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Kasper ꡔ예수 그리스도ꡕ 236쪽 前後 參照
Marxen의 출발점은, 부활에 대한 문제는 성금요일 이후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와 그의 원인에 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예수의 원인이 그의 죽음 후에도 하나의 체험적 현실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Marxen에 있어서 부활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예수의 원인이 지속된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예수의 케리그마는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를 위한 규범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과 십자가는 이런 지속성의 전제하에서 예수의 원인을 해석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따라서 Marxen에 있어 중심점은 예수의 역사와 그의 원인이다.
예수의 원인에 대해 Marxen은, 예를 들면 사람의 로기아는 현재 종말론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사람들이 지금 예수와 갖고 있는 관계,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하나 식탁에서의 일치, 여러 기적, 치유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의 용서와 함께 종말적 심판을 선행하고 있다. 기적들은 하느님의 구체적인 도래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의 원인은 특이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만 기대되는, 즉 Marxen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나는 함축적 그리스도론을 극도로 강조한다.
Marxen이 주장하는 이런 전망 안에 부활이 어떻게 삽입될 수 있는가? 그 출발점은 역사의 예수와 그의 원인이다. Marxen은 여기서 예수의 케리그마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신약성서의 첫번째 자료는 예수에 대한 신앙의 자료가 아니라 예수로부터 통교된 신앙이라고 본다. 따라서 부활 이전에 이미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선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느님의 사건이 실제로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케리그마라 할 때 하느님의 사건이 예수 안에서 확인된 그 예수와 부활 이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와 다른 많은 사람들, 예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인도하려는 목적과 예수와의 관계도 표현해 준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는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하느님 사건이 성금요일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케리그마가 사실상 교회 안에서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런 예수 케리그마의 지속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다. 여기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삽입된다.
Marxen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하나의 사실이 주목되고 있다. 예수가 죽은 후 일부 사람들이 그들을 극도로 자극한 하나의 체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체험은 ‘예수를 보다’라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이것이 후대에는 ‘예수를 보았다’라고 해석되었다. 표현이 어떻든 ‘예수를 보다’하는 자료는 다음 사항을 내포한다. 예수 혹은 십자가에 못박힌 이를 보았다는 확인과 선포, 그리고 신약성서 안에 일치를 이루고 있는 현시에 대한 해석, 따라서 ‘예수를 보았다’는 체험의 자료는 Marxen에 의하면 부활 이후에도 예수의 케리그마를 지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Marxen에 의하면 예수 케리스마와 함께 지속되면서 공동체는 예수 안에 하느님의 사건이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사건은 예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그마 안에서 체험될 수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Marxen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십자가도, 부활도 선포의 내용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활 이후의 선포가 예수 안에 자리잡고 있는 원인이고, 이는 증거자들의 선포를 통해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원인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Marxen은 개인적인 해석으로서의 부활뿐 아니라 종합된 해석으로서의 십자가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은 제자들의 ‘봄’에 대한 자극적인 체험의 유일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아 사상에 친숙해 있는 모델에 따라서 예수의 원인의 지속성을 설명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하나의 해석일 수 있다. 예수의 기능적 케리그마(원인)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빠스카적 케리스마 안에 옮겨진다. 예수의 기능에 대한 고려에서부터 그의 위격에 대한 확인으로 넘어가게 된다. 예수 케리그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여러가지 칭호 속에서, 특히 ‘그리스도’라는 칭호에서 ‘Christus 케리그마’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위격을 강조하면서, 또한 운명을 강조하면서도 Marxen의 숙고, 즉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진다.
Marxen은 이런 자신의 그리스도론 안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고 두가지 입장을 배격한다. 첫째 Bultmann의 입장이다. Bultmann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Marxen에 의하면 Bultmann에서는 십자가의 케리그마의 정당성이 문제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예수까지도 거절하게 만든다. 둘째로 Marxen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구원의 사건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배척한다.
Marxen이 둘다 배척한다면 어떻게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인가? Marxen에 의하면 십자가는 예수의 원인의 지속이라는 전제하에 예수의 원인에 집중된 해석이다. 제자들은 하느님과의 질서를 회복하고 죄인을 구속하는 예수와의 원초적인 체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후에 십자가 위의 예수의 대속적 희생에 대한 유대인 범주를 통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이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에 이미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 안에 담겨 있는 모든 구원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역사의 예수에 대한 의미를 밝혀 주고 확인하는 것으로서 십자가도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인 것은 예수의 원인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Marxen에 의하면 십자가의 부활은 예수의 원인에 대한 해석 외에 새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자료는 십자가나 부활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의 원인이 지속된다라는 것에만 강조점을 두기 때문이다.
Pannenberg는 Marxen의 이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특히 그는 Schleiermacher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Schleiermacher는 역사의 예수의 삶을 강조하면서 그분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강조했다. 또한 육화에 대한 전통적 그리스도론과의 관계를 보고 있다. 왜냐하면 육화에 대한 전통적 그리스도론과 부활을 연관시키면서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화에 대한 기본적 자료의 결과일 뿐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Marxen의 시도도 이와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고찰들은 말씀의 Text나 비슷한 유형의 Text를 읽을 때 반드시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그가 얘기하는 자극적인 체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W.Kasper의 ꡔ예수 그리스도ꡕ에서처럼 체험에 대한 해석은 체험후에 나중에 다시 숙고할 성질의, 중립적인(nentrum quid) 것이 아니라 정확한 내용을 갖고 있다.
또다른 비판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원인의 지속성에 대한 것이다. Marxen은 예수의 원인에 대한 지속성을 주장하면서 부활의 새로운 차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부활 안에서 역사의 예수와 그의 원인만을 단순하게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예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약성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부활하신 분과의 일치성을 제시하고 있다. Pesch의 입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W.Kasper는 부활은 예수의 영구한 의미를 지적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곁에 있는 삶,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새로운 삶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현상이나 의미에 머물고 예수의 원인에 대한 해석에 머물고자 하는 해석학적 연구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Marxen이 예수의 부활을 예수의 원인이 지속된다는 것을 해석하는 것으로 Marxen의 주장은 부활의 새로운 차원을 재고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카스퍼 책에 있는 것처럼 카스퍼는 단순히 예수의 원인을 주석 한다는 그것을 지적하기 위한 열쇠로 부활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새로운 차원, 절대적인 새로움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부활 현실에서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기본적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때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말적 예언자의 빠스카 이전 삶과 그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이런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려하는 것, 이전 주장에 대한 단순한 확인의 기능으로서 부활을 보는 것은 불완전하다. 보다 알맞는 것은 성서적 스케마이다. 약속의 초월적 성취, 즉 예수가 구약에 이루어진 약속의 초월적 성취였던 것처럼 아버지 곁에 영광스럽게 계신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의 초월적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역사의 예수와의 관계에서 고찰될 수 있다. 그러나 약속과 새로움의 차원을 내포하는 초월적 성취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을 순수한 예수의 원인에 대한 해석으로 만드는 숙고는 어찌 보면 부활 신앙의 본질을 제거하는 것과도 같다.
R.Pesch는 빠스카 신앙에 일반적으로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가를 고찰한다. Marxen이 제시한 것과 공통점을 가진다. 그 출발점이 역사의 자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빠스카 신앙의 이성적 증거를 요구하는 전조로부터 출발한다. 신앙이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계시의 중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이성적인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이 없이 단순히 계시의 기초 아래 있는 신앙 절대주의(Fieism)를 거부한다. 어찌 보면 이런 노선은 전통적 호교론, 혹은 기초 신학의 방법론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학문으로서의 신앙을 주장하면서 역사를 탐구하고자 하는 Pannenberg의 주장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호교론은 빈무덤과 발현을 강조한다. 그러나 Pesch에 의하면 이런 논증은 더이상 설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빈무덤에 대해서 볼 때 그 자료 자체가 모호한 것이다. 빈무덤 자체의 역사성이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 16,1-8에 나타나는 빈무덤의 이야기 자체가 전적이고 신앙 선포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지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고린 15,5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나는 Ophte(현시, 발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1고린 15장의 경우 베드로의 권위를 정당화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신학적 확인, 숙고에 의한 것이고 여기에서부터 역사적 증거를 추론할 수는 없다. 즉 Pesch에 의하면 빈무덤도 발현도 빠스카 신앙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볼 때 Pesch는 현시에 연결된 일종의 자극적 체험만이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한 심리적 조건 안에 제자들이 있었다고 확인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가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이 어떤 조건에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예언자가 사형 당했을 때에 그 제자들이 예언자의 주장과 예언자의 원인을 포기하고 떠났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죽은 후에 그의 사명을 계속했다. 예수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것이 아니었는가 라고 질문을 제기해 본다.
Pesch는 발현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빠스카 이전의 자료를 가지고 부활의 신앙을 기초해 보려고 시도한다. 예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은 예수를 회상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당신을 종말적 예언자로 이해했고 실제로 제자들이 예수를 그렇게 이해하였다면 이들은 예수가 돌아가신 다음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선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앙은 발현이 필요없다. Pesch에 의하면 부활에 대한 고백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적 예수 안에 현존하는 자료들로서 충분하다고 본다. 예수께 대한 신앙은 이미 빠스카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신앙이 하느님이 그를 부활시키셨다는 고백의 의미에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변형되었지만 그 신앙은 빠스카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다.
Pesch의 주장은 Marxen의 주장과 근접한다. 왜냐하면 Pesch도 역사의 예수에 관한 자료에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다. 보다 더 역사비판학적인 숙고를 하고 있고 빠스카 신앙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Pesch의 경우 부활을 예수의 원인의 순수한 지속성으로 환원시키고자 한 것도 아니다. 종말론적인 예언자의 순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를 믿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의 현양은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에 의해서 볼 때 빠스카 신앙은 역사의 예수 안에 현존하는 자료들에 기초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순수하게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부활을 창조해 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빠스카 신앙은 최종적으로 빈무덤이나 발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서 예수 자신에 관계되고 있다. 여기에서 역사적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빠스카 신앙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들을 제시해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먼저 신약성서의 해석에 있어서 주석의 선택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역사비판학적 방법론과 교의적 방법론 사이의 차이이다. 부활에 대한 문제는 접경의 문제이다. 바로 이런 접경의 문제의 특성이 주석적 선택의 다양함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한편으로 예수의 부활은 이전 구원 역사의 종착점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역사 안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미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역사 안에 삽입되어 있다. 새로운 기원이 시작을 나타낸다. 새로운 기원의 시작이기 때문에 역사의 사건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출발점은 우리 역사 밖의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출발점을 이야기한다.
역사의 확인이라는 노선 안에서는 빈무덤이 고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마태 28,13에 나타나는 것처럼 시체를 옮겨 놓고 부활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빈무덤에 관한 사실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역사적으로 볼 때 증거자들의 확신을 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료 역시 비판적으로 볼 때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특정한 현실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심리적 차원). 따라서 부활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 방법론의 유비에 따라서 역사비판학적 방법론에 근접하고 있는 방법으로 실제 그 현상을 축소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또는 사도적 증거에서 제시된 것처럼 그 자료의 특이함, 역사의 유비를 가질 수 없는 어떤 특이함의 자료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석의 기본적 선택은 누구도 회피할 수가 없다. 이런 기본적 딜레마는 항상 존재하고 있고 항상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선택을 해야 한다. 초창기 신앙은 어떤 환시의 일상적 현상과 함께 제자들의 집단적 심리작용의 결과였던지 아니면 정상적인 사실이었지만 역사의 유비를 갖고 있지 않은 특별한 사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특별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가 살아계심을 확인하였다. 만약 이런 제자들을 믿지 않는다면 왜 그들을 믿지 않는가? 이것은 선택에 달려 있다. 두가지 해결 모두가 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주장을 통해서 무신론 또는 유대아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이론, 역사적 현실과 역사적 유비의 영역 안에 있다는 장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약점은 제자들 편에서의 부활에 대한 케리그마의 선포와 그분의 현양에 대한 설명 안에 존재한다. 다른 이론은 그리스도인적인 해석이다. 예수에 대한 체험과 만남을 통해서 초기 신앙의 기원이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유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카스퍼는 역사의 의미에 대한 문제보다 더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 이 문제가 고찰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보다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만 부활에 대한 숙고를 위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유비를 초월하는 모든 숙고를 제거하는 역사비판학적인 방법론과 신앙의 전망을 위해서 열려져 있는 교회적 숙고 사이의 양자선택은 불가피하다. 역사비판학적 방법론은 보편적인 수위성, 유비를 갖고 있는 전체적 사건 하에서 어떤 특이한 자료를 고찰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론 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다루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론이 인간학으로 전락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향을 갖고 있다. 계시라는 것은 그 자체가 거부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교회적 숙고에 있어서는 역사적 근거는 하느님의 계시를 도와주기 위한 자리로서 제시된다. 역사적 유비에 따라서 해석될 수 없는 자료의 특이함, 역사 안에서 다양화될 수 없는 특이한 유일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하면서 실제로 이런 역사비판학적 방법론과 교회적 숙고 사이에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해 주었고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시키면서 학문이 발전되는 출발점을 제시해 주었다.
역사적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의 기본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자료는 예수의 죽음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자료이다. 이 자료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질문이 되는 것은 어떻게 빠스카 신앙의 기원을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Pesch의 설명은 빠스카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기에는 완전하지가 않다고 볼 수 있다. 빠스카 신앙은 그 표현에 있어서 빈무덤의 역사적 사실과 특히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에 대한 자료들과 관계를 갖고 있다. 빈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많은 토론이 있었고 모호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발현에 대한 것은 역사적 자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예수의 죽음 후에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빠스카 신앙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Pesch는 빈무덤과 발현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자신의 논문을 위해서 이용할 때는 다른 논증을 대해서는 그렇게 비판적이 아니다. Pesch가 종말적 예언자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주장하면서 후기 유대아 Text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방법론적인 결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요한 세자와의 비교도 표면적이라는 것이다. 요한의 부활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시 살아난 요한을 예수 안에서 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역사적으로 제자들에게 하나의 스캔들, 단절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특히 Hengel, Stuhlmacher). 자신들에게 적어도 하나의 파멸이었다. 십자가 후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체험 없이는 그들의 신앙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따라서 어떤 체험이 있었을 것이다. 빠스카 신앙의 기원을 위해서 역사적 예수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연결을 배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부활을 형식화하기 위한 유대아 묵시적 요소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빠스카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빈무덤과 발현에 대한 언급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빈무덤 그 자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토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
Hengel같은 경우에 빈무덤이라는 사건은 유대인들 사이에 부활을 선포하는데 결코 용이하지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미래의 부활과 희망에 연결된 무덤에 대한 예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빈무덤이 없었다면 예수도 마지막 때에 부활할 것이라는 확인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여간 빈무덤에 대한 자료는 모호한 자료이다. 아까 말한대로 다양한 설명이 있을 수 있다. 자료적으로 모호할 뿐만 아니라 빠스카 신앙 자체를 물리적 표상과 동일시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빈무덤에 대한 자료는 그 자체로 높이 평가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자체로 빠스카 신앙을 기초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승 안에서 찾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의미는 표징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카스퍼에 의하면 표징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가현설을 배제하는 구체적인 징표가 되고 에블링에 의하면 빠스카를 강조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현에 대한 자료이다. 1고린 15,3-5애 나타나는 Ophte, 여기에서 증거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간과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들은 교회 창설이라는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Text자체가 크리스챤 전승을 설명해 주고 있다. 1고린 15,3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Paradosis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전승의 기초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발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만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 않다면 이런 주님의 발현(Ophte)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가 제기된다. 에블링의 경우에 어떤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보다, 믿다와의 관계를 연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믿는다, 혹은 먼저 믿고 다음에 본다는 식으로 연대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만남이라는 사건 안에서 하나의 유일할 사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역사적으로 볼 때 발현의 현상은 예수가 아무에게나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한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바오로를 제외하고는 그를 이미 알고 있었고 예수에 대한 특정한 신앙을 이미 갖고 있었던 사람들, 십자가에 의해서 동요되었고 이제 당신의 발현으로 그 충만한 신앙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신앙이 이르게 되었다 고 할 때 부활하신 분의 이니셔티브 없이는 설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부활하신 분의 이니셔티브에 발현이라는 복잡한 자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얼굴에서 예수가 정말로 하느님께 속하여 있다고 확인하는 것은 이론적인 고독한 사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이니셔티브가 있었고 예수와의 새로운 접촉이라는 의미에서 계시된 사건이다. 죽음에 대한 체험을 하고 그 다음에 같은 예수에 대한 다른 체험이 주어지고 있다. 이런 체험은 인간 편에서 이니셔티브를 통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부활 자체도 예수의 역사적 활동의 의미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계시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발현에 대한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1고린 15,3-5에서 Paradosis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미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것, 그리스도께서 묻히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적 삶과 부활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 성신 강림 전에 사도를 새로 뽑게 되었을 때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와 함께 있었던 사람을 제자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은 제비를 뽑는다.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런 예수와 함께 살고 생활한 것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무슨 소리든지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전해 받은 것은 하나의 현실이다. 교회가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아니면 학문적으로 어떻게 더 잘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거기에 대해서 전혀 믿지 않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사실은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확신될 수 없다. 이론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교의는 나중에 태어난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교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에는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했다. 성체 성사를 실천했고 빵을 쪼갰고,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체험했고 그렇게 내려왔다. 그러다가 후대에 이단들이 생기면서 그리스도교의 확신은 우리가 생활하고 신앙으로 이해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확인은 이런 것이다라
는 것을 발표했을 뿐이다. 그 교의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교의에서 의미하는 것, 그것이 뜻하는 것을 실제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활이 없을 때 우리의 생활은 헛되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