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믿다(οραω, πιστευω)

Jn 20, 24(사도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를 믿는다.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이 text에서는 제자들의 봄이 믿는 장애를 제거한다는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사건을 연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는 부활한 예수의 자유로운 계시와 연결된 신앙의 표현이다. 어떤 체험적 자료로서, 부활한 그분의 자기 통교를 통해 자극된 존재는 차원을 자기 안에 내포한다. 이 안에서 일어나는 첫번째 것은 자신의 죄와 죄의 용서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와 박해자였던 바울로의 체험 등등). 보는 것이 믿음의 장애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요한의 이야기는 사도 시대의 교회와 사도 이후 시대의 교회의 간격을 나타낸다. Pasca신앙은 사도의 증거 위에 기초함을 표현한 것이다. 사도적 증거 자체는 교회의 형성, 구성 순간에 있었다. 이 맥락 안에서 바울로가 1 Cor 9, 1에서 자신의 신앙을 피력한다(내가 사도가 아니고 자유인도 아니며 그리스도를 못 보았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사도적 신앙과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Rom 17, 10; 신앙을 들음으로써 온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받아들임에 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현실은 모든 세상의 모든 시기에 이미 현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광스런 부활되신 주님이 교회의 전승 속에 현존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전승은 우리도 사도적 증거와 일치라는 수평적 차원을 갖고 동시에 그분과의 관계를 갖는다는 수직적 차원을 내포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적 교회와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따라서 이런 간격의 수용이 부활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체험을 거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초기 증거자들도 이것의 자극적인 체험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삶 안에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죄의 용서를 인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료가 우리의 체험과 신앙의 삶 안에 삽입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삶 안에서 부활의 의를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 삶으로부터 격리된 순수 이론의 정리로 죽은이들로부터의 예수의 부활의 선포는 잘못된 것이다 – 절대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부활한 분께 자신의 체험을 두는 사람은 예수는 부활하셨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Act 1, 21(… 이 사람들 중에서 …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와 함께하지 않을 시 증거자가 될 수 없다. 예수와 함께 생활하지 않을 때에 라는 것은 즉 역사적 예수의 삶과 부활의 사도적 증거를 관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울로의 특별 경험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바울로는 자신이 사도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중시하였으나 자신이 받은 복음을 사도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을 예수 부활의 증인들에게 제시하고 이들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발현과 현실에 있어서도 사건으로서의 부활의 현실은 역사적 현실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종말론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새로운 기원으로서는 역사 밖의 일이다(부활은 종말적 새로운 시작이다). 이는 하나의 초월적 종말적 사건이다. 즉 소생(召生)의 의미가 아니다(라자로의 경우는 소생의 의미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통과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하느님의 능력에의 언급 없이는 말할 수 없다. 증거라는 것 자체가 부활에 있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증거라는 것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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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Jn 20, 24(사도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를 믿는다.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이 text에서는 제자들의 봄이 믿는 장애를 제거한다는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사건을 연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는 부활한 예수의 자유로운 계시와 연결된 신앙의 표현이다. 어떤 체험적 자료로서, 부활한 그분의 자기 통교를 통해 자극된 존재는 차원을 자기 안에 내포한다. 이 안에서 일어나는 첫번째 것은 자신의 죄와 죄의 용서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와 박해자였던 바울로의 체험 등등). 보는 것이 믿음의 장애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요한의 이야기는 사도 시대의 교회와 사도 이후 시대의 교회의 간격을 나타낸다. Pasca신앙은 사도의 증거 위에 기초함을 표현한 것이다. 사도적 증거 자체는 교회의 형성, 구성 순간에 있었다. 이 맥락 안에서 바울로가 1 Cor 9, 1에서 자신의 신앙을 피력한다(내가 사도가 아니고 자유인도 아니며 그리스도를 못 보았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사도적 신앙과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Rom 17, 10; 신앙을 들음으로써 온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받아들임에 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현실은 모든 세상의 모든 시기에 이미 현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광스런 부활되신 주님이 교회의 전승 속에 현존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전승은 우리도 사도적 증거와 일치라는 수평적 차원을 갖고 동시에 그분과의 관계를 갖는다는 수직적 차원을 내포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적 교회와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따라서 이런 간격의 수용이 부활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체험을 거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초기 증거자들도 이것의 자극적인 체험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삶 안에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죄의 용서를 인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료가 우리의 체험과 신앙의 삶 안에 삽입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삶 안에서 부활의 의를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 삶으로부터 격리된 순수 이론의 정리로 죽은이들로부터의 예수의 부활의 선포는 잘못된 것이다 – 절대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부활한 분께 자신의 체험을 두는 사람은 예수는 부활하셨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Act 1, 21(… 이 사람들 중에서 …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와 함께하지 않을 시 증거자가 될 수 없다. 예수와 함께 생활하지 않을 때에 라는 것은 즉 역사적 예수의 삶과 부활의 사도적 증거를 관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울로의 특별 경험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바울로는 자신이 사도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중시하였으나 자신이 받은 복음을 사도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을 예수 부활의 증인들에게 제시하고 이들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발현과 현실에 있어서도 사건으로서의 부활의 현실은 역사적 현실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종말론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새로운 기원으로서는 역사 밖의 일이다(부활은 종말적 새로운 시작이다). 이는 하나의 초월적 종말적 사건이다. 즉 소생(召生)의 의미가 아니다(라자로의 경우는 소생의 의미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통과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하느님의 능력에의 언급 없이는 말할 수 없다. 증거라는 것 자체가 부활에 있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증거라는 것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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