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과 예수의 유혹

이어서 예수는 즉시 사막으로 인도되고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예수가 공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사막과 유혹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마르코
마르코는 요르단 사건과 연결된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마르 1,12-13 “영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냈다. 그분은 광야에 사십일 동안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이것이 마르코가 전하는 전체 내용이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면서 들짐승과 함께 40일간 머문 곳, 천사들이 그에게 종사한 곳. 여기서 즉시, 곧이라는 말이 나타나면서 성령을 언급한다. 요르단 사건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나타난다. 마치 세례를 받은 다음 그 성령이 예수를 사막으로 내쫒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서는 보다 부드럽게 인도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루가에서는 성령에 의해서 사막에서 계속 순례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인도된 것 처럼.

(2) 마태오
마태오는 본격적으로 유혹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해준다. 세가지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태 4,1-11 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런 세가지 유혹은 신명기에 나타나는 세가지 유혹과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신명 8,3; 6,16.13; 10,20). 이를 상기시키면서 마르코가 간단하게 두구절로 제시한 이야기를 확대시켜 제시하고 있다. 신명 8,3은 만나에 대한 이야기로 빵만으로는 살지 못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생활할 수 있다는 내용이고, 6,16은 마싸에서 처럼 하느님 야훼를 시험하지 말라는 내용이고, 6,13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만을 섬기고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내용이다.
여기에 대한 J. Guillet가 설명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비교해서 보여준다. 예수가 유혹을 받았다는 이 사실은 출애급의 40년을 상기시킨다. 사막은 그 자체로 시험과 유혹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아들로서 선택된 후에 출애 4장, 불기둥(성령)에 의해서 40년간 유혹을 받기 위해 사막으로 인도된 이스라엘 처럼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요르단에서 방금 계시된 그 성령에 의해서 사막으로 인도되고 거기에서 유혹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이 굶주림의 유혹을 받았고 마싸에서 표징을 요구하면서 하느님을 시험하였고 우상숭배에 떨어졌던 것 처럼 새 이스라엘인 예수는 똑같은 시험을 당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막을 건너가면서 체험한 이스라엘의 여정을 예수가 재현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 사막의 유혹을 승리로 이끄신다. 그러면서 절대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참된 이스라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이스라엘은 유혹에서 졌지만 예수는 승리한다. 유혹에 떨어진 이스라엘의 시간이 끝나고 충만한 시기가 도래해서 새 하느님의 백성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안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성취되는 것은 마태오의 전체 신학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3) 루가 (4,1-13)
루가 역시 유혹사화를 전해준다. 루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편집의 흔적을 갖고 있다. 신적 계획의 성취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사막을 통과한 것과 예수의 사막체험을 비교하면서 새 출애급으로 예수의 사막의 체류를 제시한다. 그러나 루가의 독특성은 이 사화가 수난과 부활, 성신강림의 미래사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루가 아에 나타나는 사탄의 유혹 자체의 이야기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결론에서 마태오는 사탄이 예수를 떠났다고 간략하게 말한다(마태 4,11 “이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서 그분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루가는 4,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까지 그분에게서 떠나 있었다.”라고 되어있다. 사탄이 미래에 다시 도전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도전의 시각은 언제인가? 루가에 있어서 사탄이 예수를 유혹하고 주위에서 어지럽게 한 것은 수난의 시기이다. 어둠의 세력이 예수를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고 괴롭히고, 십자가상에 처한 것은 수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유혹과 수난은 예수와 사탄 사이의 유일한 투쟁을 나타낸다. 따라서 루가는 사막에서의 유혹에 대한 이야기를 수난의 서론으로 겟세마니의 고뇌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루가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유혹의 순서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오가 출애급 사건에 따라서 기아, 성전꼭대기, 세상의 유혹을 제시한 반면, 루가는 마태오의 두번째, 세번째를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을 강조한다. 예루살렘은 루가에 있어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그곳에서 구원역사가 성취되는 신학적 삶의 자리이다. 예수의 삶 전체는 미래 출애급이 결정적으로 실현되는 것, 모든 예언자들이 치명한 것, 따라서 예수의 죽음이 있게 된 곳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인 것이다. 패배한 사탄이 잠시 유혹을 중단하고 마지막 투쟁을 위해서 다시 돌아 오리라는 것, 사막에서의 유혹은 마지막에 있을 이런 수난의 드라마의 서론으로 제시된다.

① 루가의 상징론
아담에 대한 상징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아담에 까지 소급되는 예수의 족보가 있은 다음 즉시 유혹의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루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 인류의 출발점이 새로운 아담의 모습으로서 예수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막안에서의 예수의 유혹과 에덴의 유혹을 비교하여 제시한다. 아담이 죄를 지은 곳에서 그리스도는 승리를 거두었다. 예수가 받은 유혹은 모든 인류가 끊임없이 겪어야만 될 유혹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당한 유혹의 원형으로 제시될 수 있다. 어찌 보면 요한 1서에 나타나는 욕정, 욕망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는 일부의 신학적 해석이다 (J.Guillet ; A.Feuillet).

(4) 유혹 이야기의 역사성
이 유혹의 이야기는 실제적인 역사성을 가진 이야기인가? 예수의 공생활 시작에 있었던 이야기인가?
일반적으로 성서학자들은 초기 공동체안에서 이루어진 이야기인가, 예수에까지 소급된 이야기인가를 볼때 초기 공동체의 것으로만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부활 이후 초기 공동체의 삶은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한 다음 하느님의 우편에 좌정하신 부활에 의해서 모든 것이 해석되었고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자로서 그분이 다시오실 것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충분히 설명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러나 신학적 의도나 표현은 신학적 편집안에서 이루어졌을지 몰라도 그 자체는 예수에까지 소급된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의 수난, 삶은 예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이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요구하였고, 십자가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하였고, 빵을 요구하였고, 이런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이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은 유혹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의 유혹자로 나타난다. 예수에 있어서 사람들이 유혹한 행위 뒤에는 사탄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의 사명은 이런 사탄의 움직임과 정반대에 놓여 있다. 이런 유혹의 이야기는 예수의 삶 전체를 숙고해 볼 때 당시의 상황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공적 집무 상황에서 더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교육시키고자 했던 예수의 의도가 삽입될 수는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메시아에 비밀에 대한 교육을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시켰다. 사실 제자들은 영광스런 주권을 가진 현세적 메시아로 예수를 고려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고 실제로 그런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유다이즘의 유혹에 물들어 있었고 제자들의 일부 행위가 이를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의 유혹과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베드로가 받은 유혹의 장면 사이의 관계가 강조된다. 일반적으로 이런 면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예수가 이런 베드로의 유혹의 장면, 마르 8,27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음에 베드로가 예수의 수난을 반대하자 예수는 “썩 물러가라 사탄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일만 생각하는 구나!”하고 말씀하신다. 이런 유혹의 상황과 수난의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이런 역사적 상황안에서 예수가 당신이 당하실 유혹의 이야기를 이 기회에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셨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가 당신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과 제자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너무도 인간적인 희망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뜻을 따르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역사적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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