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인간학-은총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인간

 

1.2 은총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인간


A. 요 약


인간에 대한 인문과학적 성찰은 이중의 역설로 이끌려진다. 둘째는 첫째의 어두운 면이거나, 첨예화이다. 인간은 자신의 무한한 요청, 동경의 충만을 위해, 전통적으로 표현하면 ‘지복직관’에로 개방된 존재이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인간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행위의 기점을 갖는다.


인간이 이성적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을 지라도 자신의 수준을 능가하는 어떤 실재를 통해서 그 무한한 동경이 채워질 수 있다(extra nos)는, 그러나 동시에 이런 인간의 세계 개방성(Weltoffenheit)은 세계를 향해 개방(무한을 향해 초월적으로 지향)되어 있으나, 자신의 자아가 자신 안으로 이끌도록 폐쇄하는, 즉 세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자아가 세상과의 모든 연관성을 자신에게로만 고정시킬 위험성을 내포한다.(Egoismus – Egozentrismus)  이러한 자기 자신을 향한 왜곡에 대한 M.Luther의 사고는 죄에 대한 신학적 서술일 뿐만 아니라, 소위 인간적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이런 역설의 이중 구조는 다음의 식견을 가능케 한다.


인간은 충만에로 지향되어 있다. 그 근거는 간단히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구원에로 지향되어 있다. 그 근거는 그가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신학적 성찰을 앞당겨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은총을 필요로 하고, 그 이유는 그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은총에 대한 요청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B. 고 통


* 참고문헌:Johannes Brantschen  「고통이라는 걸림돌」  배영호역  성바오로


이러한 이중의 인간에 의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역설의 구조는 모든 인간학적 숙고를 쉽게 무위화 시키는 ‘무명의(소리없는) 고통’에 의해 그 골이 더 깊어진다. 자연재해, 질병 등 자연적, 운명적 고통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생겨나는 고통들.


Th. Adorno  “아우슈비츠 이후에 더 이상 시(詩)는 쓰여질 수 없다.”고 한다.  이 말과 연관지어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신학적 인간학이 쓰여질 수 없다”(하느님의 침묵 문제)  이런 현실에서 인간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① 우리는 아무리 작은 시도라도 고통으로부터 하나의 이론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고통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그러한 이론을 만들고 싶은 유혹은 항상 인간에게 있다. 왜냐하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찬미 받으소서”라는 주제가 그리스도교적 인간학 안에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성숙과정으로서의 고통, 자유와 내적 독립성을 위한 길로서의 고통,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위한 시련으로서의 고통, 하느님과의 만남으로서의 고통, 인간됨의 수용으로서의 고통(苦痛과 孤獨), 그리고 Thomas Aquinas의 표현대로라면 우주의 아름다움과 완전성의 요소로서의 고통 등등.  이러한 모든 것이 먼저 이야기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찬미 받으소서’라는 것의 변형으로서의 고통에 대한 신학적 언사들이다.(그러나 이런 언사들과 다음과 같은 질문 사이에는 현격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그렇게 그럴싸한 아름다운 고통을 말하는 네가 진정 그 고통을 받기를 원하는가 ?’)


이러한 신학적 언사를 통해 자칫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 있지 않다.’는 무의식 중의 자위가 자리잡을 수도 있고, 그런 언사 속에서 자칫 도덕적 당위성, 신앙적 요청을 내가 다 채울 수 없을 때 어떤 대상을 내 앞에 상정하고, 그러한 요청에 자신도 어느 정도 부응하고 있다는, 즉 나의 사치를 위해 어떤 사람을 도구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마음의 내적 사치)  예를 들면 집이 없어 떠도는 중국 교포를 과연 내 집에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수용소란 이름을 벗어나지 못한 월남 난민 보호소에 있는 그들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지. 전쟁과 기아에 의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② 이러한 고통 앞에서 신학적 인간학은 십자가가 있기에 오로지 가능할 수 있다. 이는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모범으로서 혹은 십자가의 신비 영성을 목전에 두고 그런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이 세상에서 하느님 행위의 실패(좌절)로서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에서 그렇게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고통이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은총에 관한 사신(使信,message)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면, 이는 오로지 하느님 행위 자체(인간을 조건없이 사랑한다는 예수를 통한 구원업적)가 이 세상에서 그것도 십자가에서 하느님 자신이 파견한 자인 예수와 함께 실패로 돌아갔기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를 부활시키심’은 이 실패를 역사적이고 외적으로 뛰어넘는 것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이를 ‘부활된 분’으로 자신의 실존을 걸고 고백하는 한에서 우리는 역사의 저편에서 실패를 극복했다는 것을 믿는 행위로 연결될 때 십자가는 나에게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감지된 어떤 것으로 나의 실존과 연관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실존적인 선택과 결단의 행위가 요청되는 것이다. (신앙고백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인간됨을 고백하고 수용하는 전인격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끊임없는 결단과 선택이 요청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이 예수의 부활이 역사의 저편에서 실패를 극복했다는 것을 믿는 행위일 때 십자가는 나에게 체화(體化)된다. 예수의 부활은 그렇기에 우리에게 증명할 수 있는 위로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를 제시해 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Das Dennoch ; Das Trotzdem)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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