역 교회처럼 동방교회를 로마교회에 종속적으로 생각.

    ② 과연 교황 레오 9세로부터 Humbert 추기경에게 파문의 권한이 위임되었는지도 문제.

    ③ 파문당시에 로마교황은 공석이었다. 교황 레오 9세는 파문전인 1054.4.19일 사망. 후임 빅토리오 2세는 1055.4.13일 선출.

    ④ 총대주교 Kerullarios는 교황이나 서방교회를 파문한 것이 아니라 Humbert 추기경과 사절단을 파문한 것.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오해와 감정적 대립으로 빚어진 이 결렬은 이후로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상호 파문은 잘못된 것으로 양교회 모두 인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양교회가 대화를 모색.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방문한 자리에서 로마 가톨릭-정교회 합동위원회 결성. 지속적 대화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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