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권의 선언들(하)

 

은총과 자유에 관한 논쟁은 그 후 계속 되었다. 특별히 조력 은총에 관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도민고회의 바네스와 예수회의 몰리나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오랜 두 수도회의 갈등과 대결이기도 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만일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을 틀림없이 구원에로 효과적으로 이끄심이 분명한데 그러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해서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1588년 몰리나의 책 [Concordia liberi arbitrii cum gratiae donis]이 발간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 1607년 9월5 바울로 5세 교황은 서로를 이단으로 고발하는 경쟁을 금지하였다. 이 논쟁은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교육적인 효과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의화에 자유에 대한 큰 주제들을 분명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많은 부분을 앞선 교도권을 재확인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전통적 이론을 환기시키면서, 특히 성서적 용어를 상기시키고 있다. 단지 보편적 구원의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자유에 관한 개념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17항을 할애하고 있다. “인간은 오직 자유로써만 선을 지향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이 자유를 높이 평가하고 열심히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자유를 잘못 옹호한다. 자신을 즐겁게만 하는 일이라면 악이라도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방종까지도 자유라고 옹호한다…. 인간의 자유는 죄로 손상되었으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의 지향을 완전히 행동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은 각기 행한 선악을 따라 하느님의 법정에서 일생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사목헌장의 구조를 보면 공의회 교부들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16항에서는 양심의 존엄성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17항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의 자유에 대한 성서적 전망을 다루고, 이어서 자유 의지의 선택의 능력, 그리고 마침내 자유와 윤리적 인식의 연결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적 구원 의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모상인 만큼 인간에게 실제적인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자발적인 추구의 발판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하느님께 향한 정향성은 오직 은총의 도움으로 효과적이 된다. 공의회 이러한 정신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2항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새 인간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이 항은 인간의 소명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소명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간주된다. 자유은 응답의 근본적인 능력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는 대화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로의 부르심이라는 보편성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이해하도록 한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교회헌장 14항-16항을 살펴보도록 한다. 14항은 가톨릭신자들, 예비신자들, 그리고 15항에서는 비가톨릭 신자들인 그리스도인들, 16항에서는 비그리스도인들을 다루면서 그들이 구원될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교회에 속하게 되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의회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이 백성은 단일, 유일한 백성으로 머무르며, 모든 세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확장되어, 시초에 한 인간 본성을 만드시고 흩어진  당시 자녀들을 마침내 한데 모으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성취시켜야 할 것이다(요한 11, 52)….. 하느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 평화를 미리 보여주고 촉진하는 것이므로, 가톨릭 신자이건, 다른 그리스도 신자이건, 혹은 달리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도록 불린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이 이 일치에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교회헌장 13항).


        교회의 소속됨과 하느님께 정향됨을 구별된다. 그렇다면 비신앙인의 경우 구원되기 위하여 교회와의 연결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교회헌장 16항은 비신앙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보편성의 자취일 뿐이다. 13항에 의하면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파견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조,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보편적 구원과 상관한다.  토마스의 현실태와 가능태의 개념을 빌리면, 비그리스도인과 비신앙인들은 현실적으로 교회에 속하지 않지만, 가능적으로 교회에 속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백성에로 질서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세상 안에서 작용하시며 사람들을 구원의 보편적인 성사인 교회에로 이끄신다는 것이다(교회헌장 48항).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모두를 감싸 안는다. 그리고 모두 양심의 법에 복종하면서 구원될 수 있다. 바로 그들 안에 작용하는 은총의 도움으로. “자기 탓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탓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결국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16항).


        사목헌장 22항은 그 점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의 육화와 더불어 어떤 방식 안에서 모든 사람과 일치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보이지 않게 역사하는 은총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선의의 인간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육화의 보편적이고 구원적인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새롭게 인식되는 점은 어떤 성인도 은총을 거부하는데 자신의 고유한 탓이 아니라면 단죄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은총이 인간 각자에게 인격적으로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태도를 본받아 용서해야한다. 이 말씀에서 하느님이 항상 용서하시고 모두에게 그 화해를 제공하신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런 방식에서 예정에 관한 이론도 구원의 보편적 의지와 선포라는 기쁨 안에서 얻어낼 수 있다.


        선택에는 상이한 차원을 지닌다. 어떤 선택은 근본적이다. 마침내 하느님을 위하거나 또는 거스리거나 하는 근원적 선택이 있다. 이러한 선택은 근본적인 자유와 상관한다. 근본적인 선택만이 하느님을 위한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진정한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다른 선택들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교도권은 근본적 선택의 이론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잘못나갈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상과 같은 오랜 세기 동안의 교도권은 신학적 사변 안에서도 신앙의 권위적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하였으며,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의 절대성, 으뜸됨을 옹호하였다. 그러면서도 제2차 오랑제 공의회 이후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려는데 항상 주의를 기울여 왔음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정 문제와 보편적 구원 의지의 문제에 직면해서 교도권은 개방적 자세를 취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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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은총과 자유에 관한 논쟁은 그 후 계속 되었다. 특별히 조력 은총에 관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도민고회의 바네스와 예수회의 몰리나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오랜 두 수도회의 갈등과 대결이기도 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만일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을 틀림없이 구원에로 효과적으로 이끄심이 분명한데 그러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해서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1588년 몰리나의 책 [Concordia liberi arbitrii cum gratiae donis]이 발간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 1607년 9월5 바울로 5세 교황은 서로를 이단으로 고발하는 경쟁을 금지하였다. 이 논쟁은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교육적인 효과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의화에 자유에 대한 큰 주제들을 분명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많은 부분을 앞선 교도권을 재확인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전통적 이론을 환기시키면서, 특히 성서적 용어를 상기시키고 있다. 단지 보편적 구원의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자유에 관한 개념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17항을 할애하고 있다. “인간은 오직 자유로써만 선을 지향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이 자유를 높이 평가하고 열심히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자유를 잘못 옹호한다. 자신을 즐겁게만 하는 일이라면 악이라도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방종까지도 자유라고 옹호한다…. 인간의 자유는 죄로 손상되었으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의 지향을 완전히 행동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은 각기 행한 선악을 따라 하느님의 법정에서 일생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사목헌장의 구조를 보면 공의회 교부들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16항에서는 양심의 존엄성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17항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의 자유에 대한 성서적 전망을 다루고, 이어서 자유 의지의 선택의 능력, 그리고 마침내 자유와 윤리적 인식의 연결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적 구원 의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모상인 만큼 인간에게 실제적인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자발적인 추구의 발판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하느님께 향한 정향성은 오직 은총의 도움으로 효과적이 된다. 공의회 이러한 정신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2항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새 인간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이 항은 인간의 소명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소명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간주된다. 자유은 응답의 근본적인 능력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는 대화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로의 부르심이라는 보편성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이해하도록 한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교회헌장 14항-16항을 살펴보도록 한다. 14항은 가톨릭신자들, 예비신자들, 그리고 15항에서는 비가톨릭 신자들인 그리스도인들, 16항에서는 비그리스도인들을 다루면서 그들이 구원될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교회에 속하게 되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의회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이 백성은 단일, 유일한 백성으로 머무르며, 모든 세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확장되어, 시초에 한 인간 본성을 만드시고 흩어진  당시 자녀들을 마침내 한데 모으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성취시켜야 할 것이다(요한 11, 52)….. 하느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 평화를 미리 보여주고 촉진하는 것이므로, 가톨릭 신자이건, 다른 그리스도 신자이건, 혹은 달리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도록 불린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이 이 일치에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교회헌장 13항).

            교회의 소속됨과 하느님께 정향됨을 구별된다. 그렇다면 비신앙인의 경우 구원되기 위하여 교회와의 연결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교회헌장 16항은 비신앙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보편성의 자취일 뿐이다. 13항에 의하면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파견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조,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보편적 구원과 상관한다.  토마스의 현실태와 가능태의 개념을 빌리면, 비그리스도인과 비신앙인들은 현실적으로 교회에 속하지 않지만, 가능적으로 교회에 속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백성에로 질서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세상 안에서 작용하시며 사람들을 구원의 보편적인 성사인 교회에로 이끄신다는 것이다(교회헌장 48항).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모두를 감싸 안는다. 그리고 모두 양심의 법에 복종하면서 구원될 수 있다. 바로 그들 안에 작용하는 은총의 도움으로. “자기 탓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탓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결국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16항).

            사목헌장 22항은 그 점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의 육화와 더불어 어떤 방식 안에서 모든 사람과 일치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보이지 않게 역사하는 은총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선의의 인간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육화의 보편적이고 구원적인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새롭게 인식되는 점은 어떤 성인도 은총을 거부하는데 자신의 고유한 탓이 아니라면 단죄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은총이 인간 각자에게 인격적으로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태도를 본받아 용서해야한다. 이 말씀에서 하느님이 항상 용서하시고 모두에게 그 화해를 제공하신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런 방식에서 예정에 관한 이론도 구원의 보편적 의지와 선포라는 기쁨 안에서 얻어낼 수 있다.

            선택에는 상이한 차원을 지닌다. 어떤 선택은 근본적이다. 마침내 하느님을 위하거나 또는 거스리거나 하는 근원적 선택이 있다. 이러한 선택은 근본적인 자유와 상관한다. 근본적인 선택만이 하느님을 위한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진정한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다른 선택들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교도권은 근본적 선택의 이론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잘못나갈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상과 같은 오랜 세기 동안의 교도권은 신학적 사변 안에서도 신앙의 권위적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하였으며,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의 절대성, 으뜸됨을 옹호하였다. 그러면서도 제2차 오랑제 공의회 이후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려는데 항상 주의를 기울여 왔음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정 문제와 보편적 구원 의지의 문제에 직면해서 교도권은 개방적 자세를 취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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