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교회 교도직에 관해서



7. 교회 교도직에 관해서


   가톨릭의 이해에 의하면 왜 교회안에 권위적인 교도직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이것이 특정한 전제하에서는 개개인의 가톨릭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궁극적으로 구속력을 가진 권위를 가지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도직의 절대적 권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공적인 대표자들은 스스로 하느님과 그 계시와 은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그리스도교는 믿는다.  즉, 한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약에서 유래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 구원의 역사에서의 근원적인 전기라고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 교도직을 위해 정말로 그리스도론적 근거를 인식하고 표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근거는 궁극적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자신이 구원사의 절대적이고 취소할 수 없으며 동시에 무엇에 의해서도 타파될 수 없는 정점이라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아직 열려 있던 하느님과 피조물의 자유와의 대화, 열려있는 사건적 역사가 궁극적인 정점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류 전체의 자유는 이 진리를 정말로 받아들이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궁극적이고 승리에 빛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항상 현존하시고 역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모습을 취한 존재인 것이다.  다시말해 교회는 진리안에 머문다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리 이해 사이에서 신학적으로 논쟁이 되는 문제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승리에 찬 진리를 나누어 주시는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계시느냐라는 문제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상황인 종말론적 상황에서 가톨릭의 교회 이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교회가 그 교도권에서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궁극적인 요구를 가지고 인간을 교도할 때 하느님의 은총과 힘은 이 교도권이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지, 교도권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교도권은 전 교회를 구속하고, 전 교회에 공적으로 인식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교회의 유일한 신앙 이해를 개개인의 신앙의 양심에 권위적으로 중개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교회의 교도직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가톨릭의 교도직과 다른점은 다만 교회의 교도직의 표명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 뿐이다. 


   원래 교회의 교의는 결코 개개의 진술들만을 떼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계시된 진리들의 전체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자신을 맡김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항상 진리인 하나의 전체를 지향하고 있고, 그러므로 또한 항상 개개의 것을 신앙의 전체적 행위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의 신앙 이해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외적인 형식상의 교도권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믿고 있는 것, 그리고 믿어 온 것으로서 교회안에서, 즉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주어져 있는 것의 내적 현실에서도 그런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신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서구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분열하고 있지만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에서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교의학적인 가르침에 관해서는 서로 일치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교의에 의해서 가톨릭 이외의 그리스도인들이 원칙적으로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교의를 구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교황의 수위권이나 교도권, 마리아의 무염시태 혹은 몽소승천 등의 교의가 그것이란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은 인정해야 한다.  즉, 그것은 이러한 교의가 종교개혁 전에는 가톨릭 교회안에서 명확성과 구속성을 가지지 않은 체 이어져왔던 것이였지만, 신학적 반성을 통해 여기에 새로운 교의가 부과된 것일 뿐이란 사실이다. 


   우선 교황의 교도권에 대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종교개혁이전의 신앙 이해에 따라서 교회에 주어져 있는 권위가 이제는 교황자신에 주어지는 것이냐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거기서 전제되는 것은 교황이 항상 교회의 머리로서 행위하고, 전체 주교단이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단 여기서도 전제가 되는 것은 공의회에서 전체 주교단 또는 소위 개별적 인물인 교황을 항상


구체적인 교회의 구체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나 지성이나 신학적 교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이 종말론적 진리의 현실속에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안에서 수위권, 교도권을 한 사람의 인물이 대표해야 한다고는 아직 긍정적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구체적인 교회 전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에 관해서 소위 새롭게 제정되었다고 말하는 교의들에 관해서도 그것들은 역시 그리스도교의 신앙 이해의 전체속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영원한 로고스의 육화라고 일컫는 것을 정말로 믿고, 그것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일부로 볼 때에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다만 혈육의 관계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 의미에서 어머니이고, 세상의 구원을 신앙을 가지고 받아들인 분으로서 역시 구원과 구원의 결실과 구원의 수용이 실현된 가장 높고 가장 근본적인 경우이다.  이것은 15세기 동안을 통해서 본래 동방교회에서나 서방교회에서나 모두 완전히 자명한 것으로 보아 왔다.  물론 거기서는 아직 이것에 대한 명확한 반성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여기서 소위 “무염시태”나 “몽소승천”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신앙의 본래 본질에 원칙적으로 모순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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