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 부자관계의 육화

1) Abba
예수가 하느님과 부자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예수의 자아의식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개념은 Abba라는 개념이다. Abba는 일상적 언어이다. 가장 유아적인 언어이고, 나를 직접 낳아주신 분에게 사용한다. 이 개념은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분에게서 직접 태어났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이 표현이 무수히 나오고 있다. “너희들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도 이야기한다. 마르 14,36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런 Abba의 개념이 유대 종교안에서 종교적 언어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부르는 것은 아주 드문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하면서는 전혀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게 이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아버지가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이 말은 신적 초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제자들도 예수의 기도를 듣고 놀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마르코가 이를 기록하는 것은 예수가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할 용기조차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복음사가에 대해서 이런 말씀이 잊혀지지 않고 보존되었다면 예수가 말씀하실 때 희랍어가 가질 수 없는 독특한 느낌과 독특한 표현,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사가들이 예수의 이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이는 외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자발적인 의식안에서 마음안에서부터 우러나온 표현이었다.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독특한 계시이다. 예수는 하느님께 기도할 때 언제나 자발적으로, 심오한 당신의 마음을 열면서 그러한 의식안에서 아버지와 당신과의 관계안에서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였고 제자들은 느끼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이런 Abba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 이런 Abba라는 개념은 당신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고 아버지와의 절대적인 친밀감과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는 Abba라는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 제자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과 친밀감 안에서 이런 말을 사용하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Abba라는 개념안에는 신적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신적 정체성이 인간현실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완전하게 육화되어 있다. 신적부자관계는 인간적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신적 본성을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크리스챤 공동체 내에서의 Abba라는 개념을 바오로 역시 사용한다. 갈라 4,6; 로마 8,15. 그러나 바오로는 이를 크리스챤 공동체가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갖고 있던 관계와는 같지 않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만 이 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갈라 4,6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로마 8,15-17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를 Abba로서 계시하고 당신안에서 그분을 Abba라고 부르도록 그런 관계를 이루어 준다. “나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구분해서 말씀하신다. 요한 20,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 이 메시지는 당신의 고유한 부자관계에 당신의 제자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비록 자신과 하느님의 부자관계와는 다르더라도 점차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확산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유대종교와의 단절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유대백성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직접 말씀하셨고 이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희생과 Abba라는 칭호와의 관계가 드러난다. 겟세마니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복음에서 Abba라는 말이 나타난다. 이런 수난이라는 극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예수는 하느님을 Abba라고 부른다. 부자관계와 당신의 희생적 사명는 또 다른 Text로 볼 때 더 잘 나타난다. 루가 2,49에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마리아는 여기서 예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빠스카의 신비, 수난의 신비가 드러난다. 어찌보면 예수는 더 강하게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안에 있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과 인류구원의 구속사업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예수의 인간적 존재를 통해서 Abba의 의미가 더욱 충만해진다.

2) 사람의 아들
(W.KASPER. 예수 그리스도 185쪽부터 읽어보시고 CH.PERROT. 예수와 역사 7장부 터 읽어 보시오)

(1) 예수님편에서의 표현의 사용
인자는 항상 예수 자신이 한 표현이다. 복음서에 약 92번 나타난다 (마태 30, 루가 25, 마르 14, 요한 13).
대화자 혹은 복음사가 자신의 말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예수 자신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후대 공동체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단절성이고, 거기에 대한 이해부족은 예수의 말씀이라는데 기인한다 (?). 초기 공동체에서 이 표현이 사용되었고, 이것이 복음서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서에 보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에 다른 말로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라는 표현으로 예수는 당신 자신을 가리켰다. 따라서 공관 복음을 비교해 볼 때 이렇게 표현이 바뀐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루가 6,22과 마태 5,11을 비교참조하시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왔다”도 “나는 왔다”로 변형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루가 19,10 “사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마태 9,13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을 예수에게 적용시키고 있지만 공관 복음에서는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요한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후대에 요한이 사람의 아들보다 하느님의 아들이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었기에 그러했으리라 추측된다. 예수는 3인칭으로써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즐겨한다. 아들에 대한 칭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공관복음의 두 구절 마태 11,27, 루가 10,22 “나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제시된 질문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 계시하는 사명은 아들의 고유한 사명이고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다. 지상삶 안에서 인식되고 인간적으로 전달되는 인식을 여기서는 의미한다. 아들의 칭호가 사용된 경우마다 사람의 아들로 말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요한 6,40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듯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 요한 9,35 “당신은 인자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 요한 6,40은 가장 초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볼때 예수는 복음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당신 자신을 가리키기 위한 칭호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속에서 이미 복음사가나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예수와 하느님의 신적 부자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2) 지상 삶안에서의 사람의 아들
① 도래와 선재
가. 왔다
이는 하나의 선재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그 예언적 인물이 이미 도래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들의 도래에서 에언자가 단순히 도래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나타나고 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이런 사람의 아들의 도래를 화려한 모습의 도래로써 나타내고있다. 제자들에게 질문한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 그분의 절대적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뒤에 오신다”(마르 1,7). 여기서 요한은 이제 내 뒤에 올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절박함을 선포하면서 도래할 것이다, 그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심판받을 것이다 등 공포의 분위기속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신적 심판을 이루실 그분이 도래함에 대해서 예언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즉 단순히 예언적 모습의 성취를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도래가 실현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의 말씀안에서도 선재사상을 암시하고 있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오다”. 우리가 보통 오다, 가다 할 때 자리가 이동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왔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고유한 위치에서부터 인류를 향해서 내려오심을 전제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현존 자체가 현재의 삶을 선행하는 예수의 기원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사람의 아들은 요한 3,13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분, 다시 높이 들어 올려질 분(요한 6,62) 즉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육화의 신비를 암시하고 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라고 확인한다.

나. 현실적인 실재
이런 선재 사상은 특히 인간적 삶을 살기 위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현존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 체험하게 된다. 가장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루가 7,34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사람의 아들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사람이니까 당연하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이 도래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먹고 마시는 행위는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역사안에 부여하게 된다. 마태 11,18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시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 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서 알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 먹고 마시기만 하는 술주정꾼이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신명 21,20 “이 녀석은 우리 아들인데 고약하기만 하고 애만 태웁니다. 우리의 말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방탕한 데다가 술만 마십니다. 이 아들은 시민들로부터 돌로 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 세대가 사형선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부여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는 양순한 하느님의 아들이다. 바로 그분의 도래, 그분의 현존이 인류를 위해서 이 세상 안에 현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이 성취한 업적은 하느님의 구원업적이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이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행동하는 모습, 특히 그분이 양순함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도래는 인간적 삶 안에 완전히 침투되어 있다. 육화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 가장 처절한 곳, 가장 비참한 곳, 인간의 마음속 깊이 뚫고 신적인 역동성이 그 깊은 곳까지 꿰뚫어 가는 것이다. 세자 요한보다 더 인간적이다. 세자 요한은 엄격하고 정의를 이야기하는 심판의 예언자였다. 사람의 아들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역사안에서의 개입이 그분의 행위안에서 드러난다.

② 신적 권능
예수가 회개한 여인에게 (루가 7,48) “‘네 죄는 용서 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와 한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인데 죄까지 용서해준단 말인가’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수는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경우는 더욱 분명하게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 마르 2,6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거기 앉아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감히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하고 말씀하셨다.” 이런 하느님의 권능이 이 세상 안에서 사람의 아들로부터 수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심판의 권한 안에 생명을 주는 권한까지 일치되게 된다. 요한 5,26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이신 것 처럼 아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요한 3,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 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신적 권능이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졌고 실제로 그것이 역사안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체성사 안에서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천상양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 6,53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3) 영광스런 사람의 아들
(1) 하늘의 구름위에서의 도래
다니엘서의 예언서와 그런 맥락안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라 불렸다. 예수가 의회에서 재판받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을 고백하게 되었을 때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태 26,64). 이는 다니엘 예언서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묘사이다. 신적권능에 대한 참여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항상 집단적인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지칭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하느님의 신적 권능을 가진 그분, 개인적인 초월성이 같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은 신적 현시의 표징을 나타낸다. 보편적인 심판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람의 아들이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중에 오신다”(마태 25,31)는 모습은 즈가리야 신탁 (즈가 14,5)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이런 신적 권한을 사람의 아들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행위를 평가하게 되는 것은 당신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모든 사람들을 당신과의 관계안에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육화를 통해서 모든이의 내부에 신비스럽게 현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적 심판자의 모습을 인간 편에서의 사람의 아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2) 보편적인 심판자, 사람의 아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영광에 싸여 하느님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속에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가 9,26).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루가 12,8). 여기서 일부 학자들은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 사이의 일치를 반박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이용한다. 나와 사람의 아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일치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현존하는 예수님과 종말의 예수를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하나는 지상의 상황이고 하나는 종말의 상황을 나타낸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마태 10,32). 여기서는 동일시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과 인류와의 상호 개인적인 관계에 따라서 아들은 심판하는 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각자에게 행한대로 갚아 줄 것이다.” (마태 16,25).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을 사람의 아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악에 대한 권능도 가지고 있다. “그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을 남을 죄짓게 한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쳐 넣을 것이다” (마태 13,41).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의 인간적인 특성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3) 사람의 아들의 인간적 특성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동시에 인간의 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는 구체적 존재를 나타낸다. 다니엘 신탁에 의하면 사람이 아니라 천상적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 생활 안에 존재한 구체적 존재였다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사람의 아들로서 당신을 가르키면서 당신의 인간적 특성, 사명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심판하는 권한이 주어졌다고 할 때에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제시되어 있고 이는 육화를 통해서 세상에 개입한 하느님, 즉 사람의 아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우리들과 같은 인간존재로부터 심판을 받고 그분에 대한 체험을 갖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심판을 갖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는 지상에서 사람으로서 심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심판이 될 수 있다. 죄를 용서하면서 사람의 아들의 권한을 주장할 때 지상에서 이런 권한을 소유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그 권한이 하늘에서 행사되는 것은 육화의 의미와 너무 간격이 크다. 사람의 아들에게서 용서받은 우리는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어찌보면 그런 권한을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행사된 지배권 역시 사람의 아들의 특성에 연결되어 있다. 유대 종교는 신적인 것을 인간에게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그것을 깨우친다. 하느님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때에 하느님이 육화했다는 것은 완전한 통교를 의미한다. 유대 종교에서 가장 신성한 모습, 하느님의 의도를 사람의 손에 넘겨주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원한 삶을 통교하는 것, 그것은 사람의 아들의 본질적 사명이다.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넘겨주면서 영원한 생명을 통교하신다. 이렇게 생명을 통교하는 권한은 육화하신 사람의 아들에게도 속해 있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 때 요한 6,22에 의하면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이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통교되고 이런 권한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인간성, 그분의 존재를 보고 신적 정체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신앙의 접근은 이렇게 육화하신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솟아 나도록 사람의 아들이 인류에게 접근하신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사람의 아들의 인간성을 희생안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을 치르러 왔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 기원을 갖고 있는 분을 도래한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희생은 인류를 위한 희생이 될 수 있다.

(4) 사람의 아들의 표현에 함축된 신학
① 인간 현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지적하기 위해 그 자체로 사람을 의미하는 개념을 선택하셨다. 하느님이라는 칭호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고 이렇게 사람이 아들이라는 말씀으로 당신을 계시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인류속에 개입된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모습, 모든 겸손함을 그대로 취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종합적으로 볼 때 예수가 참으로 완전한 인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죄 외에는. 그러나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지 완전한 인간은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은 아담이 죄를 짓기 前의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그대로의 인간을 의미한다.

② 신학적 차원
다니엘 신탁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과 유사하게 천상적 기원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사람의 아들의 호칭은 천상적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 주어졌다. 그러나 에제키엘의 현시에 의하면 하느님이 인간적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제 1,26). 하느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표상은 사람이 아들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사람이 창조되었다. 인간은 하느님을 가장 닮은 존재라는 것이다. 다니엘서에서는 지극히 높은 신분의 거룩한 백성을 나타내고 있다. 종말적 운명안에서의 거룩한 백성들의 인격화를 나타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란 개념은 다니엘서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는 신적 존재, 새로운 인류를 이끌고 하느님께로 인도할, 따라서 그들도 하느님의 모상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그러한 분이다. 그러나 이는 다니엘서와는 달리 사람의 아들은 인간의 현실 또한 갖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적 모습만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분의 업적, 행동등을 갖고 정체성에 대해서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처럼 신비스런 정체성, 그분의 존재, 사람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처럼 그분의 존재와 정체성을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인간적 현실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면이 있다. 그러나 그분의 신적 기원이 우리와 같은 삶을 사는데 방해되지는 않는다. 먹고 마시는 사람의 아들로서 도래했기 때문이다. 신적 권능을 행사하는 분으로서 그러나 사람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 따라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판단하고 신앙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시면서 신적권능을 가진 분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사람으로서이다. 그분 안에 육화가 완전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아들 자체가 완전히 성취된 하느님의 역사의 개입, 육화의 표징으로써 드러난다. 어찌 보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과 동일하다. 따라서 신적인 면이나 인간적인 면만을 강조한다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사람의 모습과 영광의 모습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 들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사람의 아들이다.

③ 존재론적인 것과 기능적인 것
사람의 아들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분의 도래와 권한에 대한 주장에 의해서도 밝히 드러난다. 하나의 사명을 완수하러 왔다 (구원하러, 섬기러, 몸값을 치르러).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은 한편으로 존재론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단순한 기능적인 면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분은 하느님으로부터 단순히 파견된 예언자가 아니라 아들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위격은 그분이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 더 근원적인 것이다. 그분의 위격적 정체성, 삶의 존재 양식에서 출발하면서 그분의 기능이 밝혀진다.

④ 인간적 부자관계
사람이며 동시에 아들이라는 것, 성령에 의한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가 하면 마리아에 의한 인간적 출산을 의미한다. 요한에 의하면 마리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여인이라고 한다. 인간적인 가족 관계에서 단순히 어머니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서 인류를 상대로 행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부를 때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예수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그는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준다.
우리가 묵상하고 반성할 것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이미 본 바와 같이 구약성서 안에서 다니엘서와 대조되는 문맥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모습과 예수의 이런 선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주권과 나라와 영화가 그에게 맡겨지고 뭇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된다. 인류로부터 섬김을 받는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봉사, 종 이라는 개념은 야훼 하느님의 종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종으로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종으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죄인의 용서를 위해 희생으로서 당신의 생명을 봉사하며 이 사명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겸손하라는 말이 아니라 온 존재를 바치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사람에게 봉사하는 위치에서이다. 이런 권한은 봉사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 봉사를 제쳐놓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종으로서, 인류의 종으로서 봉사하여야 한다. 참된 권위는 봉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 역시 이런 권한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위행사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을 위한 권한만을 받아들이신다. 죄인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한 신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인간구원을 위한 권한은 신적 계획안에서 인간을 위해서 행사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인간으로서, 또한 신적 질서에 계시는 분으로서 계시되고 있다. 이런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 그래서 인간 안에서 봉사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보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사람들과 더 결합되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멸시하고, 죄를 지어 돌로 쳐 죽일 상황에서도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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