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그리스도의 현존)

지금까지 현양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을 보다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관계된 것. 신경의 고백은 하느님 아버지 곁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느님 우편이란 자리는 상징적으로 어떤 결정하고 실행하고 결단을 내리는 위치, 자리를 나타낸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우편에 계시다고 할 때 이러한 결정하고 실행하는 그래서 인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차지되었고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현존해서 그러한 구원 활동을, 하느님의 권능을 행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떠한 불안의 요소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분이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례를 받는다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길을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신 아들에게 심판권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그분 곁에 심판의 권능을 갖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구와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종말 때의 심판에 대해서 하느님 아버지 앞의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라고 할 때 이러한 전례적 자료는 바로 이러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 곁에서 항상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두려워할 수도 없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어떠한 변호사, 전구자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은 John 복음 안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Jn 17(예수의 사제적 기도). 그뿐만 아니라 Heb 5,7-10(그분은 육으로 계셨을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으며 그분은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그이는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께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본을 따라 대제관으로 임명받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현양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 우편에 좌정하여 계시다는 그 사실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상에 인류를 위해 버리시고 즉 먼저 모든 인류를 이끌면서 천상에 들어가는 순간에 멜기세덱의 예를 따른 대제관으로 임명받았다는 것이다. 사제의 직무가 완성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을 지상에서 수행한 다음에 인류를 이끌고 천상에 들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들어갈 때 사제직이 비로소 완성된다(중보자로서의 기능). 하느님 곁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는 무엇인가?
교회 신앙에 의하면 칼체돈 신경에 보면 두가지 오류적인 해석에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 한편으로 참되신 하느님(vere Deus)이 영광 중에서만 증거 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치 예수가 그전에는 순수한 한 인간이었고 지금은 현양을 통해서 신격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에는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현양은 예수가 참되신 인간이 아님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인성은 박물관 진열장, 책꽂이에 꽂혀 있는 유물이 아니다. 영구한 의미를 갖고 있는 그러한 자료이다. vere Deus vere Homo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건 전체에 관계되고 있다.
현양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속성 – 영광, 영원성, 구원적 능력, 창조적 행위 – 들은 지상의 예수 안에 계시된 것과 대조된 것이 아니다. 부활한 그리스도로부터 이러한 속성이 확인되고 있는 것은 그분이 모든 세상과 모든 시간에 앞서 하느님께로부터 결정적으로 인준을 받고 이 세상 사람들 앞에 공표되었다 라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변모(Mt 17,5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아들이 현존하는 그곳에 하느님이 현존하여 계신다. 지상 예수의 시기와 비교해 볼 때 현양을 통하여 변화되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그의 존재가 아니다. vere Deus vere Homo 전체 육화, 십자가의 죽음, 현양 안에서도 그대로 관계되고 적용된다. 변화된 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영원한 그의 존재의 결정적 계시이다. 그분의 이름이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이름 위에 높여지는 것이 바로 영광이다. Phil 2,9(그리스도론적 찬미가).
그리스도론적인 숙고는 중립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항상 고백의 맥락 안에서 하나의 결단이 요구된다. 하느님 곁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현존)은 세상과의 관계도 내포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 우편에 즉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과도 관계를 갖고 있다. 지상의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와 함께 육화하시고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계셨던 예수가 현양되었다는 것은 이제 우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우편에 계시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이 세상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Jn 18,36(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지상의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 모두와 관계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나라는 비록 이 세상의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현존한다. 그리스도의 우월성, 초월성은 인간적 권능에 대한 최상급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적 권능과의 대조속에 나타난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보편적 구원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panta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세상의 모든 권한과 조화를 이루는 초자연적 능력에 관한 것이다. 이 세상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말적 권능이다. 쉽게 말하면 억압하는 권능이 아니라 해방시키는 권능이라는 것이다.
종말적 심판자에서 이야기하듯 어떤 선재의 그리스도론에서 이야기하듯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나자렛 예수의 얼굴(모습)을 그늘에 방치해 두어서는 안된다. 항상 그 얼굴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 얼굴을 명상하고 숙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없는 무익한 사변 무익한 공상에 우리 자신을 맡겨 놓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Christus presens의 의미를 종합해보면 Christus presens는 첫째 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나타낸다.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예수가 평화로이 쉬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과는 더이상 할 것이 없다. 우리 죽음에 대해서도 더이상 말할 것이 없다. 이러한 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양을 이해한다면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승천(하느님 우편에 좌정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현존은 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의 그리스도의 새로운 현존을 나타낸다. 새로운 현존이 이야기될 때 즉시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성령이 언급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성령 안에 현존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번째로 이러한 Christus presens는 거리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접근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떠나셨다는 식으로 승천을 이해할 때 잘못된 확인이다. 종교적 의미 안에서 하늘은 천체적인 자료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즉 시공간 안에 제약되어 있는 사람이 있는 곳과 하느님이 당신의 영원성 안에 존재하는 곳 사이의 구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서 시공간 안에 제약을 받고 있는 인간이 영원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향해서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서 기도를 바치고 그곳으로부터 축복을 빌고 축복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늘은 거리감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과 인간 사이의 접근과 친숙함을 나타낸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 하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Mt 28,20절에 의하면 예수가 “나는 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버지께로의 승천이 너희들과의 새로운 접근을 나타낸다.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주어져 있고 그분과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세번째로 Christus presens는 개별적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명, 공적인 직무, 공적인 인물을 나타내고 있다. 부활은 단순히 개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이 세상 모든 인류와 관계되는 것이다. 아버지 우편에 좌정하심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인물로서 예수에게만 해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직무를 함께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지상의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 사이의 지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영광의 그리스도가 이제 승천하신 다음에 새로운 직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직무를 지상에서 수행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공적인 인물로서 예수에 대한 부활 확인에서부터 부활과 이름의 변화가 연결되어 있다. 예수라는 이름이 사라지게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지상의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가 일치되어 있어야 된다는 의미에서 볼 때 남아 있어야 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미 Christus라는 칭호에 연결되게 된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 인류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인물로서 구체적으로 계시되고 하느님 우편에 좌정하셨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속성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그분의 고유한 칭호가 된다. 이 인물은 예수라는 인격, 정체성과 예수의 직무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칭호라고 볼 수 있다. Christus라는 칭호는 그리스도가 행사하는 구체적인 직무와의 일치 안에서 지적되는 인물로부터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외에는 다른 책들을 참조(예수와 역사, Kasper의 책, 라찡어의 책 등)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세속화된 세상이 크리스찬 신앙에 제기할 수 있는 그럴듯한 질문이다. 신에 대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아무런 향수도 없고 필요없다고 느낄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해서 오늘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특히 가난한 나라, 불의와 사회. 정치적 투쟁에서 제기될 수가 있다. 억압과 비참함, 고통의 상황 속에서 실제로 대부분의 많은 인류가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치루면서 소수의 사람들이 이익을 누리면서 생활하고 있다. 크리스찬 신앙에 의하면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부활한 나자렛 사람,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아직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고 있다. 부유한 사회, 아주 성숙된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 혹은 기아와 사회적 모순 속에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숙된 인간들은 하느님께 무감각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또다른 세상 모순, 비참함, 억압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이러한 불의 앞에 침묵을 지키는 하느님에 대해서 고발한다. 여기에 대해서 크리스찬 주장은 자신을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신이 믿는 신앙을 올바로 제기해야 한다. 성숙된 인간이 살고 있는 세속화된 도시,그리스도와 성인이 된 인간의 관계가 나타날 수 있고 그리스도와 인간성이 상실된 세상의 관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가지 구조의 세상 안에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크리스찬 세상과의 아무런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체험과 기다림과 분열과 고통 속에서 참된 인간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희망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교회로부터도 이러한 도전들이 제기될 수 있다. 또 그것은 당연하다.
교회로부터 선포되는 하느님 그분은 인간적인 표현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계시되지만 항상 숨어 계신 하느님이다. 인간의 말 안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지 않는다. 당신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만한 확신을 뒤흔들어 놓는다. 오로지 순종 안에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자극한다.
실제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교회는 말하지만 그 하느님은 우리를 버려두시는 하느님으로 인식된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의 부르짖음이 실제로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크리스찬도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진정으로 모르면서 살고 있다. 하느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으로부터 추방되도록 당신 자신을 버려 두셨다. 세상 안에서 무능하고 허약한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Bonhoeffer 말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돕고 계신다.
이 세상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나치의 희생제물이 된 Bonhoeffer는 이 세상 안에서 성숙한 인간이 제기하고 있는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문제를 종합해 주고 있다. 하느님의 부재와 하느님의 현존(실재)이다. 철학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자율성을 체험하고 있는 세속적 인간은 이성에 의해서 시작된 해방의 과정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현대 무신론은 하느님께 대한 반대, 하느님을 거스르는 논쟁, 反하느님 사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부터 구체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도주하고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삶으로써 그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서 점점 더 이 세상은 세상만을 강조하게 된다. 종교적인 특성, 거룩함의 특성은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다. 세상을 위한 책임은 인간 스스로 져야 한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Bonhoeffer가 말하는대로 하느님의 부재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신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의 전쟁, 기술 등 여러가지 인간 사회의 체험은 그러한 것을 통해서 해방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믿었지만 그보다도 더 또다른 형태의 더 잔악한 또다른 우상으로 전락되면서 비극적인 역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더 심해가고 있다는 것을 체험한다. 이성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모든 조직화와 조직에서부터 사회가 움직이고 그로부터 또다른 세밀한 조직화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인간과 완전히 다른 어떤 존재에 대한 향수가 나타난다. 인간과 경쟁하지 않는 그러나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러한 분, 고통 안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다. Bonhoeffer는 바로 여기로부터 그리스도는 위대한 사랑, 무한한 자비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불안케 하는 부재의 고통스럽고 희미한 표징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하느님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 사회는 모든 인간의 삶의 조건과 리듬을 변형시키고 있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가고 있다. 기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움직여지고 있다. 우리 사고방식 안에도 그러한 것이 들어와 있다. 그러한 기계적인 사고방식이 사상의 형태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 Homo faber. 기계문명의 주역이 되고 있다. 인간 자신이 기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멈추지 않으면 홀로 멈출 수 없다. 휴식 없이 생산만을 추구하는 계획된 인간. 사물로 환원된 인간. 여기에 학문에 의해 규정된 진리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 진리는 증명될 수 있는 구체적인 표징 하에 제시되고 있다. 정확성과 증명된 것에 진리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인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정복하려고 노력한다. 사회 분석에서 모든 것을 출발해서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인간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규정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인간은 불공평한 이러한 관계를 단절시키면서 지배계급의 실질적 이익을 폭로하고 변형하면서 이 세상을 정말로 인간화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추상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안에서는 구체적으로 억압받는 사람과 억압하는 사람, 구체적인 인간만이 존재한다. 내일을 위해서 투쟁하는 활동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것을 통해서 자신이 해방되기를 기대한다.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이론을 추구하게 되고 여기에 인간의 힘과 매력이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은 당신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 세속화되기 이전에 인간의 종교심의 공허를 단순히 메꾸어 주었던 하느님은 오늘날 사회에서 추방되고 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않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어리석게 보이고 과학적이 아니다. 지상적 해방의 과정에서부터 인간을 이탈시키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된다. 종교는 오히려 사후의 상급을 기다리게 하면서 해방을 단념케 하는 아편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이름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주장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모두가 일치해서 하느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있다. 성인이 된 성숙된 현대 고도로 발달된 인간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주인이 된 인간은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니체가 하느님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라고 광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의 의식 안에서 의심이 제기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결정적으로 하느님은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라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의심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정확성, 학문적 진리, 세속적 실천 등이 인간이 추구하는 절대적 수평선인가? 올바른 방향인가? 인간 세계의 이데올로기와 이론, 기술적 문명의 미완성에서부터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여러가지 요소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더 나은 조건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함의 의미를 심하게 느끼게 된다. 이러한 세속도시의 사건들 안에서 새로운 자극이 필요함을 인간은 느끼게 된다. 이러한 세속적 인간은 하느님께 대해 다시 말할 가능성을 추구하고 향수를 느낀다. 인간은 자신의 제한된 체험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모든 체험의 한계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깨우치는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일곱번째의 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삶의 주일- 죽음의 주일이 아니라 -, 철학의 축제, 이성의 축제가 아니라 삶과 생명의 날인 일곱번째날,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생각하게 된다. 크리스찬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날을 여기에서 제시하게 된다.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지금 현재와 다른 조국, 다른 운명을 선포해야 함을 느낀다. 시온의 귀양의 노래 형태를 취하는 이들의 선포는 이국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른다. Ps 137. 모든 인간 체험의 한계를 선포하는 노래이며 부활하시는 분에 기초한 희망이다. 항상 우리 눈 앞에 아른거리는 조국, 그러나 영원히 소유되지 못하는 조국이 어느날 인간의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허무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 안에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도주와 공포, 그분의 부재를 정당화하고 있는 반면에 이들과 정반대로 크리스찬의 주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제공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에서 스스로 죽어갈 때 그 시체 앞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 선포되고 현실화되는 그곳에 삶의 진정한 해방이 있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생명이 있는 곳에 삶의 축제가 열리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힘들지만 이 세상의 고통 안에서 머리를 쳐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크리스찬들이 힘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억압된 체계- 제3세계, 불의와 부정이 만연한 세상 -에서의 크리스찬의 주장. 오래전부터 사회문제에 대해서 말해 왔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비참한 것인가 하는 인간 의식이 드러난다.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인간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상황이다.
특히 남아메리카 신학자 구티에레즈의 해방의 신학이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러한 억압의 상황 안에서 크리스찬의 주장을 그가 말하고 있다. 비인간화된 세상의 상황을 말한다. 인간 존재의 권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 역사의 의식을 가질 수 없는,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나라와 나라, 한 나라 안에서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종속관계가 성립된다. 식민주의적인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으로 균형이 깨지고 있다. 가난한 나라를 한편으로는 도우면서 끊임없이 부족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정치적인 대가를 반드시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외적인 종속관계 안에 내적인 종속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체제나 모든 것이 일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특권을 어떠한 힘을 통해서든지 어떠한 체계를 통해서든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자신의 권리를 보장하고 허약한 다른 사람들에게 허약함과 공포를 유발시킨다. 하느님의 봉사자라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하느님을 이용하고 종교적 사실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의와 해방을 위한 투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하게 되어 있다. 권력 있는 자들을 고발하고 어떤 때는 비폭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간디같은 사람 -어떤 사람은 무기를 사용하고 어떤 사람들은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크리스찬의 가르침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크리스찬의 하느님은 해방의 하느님, 혁명의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급의 역사다. 인류 구원을 위한 신적 개입의 역사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이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선포되었다.
Tetulus crucis. 십자가의 죄목. 외적인 면에서 볼 때 단죄의 동기가 순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정치적인 동기 때문인 것으로 그들이 인식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 해방의 힘이 드러나는 것은 부활이다. 죽음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느님 나라의 수평선을 열어 주는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가 이루어지는 것은 부활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 주고 있다. 부활하신 분의 성령의 능력과 새로움은 새로운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새로운 창조, 새로운 인간이 표현되는 미래이다. 인간들 사이의 일치, 결속을 나타내면서 새로운 역사를 끊임없이 제시하고 있다. 크리스찬 메시지가 여기에서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죄에 대한 고발과 그리스도의 선포이다. 죄에 대한 고발과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 세상의 나라를 창조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의 선포를 나타낸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인간이 하나의 방편이 아니라 마지막 목적이 되는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나타낸다. 이러한 미래 도시는 하느님 나라의 수평선, 하느님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개방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모든 크리스찬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전체 인간, 온전한 인간을 나타낸다. 따라서 온전한 인간은 부활이 지적하고 있는 새로운 나라를 향해서 개방되어 있는 인간이며 역사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역사에서 제시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초월하는 역사 이상의 것을 향해서 개방되어 있는 인간이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우상화하지 않는 인간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절대성과의 관계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해방은 이 세상에 지금 현존하는 어떠한 것을 거부하고 제거하면서 이 세상에 지금 현존하는 것과 유사한 또다른 것을 도입하기 위해서 해방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 지금에 있는 불의를 다시 계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느님의 절대성과의 관계 안에서 고찰하게 된다.
크리스찬들은 자신이 크리스찬들이 살아온 과거의 유산들을 생활하면서 미래 앞에 펼쳐 있는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큰 희망을 향해서 열려져 있고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물론 끊임없는 비판적인 자세와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향하는 개방을 향해서 열려져 있는 긴장 사이에 있게 된다. 이러한 긴장을 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 세상에 충실하면서 다가오는 세상에 충실하는 것이 크리스찬의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개방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로 자유로운 창조적인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실현시킬 수가 있다. 그러한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할 공간이 아직도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부활하신 분의 성령의 힘이 현존하는 곳, 주님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고통을 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 세상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다. 모든 사람이 고통 안에 살고 있다. 소유하는데 있어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다. 소유하는데 있어서는 차이가 나지만 고통에 있어서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 모두 다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고 고통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면 하느님이 정의로우시다면 하느님이 올바르시다면 이 세상에 왜 고통이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면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역사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은 인간들이 흔히 질문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하느님과 악, 서로 조화될수 없는 두가지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 두개념 중에서 하느님을 제거하고자 한다. 이것이 비극적인 무신론의 주장이다. 하느님에게 있어서 핑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아우슈비츠 또는 히로시마를 본 인간의 눈은 하느님을 더이상 명상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의미를 갖는 것인가? 모든 것을 이 세상의 법칙에 환원시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의 문제 앞에 인간이 대답할 수 없고 인간의 무능력을 나타내고 인간이 항복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크리스찬들은 인간 정신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어떻게 보면 성서에 나타나는 욥의 해결이라고 볼 수 있다. 욥이 말하는대로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일그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 것이다. 나는 두눈으로 뵙고야 말 것이다. 내쪽으로 돌아서신 그분을 뵙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고통과 불의에 대한 아무런 저항 없이 세상의 고통과 불의를 단순히 정당화시키는 것이라면 그 신앙은 오히려 비인간적이고 불의에 의해서 나타나는 결실을 태어나게 할 것이다.
단념은 세상의 불의를 변화시키는 과제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다. 크리스찬 신앙이 단순히 신앙으로서 그것에 대한 반응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의에 대한 목마름을 갈구하면서도 고통의 마지막 뿌리까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랑하고 고통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스스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체념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 안에서 신비가들. 열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도사가 되는 것. 고통 등에 대해서 초연하고 초연한 것이지만 한편에서는 도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초연하게 나타나는 식으로 하면서 이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그대로 놔두면서 무감각하고 초연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바로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 아래서 크리스찬의 주장이 자신의 대답을 찾아야 한다. 여러분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연구했다면 거기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서 이런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도록, 적어도 거기에 대한 시도를 해보아야 한다.
세상의 고통을 위해서 십자가의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금요일에 일어난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 마르코 복음은 시편 22, 즉 Mc15,43(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의 신비 mysterium crucis에 대한 크리스찬 해석에 대해서 스캔들이 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하느님의 고통의 신학의 중심이 되고 있다. 교회에서는 이 부르짖음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신뢰적인 조건을 보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 시편이 신뢰적인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 시편이기 때문이다.
루가는 이러한 신뢰를 전혀 다른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죽어 가는 예수의 체험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마르코와 마태오에서는 엘리라고 부른다. 어떻게 보면 마태오와 마르코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 물론 신뢰를 나타내지만 – 격리된 모습을 나타낸다. 압바라고 부를 수 없는 신뢰적인 칭호가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 속에서 발설된 하느님의 이름이다. 죽어 가는 사람이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하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번민이 담긴 질문을 나타낸다. 역사의 모든 사람들이, 역사의 모든 고통과 사람들의 고뇌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로부터 퍼지고 있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바로 그분에게도 하나의 신비로 드러나고 있다. 아들이라는 의식 안에서 버려졌음을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의인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구약의 시편 저자의 사고방식과 그 안에서 심오한 모순 안에, 대조되는 안에 양극단 안에 놓여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은 버려진 사람들 중에 가장 버림받았고 역사의 모든 억압받은 사람 중에 가장 억압받은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저버림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봉헌으로 이것을 대답한다. 여기에서 절망이 아니라 의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루가에서 말하고 있는 엘리가 아니라 나를 낳아주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고뇌에 찬 왜 이것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그 모든 고뇌가 아버지의 손에 완전히 맡겨지고 의탁되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의 버려졌음에 대한 체험은 바로 그분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된다. 십자가의 예수는 지상의 모든 십자가와 일치를 이루면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봉헌을 통해서 당신의 고통을 실제로 살으셨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십자가의 의미.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고통과 저버림과 혹은 고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독 안에서 저버림 안에서 그러한 고독을 수동적으로 – 고통이나 고독 같은 것이 현대 사회의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데 – 받아들이느냐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고독이나 고통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의 근본적인 자세의 문제이다. 거기에 그 고독이나 고통에 수동적으로 종속되는가 아니면 내가 그 고통과 고독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극복하는가 하는 차이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 삶에 대한 자세가 그러한 면에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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