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버림받은 체험을 하면서 오히려 아버지 품안에 자신을 맡기고 신뢰하는 예수의 모습을 본다. 즉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는 예수를 본다. 여기서 하느님은 이런 아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계신가 ? 아니면 어떤 면으로 아버지의 고통이 심오하게 나타나는가 ?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 이미 이러한 이 세상에 아들의 파견 안에 아버지의 고통스런 모습이 나타난다.
마르 12,6 : 포도원의 소작인 비유. 이제 그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이 남았습니다.
요한 5,6 : 아버지께서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다. 이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상호 내재적인 관계가 있다. 나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내것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요한 16,32: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가 아니다.
고통의 절정 그 순간에 함께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나타난다. 고통받는 아들은 아버지의 고통의 신비를 계시한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내 주는 아버지를 본다(로마 8,32)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 아들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고통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봉헌하는 아들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서 기인하는 성령처럼, 그들과 일치되어 있는 아버지로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한다. 십자가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역사이다. 고통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고통을 선택하시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수동적 고통, 당하는 고통, 이런 불완전한 고통밖에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이 고통 당하실 수 없음을 주장하는 희랍사상에 대항해서 예수는 능동적 고통 사랑의 완전함에 대한 자유롭게 선택된 고통을 계시한다.
크리스챤의 하느님은 세상 밖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분의 변함없는 영원성, 완전성은 인간의 세상 고통에 무관심하고 고통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고통을 취하시고 능동적인 고통으로써 고통을 실제로 생활화하고 계신다. 여기서부터 세상의 새로운 삶이 열려진다. 성금요일에 인간 고통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임이 계시된다. 그분은 고통 안에 현존하시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고 인간을 위해 봉헌된 고통의 무한한 가치를 인간에게 보유하기 위해 항상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 하신다. 고통에 대해 이 세상에 격리된 사람들 반대편에 서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그들 안에 계시된 분이다. 고통 안에서 침묵을 지키지만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 따라서 세상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느님이며, 당신 자신의 고통으로 이 세상 모든 고통을 취하시는 분이다. 한마디로 사랑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신심주의적인 어떤 체념, 무신론적 반항에 대적해서 십자가의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일치해서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고통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고통의 가치를 부여하는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의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에게 고통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열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체험하고 하느님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하는 그런 주장에 대하여, 하느님의 침묵으로부터 버려진 것 같고 불의와 부패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오늘날 인간에게는, 십자가의 의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통 앞에서 무가치한 허무를 느끼게 되는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의 복음을 선포한다. 고통을 대항하는 고통,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고통을 제거해 주시는 사랑,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 그 사랑만이 우리를 해방시킨다. 기쁜 소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크리스챤들은 끊임없이 십자가의 신비를 선포한다. 이런 현재의 인간 상황에 대한 크리스챤의 주장에서 인간의 미래는 이런 고통이나 불의 부정 부패의 현실 앞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어떤 선택이든지 미래를 선택한다. 그에 따라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규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안에서 완전하게 확인되고 있는 분명한 미래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추가하고 도달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인간은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절망을 경우에 따라서는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절망은 미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미래를 현재에 존재하는 악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동할 때 이들에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이미 끝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고통스런 세상의 연속일 뿐이다. 이런 상황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무엇인가 ?
상대적 미래와 절대적 미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오늘날 살면서 이성적으로 머리로 미리 준비할 수 있고 미래에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상대적 미래라 한다. 현실의 가능성 위에 기초하고 계획된 미래,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나 성취하기 힘들지만 이미 무의식 중에 놓인 미래이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기다림이다. 현재가 미래로 확장되는 이런 형태의 미래는 오늘을 향해서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인간의 헛된 희망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절대적 미래는 우리의 가시적인 목적이 아니다. 완전히 계획될 수도 없고 준비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삶에 개입될 수 있으며 무한한 의미를 줄 수 있다. 인간의 계획대로가 아닌 측량할 수 없는 미래이다. 본연의 의미에서의 미래이다. 우리가 건설하기 위해 우리 손에 의해 계획되는 것이 아니다. 고유한 의미에서의 미래는 인간이 노력할 때 예기치 않게 인간 세상에 도래할 수 있는 천상의 미래, 천상 예루살렘을 나타낸다. 상대적 미래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으로부터 준비된다. 약속된 미래에 대한 힘으로써 현재의 삶과 지속적 투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혁명적 투쟁을 나타내는 맑스주의적 투쟁이다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계획되어 있고 단순히 현재를 선행하는 미래이다. 어떻게 보면 현재와 과거에 정말로 새로운 어떤 상황에 그 세상에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 미래를 주장하는 이론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으로써 역사 안에서 그 미래가 항상 끝난다. 현재라는 감옥에서부터 탈출하지 못하기에 미래에 대한 현재적 미래 앞에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죽음 앞에 그들은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를 절대적 미래와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한다. 유토피아적 수준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의 유한성은 절대적인 희망을 바라지만 그것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 역사를 초월하면서도 역사에 개입된 분, 절대적 미래를 계시해 주는 분, 역사에 개입하면서도 추월하시는 그분에서만 미래가 제시된다. 바로 그런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예수 그리스도는 버려진 채로 십자가 상에서 죽어 갔다. 그러나 예수는 절망 속에 죽어 가시지 않았다. 성금요일과 부활의 여명 사이에 모든 악과 어둠의 세력과 그 악으로 특징 지워져 있는 이런 상황 하에서 인간적인 기다림을 당신의 것으로 계시한다. 그런 기다림 안에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바로 신뢰의 모습이 드러난다. 십자가에 달린 나자렛 사람 예수의 희망이 절정이 된 것도 이런 위탁의 밤, 완전한 신뢰가 드러나는 어둠의 밤 안에서 드러난다.
희브 5,7 : “그분은 육으로 계셨을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으며 그분은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간곡한 간청과 기다림, 아버지 편에서 대답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죽음의 노예, 부르짖음과 눈물,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계시한다. 아들의 희망은 아버지의 희망은 나타낸다. 루가 15,11에 나타나는 아버지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은 아들의 영광 안에 모든 인류와 모든 아들들이 함께 화해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신뢰하고 있다. 크리스챤 하느님의 희망은 결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충만 안에서 태어남, 능동적인 희망, 모든 인류의 기다림을 포용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된 아들에서부터, 아버지에서부터, 성령에서부터 이런 희망이 솟는다.
빠스카의 삼위일체적 희망의 역사이다. 인간이 생활하는 이 역사 안에는 우리 삶을 변형시키고자 애타게 기다리는 삼위일체의 희망이 현존하는 역사이다. 크리스챤의 미래는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십자가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미래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확인하여 주고 증거하고 있는 부활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주는 영광이다. 아들의 희생을 받아들인다는 영광의 선포이고 십자가의 희생이 단순히 현대인의 희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희망한다는 능력에 대한 고백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그들 자신을 내어 주는 봉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헛된 것이고 우리 안의 믿음도 헛된 것이다라는 1고린 15,14의 말씀도 이런 맥락이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희망하는 인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인류에 대한 미래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로 나타난다. 이 세상의 절대적 미래는 역사 안에 일어나는 모든 가능성을 초월해서 부활하신 분이 현존하시는 미래로부터 보증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절대적 미래가 가치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절대적 미래로부터, 이 세상에서부터 깨어 있고 세상에서부터 과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불행 앞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것 같은 희망의 미래를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불의 앞에서 희망의 모습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 그 자체를 깨닫는 치명자로서의 자세, 치명자의 미래를 나타낸다. 부활하신 분으로부터 열려진 이런 절대적인 희망은 무엇보다 혁신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위대한 약속, 희망을 향해 열려져 있는 그것을 통해 모든 인간의 부조리와 죄의 상태가 제거되고 선포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이 역사의 수평선 위에 결정적으로 개방시켜 놓은 이런 인간 여정의 목적에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부활하신 분의 이해를 축소시키고 부활하신 분을 왜곡시키고 축소시키는 모든 것을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 따라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크리스챤들은 구체적인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고통스러움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를 행해 주장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빠스카의 사건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아직 아니라는 완성과 기다림이라는 긴장 사이에서 부활하신 분의 영광 안에 더욱 심취하고 더 들어가기 위한 과제가 부여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 분이 지적하신 미래를 향해 더 나아가고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정말로 참된 새로운 부활하신 분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부활하신 분의 여명으로부터 이 세상의 현존에 이르기까지 크리스챤들의 희망은 종말적인 그러한 긴장 안에서 역사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도래하는 선에 대한 확실성과 그것에 대한 기다림 안에서 살게 된다. 그런 미래를 향해서 깨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의 과제가 필요하다. 크리스챤도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 안에서 대림의 신비를 살게 된다.
Maranatha!(주여 어서 오소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챤 공동체의 신앙고백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절대적 미래 앞에 희망할 수 있는 확실성과 의미 부여, 모든 미래에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부활하신 분의 신학, 곧 십자가의 신학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 세상의 수난을 취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신비는 이 세상의 기초이며 약속이다. 따라서 크리스챤들은 오늘날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선포되는 이론과 절망과 거짓된 희망의 표징 앞에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고 전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신앙과 불신앙의 역사이다. 예레미아가 이렇게 하느님께 이야기한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꾀임에 넘어갔습니다.” 믿는 이는 자기 신앙에 대하여 항상 투쟁하게 되고 그 신앙을 숙고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도 끊임없이 과거의 사랑이 아니라 새롭게 나타난다. 우리의 삶 안에 개입하시며 우리를 정복, 물리치시고 위로한다.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의 새로움을 자신의 힘으로 견디어 낼 수 없다. 우리가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빛을 하느님의 새로움을, 사랑을 있는 그대로 견뎌 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은 숨어 계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당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인도하고 신비 속에 끌어들이면서 당신 존재의 새로운 역동성을 깨닫게 해 준다. 인간 신앙과 희망 안에서 끊임없는 불안을 느낀다. 하느님을 나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 상대자로써 여긴다. 여기서 믿는 이의 조건이 규정된다. 진리를 단순히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서 ‘예’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거기에 대한 인격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느님께 대한 계시와 여기에 대한 대답, 즉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신앙은 사건과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바로 신앙 행위의 긴장이 나타난다. 신앙 행위의 마지막이 바로 당신 신비를 계시하시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신앙의 마지막 대상인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런 하느님을 중재하는, 역사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을 통해, 즉 이런 중재자들을 통해 알게 된다. 신앙에 동의를 하게되는 이런 것들은 그 중재 역할을 하는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말과 업적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나타낸다. 불완전한 인간의 형식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의 언어, 말씀, 교회형식, 개념들을 넘어선다. 따라서 이것을 바라보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는 늘 긴장관계가 나타난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계시하고 당신의 심오함을 더욱더 알아 듣게하고 인간을 당신의 신비에 끌어들일수록 인간의 중재는 더욱 부족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즉 더욱더 감추어진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내가 어떤 개념으로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과 내가 이런 신비를 깨닫는 것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오게 된다. 여기에서 신학의 연구가 태어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고 사랑하는 열정은 불안으로 나타난다. 거룩한 불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지도하고 이성을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원의를 자극하고 당신 원의로 이끄신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서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분 앞에 드러나는 삶의 역동성을 느끼게 된다.
예수 안에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계시를 통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아직 이 하느님에 대해 내가 깨닫지 못한 그 심오한 부분을, 그 심취한 부분을 더욱 갈망하고 있다는 것과 내가 이미 소유한 부분과 소유하지 못한 부분 사이에서 긴장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신앙인은 그러기에 항상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는 것과 이미 하느님에 대해 체험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그런 긴장 속에서 살게 된다. 따라서 이런 신앙에서부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신비는 교회의 신앙이다. 교회의 신앙은 그렇기에 인간의 대표적인 구조와 그것을 숙고하는 신학과 일치되어 있다.
십자가상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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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버림받은 체험을 하면서 오히려 아버지 품안에 자신을 맡기고 신뢰하는 예수의 모습을 본다. 즉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는 예수를 본다. 여기서 하느님은 이런 아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계신가 ? 아니면 어떤 면으로 아버지의 고통이 심오하게 나타나는가 ?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 이미 이러한 이 세상에 아들의 파견 안에 아버지의 고통스런 모습이 나타난다.
마르 12,6 : 포도원의 소작인 비유. 이제 그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이 남았습니다.
요한 5,6 : 아버지께서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다. 이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상호 내재적인 관계가 있다. 나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내것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요한 16,32: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가 아니다.
고통의 절정 그 순간에 함께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나타난다. 고통받는 아들은 아버지의 고통의 신비를 계시한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내 주는 아버지를 본다(로마 8,32)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 아들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고통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봉헌하는 아들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서 기인하는 성령처럼, 그들과 일치되어 있는 아버지로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한다. 십자가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역사이다. 고통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고통을 선택하시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수동적 고통, 당하는 고통, 이런 불완전한 고통밖에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이 고통 당하실 수 없음을 주장하는 희랍사상에 대항해서 예수는 능동적 고통 사랑의 완전함에 대한 자유롭게 선택된 고통을 계시한다.
크리스챤의 하느님은 세상 밖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분의 변함없는 영원성, 완전성은 인간의 세상 고통에 무관심하고 고통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고통을 취하시고 능동적인 고통으로써 고통을 실제로 생활화하고 계신다. 여기서부터 세상의 새로운 삶이 열려진다. 성금요일에 인간 고통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임이 계시된다. 그분은 고통 안에 현존하시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고 인간을 위해 봉헌된 고통의 무한한 가치를 인간에게 보유하기 위해 항상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 하신다. 고통에 대해 이 세상에 격리된 사람들 반대편에 서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그들 안에 계시된 분이다. 고통 안에서 침묵을 지키지만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 따라서 세상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느님이며, 당신 자신의 고통으로 이 세상 모든 고통을 취하시는 분이다. 한마디로 사랑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신심주의적인 어떤 체념, 무신론적 반항에 대적해서 십자가의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일치해서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고통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고통의 가치를 부여하는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의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에게 고통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열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체험하고 하느님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하는 그런 주장에 대하여, 하느님의 침묵으로부터 버려진 것 같고 불의와 부패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오늘날 인간에게는, 십자가의 의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통 앞에서 무가치한 허무를 느끼게 되는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의 복음을 선포한다. 고통을 대항하는 고통,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고통을 제거해 주시는 사랑,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 그 사랑만이 우리를 해방시킨다. 기쁜 소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크리스챤들은 끊임없이 십자가의 신비를 선포한다. 이런 현재의 인간 상황에 대한 크리스챤의 주장에서 인간의 미래는 이런 고통이나 불의 부정 부패의 현실 앞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어떤 선택이든지 미래를 선택한다. 그에 따라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규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안에서 완전하게 확인되고 있는 분명한 미래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추가하고 도달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인간은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절망을 경우에 따라서는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절망은 미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미래를 현재에 존재하는 악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동할 때 이들에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이미 끝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고통스런 세상의 연속일 뿐이다. 이런 상황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무엇인가 ?
상대적 미래와 절대적 미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오늘날 살면서 이성적으로 머리로 미리 준비할 수 있고 미래에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상대적 미래라 한다. 현실의 가능성 위에 기초하고 계획된 미래,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나 성취하기 힘들지만 이미 무의식 중에 놓인 미래이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기다림이다. 현재가 미래로 확장되는 이런 형태의 미래는 오늘을 향해서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인간의 헛된 희망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절대적 미래는 우리의 가시적인 목적이 아니다. 완전히 계획될 수도 없고 준비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삶에 개입될 수 있으며 무한한 의미를 줄 수 있다. 인간의 계획대로가 아닌 측량할 수 없는 미래이다. 본연의 의미에서의 미래이다. 우리가 건설하기 위해 우리 손에 의해 계획되는 것이 아니다. 고유한 의미에서의 미래는 인간이 노력할 때 예기치 않게 인간 세상에 도래할 수 있는 천상의 미래, 천상 예루살렘을 나타낸다. 상대적 미래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으로부터 준비된다. 약속된 미래에 대한 힘으로써 현재의 삶과 지속적 투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혁명적 투쟁을 나타내는 맑스주의적 투쟁이다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계획되어 있고 단순히 현재를 선행하는 미래이다. 어떻게 보면 현재와 과거에 정말로 새로운 어떤 상황에 그 세상에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 미래를 주장하는 이론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으로써 역사 안에서 그 미래가 항상 끝난다. 현재라는 감옥에서부터 탈출하지 못하기에 미래에 대한 현재적 미래 앞에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죽음 앞에 그들은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를 절대적 미래와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한다. 유토피아적 수준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의 유한성은 절대적인 희망을 바라지만 그것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 역사를 초월하면서도 역사에 개입된 분, 절대적 미래를 계시해 주는 분, 역사에 개입하면서도 추월하시는 그분에서만 미래가 제시된다. 바로 그런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예수 그리스도는 버려진 채로 십자가 상에서 죽어 갔다. 그러나 예수는 절망 속에 죽어 가시지 않았다. 성금요일과 부활의 여명 사이에 모든 악과 어둠의 세력과 그 악으로 특징 지워져 있는 이런 상황 하에서 인간적인 기다림을 당신의 것으로 계시한다. 그런 기다림 안에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바로 신뢰의 모습이 드러난다. 십자가에 달린 나자렛 사람 예수의 희망이 절정이 된 것도 이런 위탁의 밤, 완전한 신뢰가 드러나는 어둠의 밤 안에서 드러난다.
희브 5,7 : “그분은 육으로 계셨을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으며 그분은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간곡한 간청과 기다림, 아버지 편에서 대답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죽음의 노예, 부르짖음과 눈물,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계시한다. 아들의 희망은 아버지의 희망은 나타낸다. 루가 15,11에 나타나는 아버지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은 아들의 영광 안에 모든 인류와 모든 아들들이 함께 화해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신뢰하고 있다. 크리스챤 하느님의 희망은 결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충만 안에서 태어남, 능동적인 희망, 모든 인류의 기다림을 포용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된 아들에서부터, 아버지에서부터, 성령에서부터 이런 희망이 솟는다.
빠스카의 삼위일체적 희망의 역사이다. 인간이 생활하는 이 역사 안에는 우리 삶을 변형시키고자 애타게 기다리는 삼위일체의 희망이 현존하는 역사이다. 크리스챤의 미래는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십자가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미래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확인하여 주고 증거하고 있는 부활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주는 영광이다. 아들의 희생을 받아들인다는 영광의 선포이고 십자가의 희생이 단순히 현대인의 희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희망한다는 능력에 대한 고백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그들 자신을 내어 주는 봉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헛된 것이고 우리 안의 믿음도 헛된 것이다라는 1고린 15,14의 말씀도 이런 맥락이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희망하는 인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인류에 대한 미래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로 나타난다. 이 세상의 절대적 미래는 역사 안에 일어나는 모든 가능성을 초월해서 부활하신 분이 현존하시는 미래로부터 보증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절대적 미래가 가치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절대적 미래로부터, 이 세상에서부터 깨어 있고 세상에서부터 과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불행 앞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것 같은 희망의 미래를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불의 앞에서 희망의 모습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 그 자체를 깨닫는 치명자로서의 자세, 치명자의 미래를 나타낸다. 부활하신 분으로부터 열려진 이런 절대적인 희망은 무엇보다 혁신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위대한 약속, 희망을 향해 열려져 있는 그것을 통해 모든 인간의 부조리와 죄의 상태가 제거되고 선포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이 역사의 수평선 위에 결정적으로 개방시켜 놓은 이런 인간 여정의 목적에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부활하신 분의 이해를 축소시키고 부활하신 분을 왜곡시키고 축소시키는 모든 것을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 따라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크리스챤들은 구체적인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고통스러움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를 행해 주장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빠스카의 사건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아직 아니라는 완성과 기다림이라는 긴장 사이에서 부활하신 분의 영광 안에 더욱 심취하고 더 들어가기 위한 과제가 부여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 분이 지적하신 미래를 향해 더 나아가고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정말로 참된 새로운 부활하신 분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부활하신 분의 여명으로부터 이 세상의 현존에 이르기까지 크리스챤들의 희망은 종말적인 그러한 긴장 안에서 역사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도래하는 선에 대한 확실성과 그것에 대한 기다림 안에서 살게 된다. 그런 미래를 향해서 깨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의 과제가 필요하다. 크리스챤도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 안에서 대림의 신비를 살게 된다.
Maranatha!(주여 어서 오소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챤 공동체의 신앙고백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절대적 미래 앞에 희망할 수 있는 확실성과 의미 부여, 모든 미래에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부활하신 분의 신학, 곧 십자가의 신학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 세상의 수난을 취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신비는 이 세상의 기초이며 약속이다. 따라서 크리스챤들은 오늘날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선포되는 이론과 절망과 거짓된 희망의 표징 앞에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고 전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신앙과 불신앙의 역사이다. 예레미아가 이렇게 하느님께 이야기한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꾀임에 넘어갔습니다.” 믿는 이는 자기 신앙에 대하여 항상 투쟁하게 되고 그 신앙을 숙고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도 끊임없이 과거의 사랑이 아니라 새롭게 나타난다. 우리의 삶 안에 개입하시며 우리를 정복, 물리치시고 위로한다.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의 새로움을 자신의 힘으로 견디어 낼 수 없다. 우리가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빛을 하느님의 새로움을, 사랑을 있는 그대로 견뎌 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은 숨어 계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당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인도하고 신비 속에 끌어들이면서 당신 존재의 새로운 역동성을 깨닫게 해 준다. 인간 신앙과 희망 안에서 끊임없는 불안을 느낀다. 하느님을 나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 상대자로써 여긴다. 여기서 믿는 이의 조건이 규정된다. 진리를 단순히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서 ‘예’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거기에 대한 인격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느님께 대한 계시와 여기에 대한 대답, 즉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신앙은 사건과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바로 신앙 행위의 긴장이 나타난다. 신앙 행위의 마지막이 바로 당신 신비를 계시하시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신앙의 마지막 대상인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런 하느님을 중재하는, 역사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을 통해, 즉 이런 중재자들을 통해 알게 된다. 신앙에 동의를 하게되는 이런 것들은 그 중재 역할을 하는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말과 업적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나타낸다. 불완전한 인간의 형식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의 언어, 말씀, 교회형식, 개념들을 넘어선다. 따라서 이것을 바라보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는 늘 긴장관계가 나타난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계시하고 당신의 심오함을 더욱더 알아 듣게하고 인간을 당신의 신비에 끌어들일수록 인간의 중재는 더욱 부족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즉 더욱더 감추어진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내가 어떤 개념으로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과 내가 이런 신비를 깨닫는 것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오게 된다. 여기에서 신학의 연구가 태어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고 사랑하는 열정은 불안으로 나타난다. 거룩한 불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지도하고 이성을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원의를 자극하고 당신 원의로 이끄신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서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분 앞에 드러나는 삶의 역동성을 느끼게 된다.
예수 안에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계시를 통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아직 이 하느님에 대해 내가 깨닫지 못한 그 심오한 부분을, 그 심취한 부분을 더욱 갈망하고 있다는 것과 내가 이미 소유한 부분과 소유하지 못한 부분 사이에서 긴장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신앙인은 그러기에 항상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는 것과 이미 하느님에 대해 체험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그런 긴장 속에서 살게 된다. 따라서 이런 신앙에서부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신비는 교회의 신앙이다. 교회의 신앙은 그렇기에 인간의 대표적인 구조와 그것을 숙고하는 신학과 일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