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이 잦은 냥창수 씨는 서울과 부산을 제 집 드나들 듯이 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부산 어느 골목에서 술에 만취해 쓰러진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냥 두고 할 수거 없어 마침 욱고 있던 막역한 친구집에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출장을 가면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점점 정이 들게 되었다. 늘 자신 있게 살아가는 아내에 대해서 불만이 많던 차에 양씨는 부산으로 가는 날이 잦아졌고, 그러다 김씨가 애를 갖게 되자 아예 집과 출장지가 바뀌다시피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절대 이혼은 해줄 수 없다며 딸과 함께 지금껏 혼자서 살고 있다.
양씨는 부산에서 만난 김씨와 함께 살면서 처음 얼마간은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도 점점 그런 사실에 무디어졌고, 딸과는 가끔씩 만나 서로 안부를 주고0받기도 했다. 그런 양씨가 가톨릭을 알게 된 건 지금 함께 사는 김씨 때문이었다. 김씨는 원래 심성이 곱고 착한 여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 술집에 나가게 되었었지만 양씨를 만나면서는 모든 걸 끊고 새 삶을 시작했다. 그가 몇 년 전에 세례를 받으면서 자꾸 권했던 것인데,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며 미루다가 하도 권하는 바람에 통신교리를 받고 있다. 그런데 김씨는 자신이 두 번째 부인이라는 얘기를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고 본당에서도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하지만 양씨로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고 자신의 처지로는 세례가 안 될 것 같아 편집실 문을 두드렸다.
아내 아닌여자와 사는데 영세가 가능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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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양창수 씨의 삶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장이 스스로 자기 가정을 파괴하면서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어려운 처지에 있던 김 여인을 도와주어 새 삶을 찾게 해준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아내의 자리까지 안겨주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올바를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인생에 방해가 되는 더 큰 굴레를 씌운 격이 되었고, 불만의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내를 배신함으로써 별거를 자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가족에 대한 가장의 책임은 마음대로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양씨의 처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김 여인도 말 할 수 없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양씨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양씨의 아이까지 낳아 동거함으로써 그의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가족들을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은 호적에 입적도 못하는 처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감사의 표시가 될 수는 없다.
양씨와 김씨는 서로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헤어져서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헤어지는 아픔은 크겠지만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면 서로를 놓아주어야 한다. 특히 양씨는 본 가정으로 돌아가 가장으로서, 자기 때문에 상처받은 가족들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한다.
김 여인이 어떻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의심스럽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에 양씨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씨와 동거하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면, 현재는 죄중에 살고 있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거중에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성사 역시 불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례성사는 “세례받을 의사를 표시하고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인의 의무를 충분히 배우며 예비신자 기간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을 인정받아야”하며,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도록 권유되어야”하기 때문이다(교회법 제865조 ).
김 여인은 자기의 불법 동거를 청산할 뜻이 없었다면 세례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교리공부를 하는 동안에 자신의 생활이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책임 있는 사람들과 진솔하게 상담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숨기고 세례성사를 받았다면 유효성과 합법성에 의심이 남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이나, 개인적으로 누리고 있는 심적 상태가 평온하다고 하더라도 김 여인은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정한 삶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씨는 현재의 처지에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없다. 비신자끼리의 혼인을 교회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법에 저촉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혼인 관계는 일남 일녀 사이에만 맺을 수 있다는 혼인의 단일성과, 한번 맺어진 부부의 인연은 죽음으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교회법 제1056조 참조). 현재 양씨는 혼인의 단일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잘못으로, 합법적인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다른 여인과 동거한다는 것은 간음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혼인과 성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양씨의 경우 현재 죄의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이 예견되기 때문에 세례성사가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
양씨가 김 여인과 살면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합법적인 부인과 이혼하고 김 여인과 재혼하는 것이다. 비신자끼리 혼인했다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 가운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는 일부다처주의나 일처다부주의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교회법 제1143조 참조). 그러나 이 방법은 이미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지만 양씨에게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혼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씨가 진심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할 수 있는 바탕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금의 생활을 정리하고 본 가정으로 돌아가 적극적인 의지를 앞세워 부부와 가정의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킨 그 신앙의 힘을 가족들에게도 전달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함께 누리는 복된 가정을 꾸미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양창수 씨의 삶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장이 스스로 자기 가정을 파괴하면서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어려운 처지에 있던 김 여인을 도와주어 새 삶을 찾게 해준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아내의 자리까지 안겨주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올바를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인생에 방해가 되는 더 큰 굴레를 씌운 격이 되었고, 불만의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내를 배신함으로써 별거를 자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가족에 대한 가장의 책임은 마음대로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양씨의 처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김 여인도 말 할 수 없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양씨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양씨의 아이까지 낳아 동거함으로써 그의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가족들을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은 호적에 입적도 못하는 처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감사의 표시가 될 수는 없다.
양씨와 김씨는 서로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헤어져서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헤어지는 아픔은 크겠지만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면 서로를 놓아주어야 한다. 특히 양씨는 본 가정으로 돌아가 가장으로서, 자기 때문에 상처받은 가족들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한다.
김 여인이 어떻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의심스럽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에 양씨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씨와 동거하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면, 현재는 죄중에 살고 있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거중에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성사 역시 불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례성사는 “세례받을 의사를 표시하고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인의 의무를 충분히 배우며 예비신자 기간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을 인정받아야”하며,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도록 권유되어야”하기 때문이다(교회법 제865조 ).
김 여인은 자기의 불법 동거를 청산할 뜻이 없었다면 세례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교리공부를 하는 동안에 자신의 생활이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책임 있는 사람들과 진솔하게 상담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숨기고 세례성사를 받았다면 유효성과 합법성에 의심이 남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이나, 개인적으로 누리고 있는 심적 상태가 평온하다고 하더라도 김 여인은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정한 삶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씨는 현재의 처지에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없다. 비신자끼리의 혼인을 교회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법에 저촉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혼인 관계는 일남 일녀 사이에만 맺을 수 있다는 혼인의 단일성과, 한번 맺어진 부부의 인연은 죽음으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교회법 제1056조 참조). 현재 양씨는 혼인의 단일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잘못으로, 합법적인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다른 여인과 동거한다는 것은 간음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혼인과 성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양씨의 경우 현재 죄의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이 예견되기 때문에 세례성사가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
양씨가 김 여인과 살면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합법적인 부인과 이혼하고 김 여인과 재혼하는 것이다. 비신자끼리 혼인했다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 가운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는 일부다처주의나 일처다부주의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교회법 제1143조 참조). 그러나 이 방법은 이미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지만 양씨에게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혼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씨가 진심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할 수 있는 바탕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금의 생활을 정리하고 본 가정으로 돌아가 적극적인 의지를 앞세워 부부와 가정의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킨 그 신앙의 힘을 가족들에게도 전달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함께 누리는 복된 가정을 꾸미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양창수 씨의 삶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장이 스스로 자기 가정을 파괴하면서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어려운 처지에 있던 김 여인을 도와주어 새 삶을 찾게 해준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아내의 자리까지 안겨주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올바를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인생에 방해가 되는 더 큰 굴레를 씌운 격이 되었고, 불만의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내를 배신함으로써 별거를 자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가족에 대한 가장의 책임은 마음대로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양씨의 처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김 여인도 말 할 수 없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양씨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양씨의 아이까지 낳아 동거함으로써 그의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가족들을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은 호적에 입적도 못하는 처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감사의 표시가 될 수는 없다.
양씨와 김씨는 서로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헤어져서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헤어지는 아픔은 크겠지만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면 서로를 놓아주어야 한다. 특히 양씨는 본 가정으로 돌아가 가장으로서, 자기 때문에 상처받은 가족들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한다.
김 여인이 어떻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의심스럽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에 양씨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씨와 동거하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면, 현재는 죄중에 살고 있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거중에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성사 역시 불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례성사는 “세례받을 의사를 표시하고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인의 의무를 충분히 배우며 예비신자 기간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을 인정받아야”하며,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도록 권유되어야”하기 때문이다(교회법 제865조 ).
김 여인은 자기의 불법 동거를 청산할 뜻이 없었다면 세례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교리공부를 하는 동안에 자신의 생활이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책임 있는 사람들과 진솔하게 상담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숨기고 세례성사를 받았다면 유효성과 합법성에 의심이 남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이나, 개인적으로 누리고 있는 심적 상태가 평온하다고 하더라도 김 여인은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정한 삶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씨는 현재의 처지에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없다. 비신자끼리의 혼인을 교회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법에 저촉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혼인 관계는 일남 일녀 사이에만 맺을 수 있다는 혼인의 단일성과, 한번 맺어진 부부의 인연은 죽음으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교회법 제1056조 참조). 현재 양씨는 혼인의 단일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잘못으로, 합법적인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다른 여인과 동거한다는 것은 간음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혼인과 성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양씨의 경우 현재 죄의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이 예견되기 때문에 세례성사가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
양씨가 김 여인과 살면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합법적인 부인과 이혼하고 김 여인과 재혼하는 것이다. 비신자끼리 혼인했다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 가운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는 일부다처주의나 일처다부주의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교회법 제1143조 참조). 그러나 이 방법은 이미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지만 양씨에게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혼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씨가 진심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할 수 있는 바탕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금의 생활을 정리하고 본 가정으로 돌아가 적극적인 의지를 앞세워 부부와 가정의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킨 그 신앙의 힘을 가족들에게도 전달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함께 누리는 복된 가정을 꾸미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양창수 씨의 삶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장이 스스로 자기 가정을 파괴하면서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어려운 처지에 있던 김 여인을 도와주어 새 삶을 찾게 해준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아내의 자리까지 안겨주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올바를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인생에 방해가 되는 더 큰 굴레를 씌운 격이 되었고, 불만의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내를 배신함으로써 별거를 자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가족에 대한 가장의 책임은 마음대로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양씨의 처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김 여인도 말 할 수 없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양씨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양씨의 아이까지 낳아 동거함으로써 그의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가족들을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은 호적에 입적도 못하는 처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감사의 표시가 될 수는 없다.
양씨와 김씨는 서로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헤어져서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헤어지는 아픔은 크겠지만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면 서로를 놓아주어야 한다. 특히 양씨는 본 가정으로 돌아가 가장으로서, 자기 때문에 상처받은 가족들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한다.
김 여인이 어떻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의심스럽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에 양씨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씨와 동거하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면, 현재는 죄중에 살고 있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거중에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성사 역시 불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례성사는 “세례받을 의사를 표시하고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인의 의무를 충분히 배우며 예비신자 기간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을 인정받아야”하며,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도록 권유되어야”하기 때문이다(교회법 제865조 ).
김 여인은 자기의 불법 동거를 청산할 뜻이 없었다면 세례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교리공부를 하는 동안에 자신의 생활이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책임 있는 사람들과 진솔하게 상담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숨기고 세례성사를 받았다면 유효성과 합법성에 의심이 남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이나, 개인적으로 누리고 있는 심적 상태가 평온하다고 하더라도 김 여인은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정한 삶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씨는 현재의 처지에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없다. 비신자끼리의 혼인을 교회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법에 저촉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혼인 관계는 일남 일녀 사이에만 맺을 수 있다는 혼인의 단일성과, 한번 맺어진 부부의 인연은 죽음으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교회법 제1056조 참조). 현재 양씨는 혼인의 단일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잘못으로, 합법적인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다른 여인과 동거한다는 것은 간음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혼인과 성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양씨의 경우 현재 죄의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이 예견되기 때문에 세례성사가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
양씨가 김 여인과 살면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합법적인 부인과 이혼하고 김 여인과 재혼하는 것이다. 비신자끼리 혼인했다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 가운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는 일부다처주의나 일처다부주의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교회법 제1143조 참조). 그러나 이 방법은 이미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지만 양씨에게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혼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씨가 진심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할 수 있는 바탕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금의 생활을 정리하고 본 가정으로 돌아가 적극적인 의지를 앞세워 부부와 가정의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킨 그 신앙의 힘을 가족들에게도 전달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함께 누리는 복된 가정을 꾸미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