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이해지평 안에서의 은총과 자유-전통적 견해의 평가(Thomas Aquinas와)

 

4.1.3 Thomas Aquinas와 후기 Schola 신학


Thomas Aquinas와 Luther 시대까지의 신학 사이에 무엇보다 은총과 관련하여 몇가지 점을 말할 수 있겠다.  우선 우리의 작은 관심은 Thomas Aquinas가 작업했던 영혼의 본질 안에 서 은총과 신학적 덕들, 특별히 ‘애덕’(Caritas) 사이의 구분에 대한 관심이다. 이런 관심은 특히 14-15세기의 둔스 스코투스를 추종하는 Franciscan에 의해 주도되었고, 또 그들이 은총과 사랑을 거의 동일시하는 Augustinus적 전통을 고수했다는 사실에 모아진다. 이 은총과 사랑의 동일시 혹은 반대로 그것들을 구분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후기 Schola 신학은 은총을 ‘질’(質,Quality)로서,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상태’(狀態,Habitus)로서 파악하는 은총에 대한 사고를 본질적으로 견지한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개관이  지니는 해석학적 이해의 오해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느님의 자유가 상태의 당위성 앞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인간이 은총의 상태에 있는데 또 어떤 은총의 상태로 끌어갈 필요가 있는가?) 대답은 단순하다. 즉 모든 것은 완전히 자유이신 하느님의 수용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의 상태와 사랑의 Habitus에 당위성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자신의 지혜 안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질서(Ordo)를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질서는 그런 당위성까지도 미리 예견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는 죄인들의 구원 가능성과 관련하여 낙관적인 견해들을 첨가한다.(오늘날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과 일맥상통)  하느님이 죄인에게 자신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는 한에서 죄인 역시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낙관론자들은 이러한 수용의 이론을 통하여 Pelagianismus의 혐의를 벗어난다. 즉 죄인이 자신으로부터 탈피해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이 그에게 남아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밖’이요, 하느님이 미래를 주관하시는 자비의 질서(Ordo)라는 것이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 하느님의 여지, 하느님께 유보된 것, 하느님의 영역)




***“뜻 밖” → 하느님의 영역


삶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아닌 것’이라고 역설적인 대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삶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삶에 대한 명쾌하고 뚜렷한 답변을 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점점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죽음을 단순히  ‘Tod’라 정의하지 않고  ‘Groβe Trennung’(커다란 이별)이라고 정의한다면, 삶은 무엇인가와 점점 결별해 가는 것이며 끊임없는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 자체를 우리는 ‘아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生卽苦)  역으로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Aristoteles가 말한 ‘현실태와 가능태’(現實態와 可能態)란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시킨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그리고 현실태에서 또 다른 가능태로 전이되어 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또 다른 변화된 현실태를 위해 개방되어 있기에 인간은 ‘절대적인 미래 지향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각과 사고가 무한과 영원을 지향하지만, 인간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제한된 부분이다. 즉 인간은 시공이라는 제약성 속에서 ‘실존적 한계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또 다른 아픔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여러 가지 가능태 속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즉 각기의 가능태마저 주어지는 결과로서의 현실태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한 편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만 매몰되어 포기했다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선택했다는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에 중점을 둘 때 선택은 또 다른 ‘만남’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는 결단과 선택이면서도 동시에 끊임없는 만남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도 시공의 제약성 속에서 자신이 계획하고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는 내가 과거에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가치를 위해 선택할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의 의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삶 전체의 총체적인 의미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Sinn im Ganzem)***




이처럼 총체적인 면에서 보면 고전 Schola 학문과 비교해 은총 이해에 있어서 차이점은 신학적이고 해석학적이며 더 나아가서는 사목적인 가치, 즉 은총 개념 자체에 대한 개념적 분석에 더 우위를 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전이 결국 여러 오해(개신교와 가톨릭의 상호간 감정적인 반대 표명)에서 기인된 것이기에 후기 Schola의 제 발전들은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기 Schola의 기본 관심사, 즉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유와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절대적으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파악한 것은 정당하고 올바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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