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의 교의 신학적 고찰-종말론적 차원


3. 종말론적 차원


독신에 있어 종말론적 논거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그리고 여기서’(hic et nunc) 체험하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신비는 가장 내적이고 깊은 미래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요한 18, 30) 이미 이 세상에 있으나 신비롭게 감추어져 현존하여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교황 바오로 6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김남수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6, 39항.
 완전한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이 하늘 나라의 씨앗이며 시작인 교회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자라고 있으며 온갖 노력을 기울여 하늘 나라의 완성을 동경하고 갈망하고 있다.. 사제 독신 생활 회칙, 33항.
 그러나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사로잡히고 너무나 자주 육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므로(1요한 2, 16) 하늘 나라를 위한 완전한 정결은 참으로 고귀한 천상 선물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와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이며(1고린 7, 29-31), 후일에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 가운데서 빛날 하늘 나라의 최상 보화를 하늘 나라의 완성을 앞서서 확인해 주는 천상 보화의 독특한 상징이라 하겠다.. 사제 독신 생활 회칙, 34항.
 이처럼 이미 현존하는, 다가올 세상을 미리 사는 축성되고 봉헌된 독신 생활은 종말론적 희망의 표지가 되며, 모든 사람이 성령에 의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성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살게 될 미래의 실재를 보여주는 예언자적 표지가 된다.. 세계 주교대의원회의, 사제 양성 : 독신 생활의 양성 지침, 정승현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11항.


하느님의 백성은 나그네같이 인류 역사를 통해서 천상 본향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결한 독신은 영원 속에서의 우리의 마지막 목적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최종 실재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친교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곳, 사랑이 지배하게 되는 곳에서 하느님께로 들어올려지게 되리라는 믿음이다. 믿음과 사랑의 ‘새 생활’을 위하여 은총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결코 현세 생활이나 인간적인 것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종교적인 의미야말로 온 삶을 채우고 결정하는 단 한가지 것임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정결은 은총의 표명이 된다. 독신자는 그의 삶으로 그의 형제 자매들에게, 하느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전한 실현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늘 나라를 소리쳐 선포하는 것이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독신자는 이를 이미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J. 리딕, 앞의책, p. 96.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되었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실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넘어 부활하셨음을 믿고, 부활한 예수가 들어간 그 세계에 언젠가 함께 할 것을 희망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믿음과 희망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부터 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부활한 그리스도가 들어간 그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이들이 우상으로 받드는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즉 재산, 명예, 쾌락, 가족과 결혼까지도 모두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난과 순명과 더불어 독신은 “장가들지도 않고 시집가지도 않는”(마르 12, 25; 루가 20, 35)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 나라를 미리 사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 독신의 종말론적인 의미와 차원이 있다.

이 글은 카테고리: theology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