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의미에 관한 물음(Sinnfrage)
인문과학들에 의해 견지된 인간적 현존의 구조에 관한 관점에서 의미에 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누구인가가 인간을 위해 인간 곁에 다가설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의 잘못된, 결핍된 구조물일 뿐인가 하는 질문으로 대변될 수 있다. 또 앞에서 언급한 고통에 관한 질문과 관련지어 본다면, 의미에 관한 물음은 ‘인간은 하나의 무의미인가’ ‘ 일종의 허무주의가 인간의 자기 체험과 자기 고백에 대한 유일하고 진솔한 대답일 수밖에 없는가 ?’ 우선 여기서 우리는 자주 즐겨 쓰는 믿음 아니면 의심이라는 양자택일의 결론은 피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실존적 양극성이 주어져 있고, 그에 따라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회의, 의심을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실존적 양극단성은 틀렸고 단편적인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다. 오로지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구원과 충만의 가능성’, 그 가능성 안에서,그 가능성을 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단순한 확신을 통해 그 가능성이 없어진 것인가 ? 혹은 그 가능성을 선물로서 밖에서부터 건네지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한 마음의 개방성은 인간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의미가 자기 아닌 외적인 것으로 다가설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D. 하느님에 대한 질문
이런 한에서 분명한 것은 ‘바로 여기가’(자기 외적인 어떤 것이 채워질 수는 없을까? 하는 point, 절대절명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자리), 즉 의미가 나 외의 밖에서 주어진다는 사실(extra nos)이 바로 은총에 관한 질문의 인간학적 장이다. 바로 그런 체험을 하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해야만 하는 인간은 늘 희망과 좌절, 자신의 가능성을 초극하는 선물과 자신을 거슬러 밀려 닥치는 무의미 사이에, 또 믿음을 근거로 한 자기수용과 총체적 소외와 우주의 모든 것의 무관심적 공허 안에 자리하는 고독 사이에, 또한 절대자에게 드리는 “흠숭의 기도와 자살 사이에”(Teihard de Chardin)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늘 강요받고 있다. 그 인간은 그 자신이 스스로 그 자신의 본질과 그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그 자신이 벌써 하나의 은총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그 자체로 하느님께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인간학은, 즉 은총론은 바로 이점을 고려한다. 신학적 인간학의 언사들의 형식은 바로 이런 인간의 자기 체험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언사들은 Luther적으로 표현하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제 인문과학의 분석은 오늘날 신학적 인간학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C. 의미에 관한 물음(Sinnfrage)
인문과학들에 의해 견지된 인간적 현존의 구조에 관한 관점에서 의미에 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누구인가가 인간을 위해 인간 곁에 다가설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의 잘못된, 결핍된 구조물일 뿐인가 하는 질문으로 대변될 수 있다. 또 앞에서 언급한 고통에 관한 질문과 관련지어 본다면, 의미에 관한 물음은 ‘인간은 하나의 무의미인가’ ‘ 일종의 허무주의가 인간의 자기 체험과 자기 고백에 대한 유일하고 진솔한 대답일 수밖에 없는가 ?’ 우선 여기서 우리는 자주 즐겨 쓰는 믿음 아니면 의심이라는 양자택일의 결론은 피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실존적 양극성이 주어져 있고, 그에 따라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회의, 의심을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실존적 양극단성은 틀렸고 단편적인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다. 오로지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구원과 충만의 가능성’, 그 가능성 안에서,그 가능성을 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단순한 확신을 통해 그 가능성이 없어진 것인가 ? 혹은 그 가능성을 선물로서 밖에서부터 건네지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한 마음의 개방성은 인간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의미가 자기 아닌 외적인 것으로 다가설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D. 하느님에 대한 질문
이런 한에서 분명한 것은 ‘바로 여기가’(자기 외적인 어떤 것이 채워질 수는 없을까? 하는 point, 절대절명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자리), 즉 의미가 나 외의 밖에서 주어진다는 사실(extra nos)이 바로 은총에 관한 질문의 인간학적 장이다. 바로 그런 체험을 하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해야만 하는 인간은 늘 희망과 좌절, 자신의 가능성을 초극하는 선물과 자신을 거슬러 밀려 닥치는 무의미 사이에, 또 믿음을 근거로 한 자기수용과 총체적 소외와 우주의 모든 것의 무관심적 공허 안에 자리하는 고독 사이에, 또한 절대자에게 드리는 “흠숭의 기도와 자살 사이에”(Teihard de Chardin)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늘 강요받고 있다. 그 인간은 그 자신이 스스로 그 자신의 본질과 그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그 자신이 벌써 하나의 은총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그 자체로 하느님께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인간학은, 즉 은총론은 바로 이점을 고려한다. 신학적 인간학의 언사들의 형식은 바로 이런 인간의 자기 체험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언사들은 Luther적으로 표현하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제 인문과학의 분석은 오늘날 신학적 인간학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