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권의 선언들(상)

 

12장 교도권의 선언들




        은총에 관한 공의회의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제16차 카르타고 공의회(418년), DS 225-230


        Idiculus(435-442년경), DS 238-248


        제2차 오랑제 공의회(529년), DS 373-379


        트리엔트 공의회(1547년), DS 1520-1583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3-1965), 사목헌장 특히 13-17, 48, 65-66


        


        여기서는 트린엔트 공의회의 ‘의화에 관한 선언’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화에 관한 선언’은 의화의 준비로서 5-6장을, 그리고 그 완성에 대해서 7장에서 다룬다.


        


        은총은 처음부터 필요한 ‘선행하는 은총’(DS 1525)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은총은 인간의 모든 주도권을 앞서기 때문이다. 마치 하느님의 순수하고 무상적인 자비처럼 모든 인간의 공로에 앞서기 때문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은총을 ‘영감’ ‘성령의 건드림’ ‘조명’ ‘부르심’이라는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선행하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도 한 인간이 믿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세미펠라니즘을 반대하는 입장(DS 1553)은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의 재확인이다. 아울러 가톨릭 신학을 반대하는 프로테스탄 신학의 세미펠라니아니즘적 고발에 대처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은총에 대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는 ‘동의’하거나 ‘협력’하여야 한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다. 의롭게 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DS 1554-1555) 인간의 자유 의지의 수동성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의견을 단죄하고 있다. 분명 트리엔트 공의회는 은총에 대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 의도가 아니었다. 공의회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은총에 대한 동의와 협력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거부의 능력으로도 생각되고 있다(DS 1554).


        6장(DS 1526)은 다른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두는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희망, 사랑의 시작, 회개, 죄에 대한 혐오로부터 서서히 의화를 준비를 다루고 있다. 준비는 세례에 대한 열망으로 끝나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은 계명을 준수하는데서 이루어진다.


        can. 7조와 9조에서부터 의화 이전에 업적의 중요성, 선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선행적 활동은 악한 것도, 죄스러운 것도, 또 구원에 무용한 것도 아니다. 물론 이미 변화되거나 의화된 존재로서는 아니지만 의화를 향한 여정에서 좋은 것이다. 이러한 준비적 활동들은 의화를 이루는 공로가 되지 못한다(DS 1533)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준비에 이어서 의화가 7장에서 다루어진다. 공의회는 인간의 자유 의지 편에서 은총을 수용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적 쇄신이란 “은총과 선물들의 의지적 수용을 통해서 발생한다”(DS 1528)는 것이다. 의화된 인간의 삶은 매우 역동적으로 사유되고 있다. 은총은 인간을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성화, 신앙, 희망, 사랑으로 이끈다. 이러한 성장은 선행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나 그 선행은 단순히 의화의 결실이나 표징으로 사유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삶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DS 1535). 인간의 행위와 은총의 협력의 중요성은 계명의 준수에 관한 항목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명령하신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준수될 수 있고 준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DS 1536-1537).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계명을 준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선행들은 진정으로 좋은 것들이다(DS  1575). 무엇보다 의로운 사람들도 때로 경미한 죄를 범한다. 복되신 동정녀는 경미한 죄까지 허락되지 않는 예외를 이루고 있다. 마리아는 예외지만 모든 인간이 경미한 죄까지 완벽하게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DS 1573). 의로은 자들은 하느님과 보다 깊은 우정과 친교를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피할 수 없는 연약함이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14장과 15장에서 다루고 있다. 마지막까지 그 은총을 보존하는 항구성을 다루는 13장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특히 14장은 은총과 협력하는 만큼, 또 은총에 응답하는 만큼 인간의 자유 의지와 행위의 가치, 그리고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그 보상에 관한 언급이 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은 그러한 공로에 대한 보상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약속이다(DS 1545). 그렇기는 하지만 활동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장점이 된다. 왜냐하면 머리이시고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완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공로와 주요 근거와 강조점을 은총에 두고 있다. 인간의 ‘정의’를 통하여 죄의 용서, 성화, 내적 쇄신,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이 수용되고, 의롭게 된 우리 자신들은 하느님의 법을 성취하게 된다(DS 1546). 우리의 정의, 공로조차도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로 이해되고 있다(DS 1547). 한편 예정에 관해서 12장(DS 1540)에서 언급하고 있다. 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특별한 계시없이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예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DS 1565에서는 어떤 사람이 예정된 사람들의 수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물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의 문제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단지 모두를 위하여 필연적인 그리스도의 구원적 죽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DS 1521-1523).


        교회 교도권은 바유스, 코르넬리오, 얀세니오와 더불어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은총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해설해야 했다. 비오 5세는 1567년 10월 1일 회칙 Ex omnibus afficitonibus를 통해서 바유스의 이론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의 의도는 분명하지가 않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인노첸시오 10세가 얀세니오를 단죄하는 데서 드러난다. 얀세니오는 극단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를 표방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즐거움에 이끌린다. 원죄 이후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그 선택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사욕편정이나 은총으로부터 이끌린다. 사욕편정에 의해 악으로, 은총에 의해 선으로 이끌려진다. 의지는 보다 강한 경향의 지시 안에 선택되고 두가지 경향이나 기쁨이 동일한 힘을 지닌다면 어느 것도 선택되지 않는다. 은총은 사욕편정에 대해 승리한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항상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은총이 결여된 상태에서 인간을 죄를 짓지 않거나 단죄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그의 은총은 사람에게 선사해야할 의무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사실 모두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으신다. 단지 예정된 자들에게 줄 뿐이다.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가 원죄의 탓의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다.


        얀세니오에 대한 단죄조항 5가지는 은총은 결코 강요적이지 않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동의나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최소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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