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그리스도론적 선언

(1) 베드로의 대답
이에 대해서는 이미 본 바와 같이 공관복음 저자들이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다. 마르코 8,29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루가 9,20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가장 오래된 형식은 마르코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스승을 그리스도라고 지칭할 때 무얼 의미하고자 했는가? 결과적으로 이런 고백에서 “예수님 당신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하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폭풍우를 잠재운 권한을 가지신 분, 그래서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그러한 분,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대답하면서 이러한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을 그리스도라는 개념안에 포함시켜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했던 현세적인 메시아와 혹은 예수의 공생활과 연관지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서 가지고 있던 의미보다 더 광범위하게 예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신비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인간의 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막연하게 메시아에 대해서 혹은 예수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의견들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당시의 메시아즘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똑같은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과 접촉함으로써 갖게 되는 권능과 초월성을 포함하여 사용한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이미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그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신앙의 신비가 내포될 수 있는데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적인 표현이나 형식이 부족할 수 있는 것이다. 루가는 마르코가 얘기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단순한 이야기에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하느님’을 첨부하고 있다. 즉 인간적인 형식을 더 보완하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마태오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그리스도”라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르코안에 내려오는 전승들 또 다른 전승들, 신앙이 고백하는 또다른 전승들을 이용하면서 신앙고백 형식을 마태오는 제시한다. 여기에서 예수는 마태 16,17 “그대는 복됩니다. 시몬 바르요나, 당신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당신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얘기한다. 베드로가 고백한 것을 예수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그 전에 나오는 11,27 “아버지가 아니면 누구도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베드로가 실제로 이러한 대답을 했는가? 복음의 뒷부분에 예수가 체포된 후 대사제에게서 질문을 받는다. 마태 26,6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시오”. 과연 정말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가 라고 묻는 것이다. 예수가 당신이 가르친 행동의 양식으로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고발되었고 재판을 받는 것이다. 반대자들이 그분의 행적, 가르침을 보고 정말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더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은 일반 사람들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이전에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어느 기회에 베드로가 사도단의 이름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러한 표현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을 어렵다. 그러나 여러 기적, 권능등을 통해서 메시아의 특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신적 초월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적 부자관계에 관한 것을 이미 제자들은 깨닫고 있었다. 바로 abba의 개념이다.
예수가 하느님께 서슴없이 아빠라 불렀다. 따라서 제자들은 깜짝 놀란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인간적 기원을 초월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라는 말이지만 일반인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혈육을 나눈 아버지를 뜻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아버지라고 하면 자기가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이 말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부자관계를 맺지만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로서의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가 아버지라고 했을 때에 이것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유일무이한 부자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강 그러할 것이다 라고 막연하게 이해하면서 사용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론을 한다는 특성은 제자들이 아빠라는 그러한 예수님으로부터 사용된 말을 듣고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여러가지 가르침들, 사건들,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에 대해서 신앙은 비록 그것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보다 완전히 이해하고자하는 노력, 보다 충만한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 안에서, 그러나 영원히 완전하게 그 신비를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신앙, 인간의 마음을 이끌어주는 분은 하느님이다. 따라서 인간지성을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분도 하느님이다. 어찌보면 예수님이 복음에서 당신 자신을 어떤 언어로, 어떤 형식안에 스스로 정의하기를 피하셨다는 것은 바로 그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당신의 정체성 자체가 인간적 표현 안에 완전하게 내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에 대한 이해,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면서 부족하나마 표현하여야하고 더 발전시켜 점점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2) 유일하고 결정적인 신앙고백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것은 어쩌면 유일하게, 결정적인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지금가지 본 것과 같이 불완전한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확실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고백은 복음에서 스승의 말없는 동의를 나타내고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과 아들이 계시하려고 원한 사람들에게만 가르쳐 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백이 비록 부적당하지만 어떤 진리를 부분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앙의 역동성, 이는 교회가 먼저 있고 신앙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앙이 있은 다음에 그것을 체계화한 것이 교회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앙의 역동성은 항상 형식을 초월한다. 그러나 신앙의 확인들 그 자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신앙의 표현이 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해 나가는데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계속 발전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마찬가지다. 사실 지금은 예수가 부활하기 이전이다. 부활한 다음에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활의 빛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그 고백도 결정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사도단의 이름으로 신앙고백이 주어졌다. 신앙고백의 일치성을 나타낸다. 당시에도 일치되지 않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의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초석, 교회의 첫 그룹인 사도단의 신앙고백은 바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이십니다’라는 고백이다. 예수가 확인한 것처럼 모든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밖에 있는 사람들과 사도들을 구분해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사도들에게는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도 공동체의 유일한 신앙고백은 역사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의견들과 학설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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