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상담, 그리고 정신 심리 요법
질병과 고민의 의학적인 한 모델로서의 영적인 경향을 보는 것은 크나큰 혼란을 유발시킨다. 최근에 다수의 작가들이 위기 해결책, 문제를 해결하는 등등의 관점에서 영적인 삶과 성숙을 이해하는 ‘자살신학’이나 ‘구급차 증후군’으로 다양하게 서술한 것을 비난했다. 아직 신학 선구자에 대한 탐험(연구)와 치료적인 훈련(분야?)들은 명백하게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탐험(연구)의 긍정적인 면들을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부분적으로 세 가지 운동들을 강조함으로써 이 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첫째로 Jung과 비교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의 융계열의 전통의 공헌이다. 그의 대부분의 저작에서 C. G. Jung은 신학적인 강연한 사람들과 중복되는 것과 같은 해석과 이해의 범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서양에서 영적인 삶의 상실에 관하여 저술했다. 또한 한사람이 개인적이고 동시에 집단적인 무지한 사람, 그리고 아마도 거룩한 사람에 이를 수 있는 강력한 징표(상징)들의 필요성에 관하여 글을 썼다. 그는 어떤 신학자가 미신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을 바로 그때 미신의 중요성에 관해 저술했다. 만약 우리가 미신의 세상과 관계를 끊는다면 융은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으로 반박했다. 프로이드와 함께 융은 종교의 위험함을 보았다. 하지만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병적인 강박 신경증이었다. 융은 프로이드에 대한 비판에 관심을 기울였다. 즉 거기에 의심 없이 불균형한, 병적인 종교가 있는 반면에 이 인식은 그 자체로 모든 종교가 본질적으로 병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루고 있는 비판에 관심을 둔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에게는 프로이드나 융은 종교적 삶의 위험하고 미성숙하며 유아기적인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있다.
둘째로 R. D. Laing의 공헌이다. 랭은 정신 분열증과 그 가족에 대한 그의 작업을 통해서 영국의 정신병 치료계에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으로부터 그는 미침(정신 이상)과 신비주의(?)에 대한 개척자들을 탐험하는 데 감동 받았다. 아마도, 그는 우리가 미쳤다고 부르는 사람들이 아픈 것이 아니라 여행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미친 사람’은 현실의 새로운 차원들을 헤치고 나갔던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는 것 이상으로 본다(see). 아마도 그들은 실제로 박탈된, 우리가 멀쩡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정말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은 습관적인 자아의 한계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 즉 일상의 깨어있는 의식을 포함한다. 그것은 자기초월 즉 자아가 전체 인격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포함한다. 랭의 업적이후로 자기초월에 관한 긴장을 지향하는 소수의 정신요법의 학교(학계) 안에서 운동이 일어났다. 이 긴장(stress)은 영적인 전통들과 밀접한 치료 작업을 가져왔던 것이다.
셋째로 ‘casework(사회 복지 사업으로서의 생활 환경조사) 신학’의 공헌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나는 사목적인 상담 운동을 언급한다. 이것은 casework와 상담에 대한 통찰이 그리스도교의 신학으로부터 얻어진 통찰에 의해서 형성된 체제 안에서 적용된다. 영국에서 이 운동은 과거의 Frank Lake와 Clinical Theology Association, Robert Lambourne, William Kyle과 Westminster Pastoral Foundation 등등의 업적과 연계되어 있다. 사목 상담운동을 보다 자세히 보기 위기 이전에 나는 노트해 놓을 필요가 있는 세가지 중요점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첫째로 전문적이 사회복지사(? social workers)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인인 사람들 사이에서 늘어나는 것 같아 보이는 개인적인 casework의 인기가 그것의 가치를 의문시하고 있고 그들의 일에 대해 많은 정치적 이해를 향해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둘째로 교회와 정신의학사이의 대화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 매우 평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분야에서 일하는 간호원과 의사와 그 외의 사람들의 방대한 대다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셋째로 어떤 성직자는 상담분야를 물러남으로써 성지과 신학적 활동에 대해 그들 자신의 깊은 혼란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았다.
결국 우리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통찰, 뿐만 아니라 회피된 위험과 혼란, 어떤 만들어진 대조가 있는 분야와 관계한다. 이것들은 사목적 상담과 영적 지도 사이의 다른 점을 고려함으로써 가장 좋게 제시될 수 있다. 새로 나타난 사목적 상담의 서두주자에로 무비판적으로 뛰어든(비판한) 1950년과 1960대의 많은 성공회 교도들을 이끌었던 영적 지도에 연계된 학교의 붕괴로 말미암아 부분적으로 공백이 생겨났다. 1920년과 30년대에 F. P. Harton, Somerset Ward, F. G. Belton과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같은 그러한 이름과 관련된 신자들과 지도자들의 한 학교가 있었다. 1963년에 이 학교에 관해서 저술하면서 Martin Thornton은 이 학교가 ‘죽어 가는 신학적 전망’을 대표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관찰했다. 그러므로 사목적 상담운동이 발전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영적 지도에 있어 영원한 모델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목적 상담이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발전된 지도의 전통과 구별되는 4개 이상의 영역이 있다.(최소한 4개)
ⅰ) 영적 지도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핵심적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에 대한 견해, 하느님의 업적에 대한 이해, 인간 존재를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목적 상담, 그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체계(교계제도?)를 대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신학이나 신앙과는 관계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은 상담이 가지는 기능을 어긴다거나 포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ⅱ)영적 지도는 4C의 수도원 운동에로 회귀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이 융통성 있고 다른 시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어야만 했지만 그 역사적 신앙 전통 안에서 그것의 근본을 포기할 수는 없다 사목적 상담은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의존하기 보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어떤 요소들로부터 도출된 새 원칙(가르침)과 관계되어 있다.
ⅲ) 영적 지도는 직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적 공동체의 삶과 실제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의 중심은 교회와 성사이다. 이에 반해 사목적 상담은 보다 또 순수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함께 직무나 치료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ⅳ) 영적 지도는 우선적으로 문제해결 이나 감정적인 고통의 상태와 생활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위험성이 짙은 일이 아니다. 사목적 상담은 계속되는 그리고 성숙한 영적 삶에 있어서 긴 시간동안의 인도라기보다 문제의 매우 많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향이 있다.
물론 두 전통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많은 유사적도 있다. 하지만 영적 지도의 대안으로서 사목적 상담을 보는 사람들은 성직자이자 의사인 작고한 Robert Lambourne의 말을 상기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는 1970년에 과도하게 사목적 상담과 casework에 기초하였던 사목적인 직무(pastoral case)의 모델의 한계에 대해서 저술한 바 있다.
…다음 20년간 이 나라에서 요구되는 사목 상담은 전문적인 문제와 붕괴 방지로부터 획득된 개념상의 체계와 20열전 미국의 치료적이고 의학적이며 정신분석학적 모델들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불충분하게 증명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발전된 사목적 상담운동이 사회에 의해서 그리고 가정(가설)의 부분으로써 보여져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들의 윤곽을 그림으로써 그 다음 그들을 피하거나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유익한 삶에 이르게 된다. 사목 신학은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인간 진보의 관점에 의해서 과도하게 영향을 받아 왔다. 즉 의학적 치료의 전문적인 정체성(medical clinical professional identity)과 너무 밀접하게 어울린 ‘자살 신학’이었다.
영적 지도는 묘사(윤곽 그리기), 회피 그리고 문제들의 해결책의 훨씬 이상의 것들에 관한 것이고 casework나 혹은 상담 모델은 영적 지도를 정당하게 다룰 수는 없다.
아이러니 하게도 많은 성직자들이 사목적 치료를 위해서 casework의 모델들을 채용하고 있던 그 시기에 어떤 치료사들은 새로이 고전적인 영적 훈련과 전통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Theodore Roszak은 영적인 정체성과 전체성에 대한 탐구와 연관된 심리 치료의 미래에 관해 토론하였다.
인간 존재에 대한 우리의 미래상은 낙천주의자들과 비극적인 사람들의 이상하고 긴장된 혼합된 모습이 될 것이다.(역설에 관한 연구) 우리는 우리가 철저하게 ‘타락한’ 인간 상황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우리들의 마음(핵심)의 건강한 본성을, 그리고 원죄가 아니라 신의 모상으로서 인간 존재를 지속하기에 충분히 자주 성공하는 것과 초월을 열망하는 기원적인 광채를 가정하는 데에서는 낙천적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우리의 자주 변하는 자유 의지 안에서 더 낮은 목표와 덜 가치 있는 목적들에로 힘을 잘못 사용하는 가를 보면서 우리는 비관적이다. 미래의 심리치료는 본능적인 충동의 무익하고 괴로운 충돌 안에서가 아니라 잠재능력(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서의 긴장 안에서 영혼의 고통의 비밀을 찾을 것이다. 그것은 진화하는 미완성 동물로서 우리의 과제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경적인 무거운 짐(정신적 부담)은, 우리 가운데 선택된 소수를 제외하고, 우리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그리고 병리학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은 우리의 가능적인 신의 모상에 대한 앎이다. (우리가 신을 닮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는 것이다)
Roszak은 오늘날의 가장 압박하는 요구들 중의 하나가 과거의 영적 지혜의 재발견이라는 것에 관해 논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는 이 말들과 함께 위에서 인용된 문단을 끝맺는다.
모든 영적 훈련들이 지각함으로써, 초월하려는 의지는 영혼의 어두운 밤속에서 그 자체를 가끔 집중할 지도 모른다. 병은 심적인 긴장을 의미하고 심적인 긴장은 영혼의 가능성 있는 에너지이다.
Roszak은 심리치료가 노이로제의 파내는 것(연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개방하는 것과 관련된 ‘완성을 추구하는 미완성 동물’의 진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믿는다. 만약 이것이 그 경우라면 우리가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심리치료를 장려하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심리치료는 우리 사회 안에서 인간지각의 변형을 위해서 중요한 통로가 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 영적이고 구원적인 훈련에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캘리포니아에서의 방대한 경험을 토대로 한 Roszak의 진술로부터 심리치료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정당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강조해왔던 중심 포인트는 영성과 치료사이의 경계선이 점차적으로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Sir James Frazer이 관찰한 바대로 마술사와 의사가 가장 오래된 전문 분야(계급)를 만들었을 옛날에 그것들이(경계?) 있었듯이. 그러나 희미해진 가장자리에 대한 사실이 어떤 종류의, 훈련들의 단순화한 혼합주의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종교와 심리치료는 서로에게 비판적인 질문들을 요청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자라나는 우정이 그러한 질문이 쉽게 제기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때, 그들에 대한 응답이 종교계에서 자주 있는 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충실을 불러일으킨다.
1978년 치료사들과 성직자들의 그룹에 주어진 문서 안에서 Irene Bloomfield는 그녀가 제안한 바대로 종교와 심리치료가 투쟁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세 가지 영역을 분명히 하였다.
ⅰ) 종교는 개인이 겨냥해야만 하는 이상과 함께 시작한다. 치료는 그 혹은 그녀인 개인과 함께 시작한다.
ⅱ) 종교는 거룩함을 목적으로 한다. 치료는 오히려 전체성을 목적으로 한다. 이 전체성은 어두운 면 혹은 그림자와 대면하여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을 포함한다. 무의식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에 의해서 의식과 개인적인 자유, 종교적인 사람들의 영역에 주요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 사실을 무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사랑할 수 없다.
ⅲ) 종교는 자주 인 것이라기 보다(what is) 이어야만 하는 것(what ought to be)에 대한 긴장에 의해서 충실성을 장려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은 감정의 억압을 조장할지도 모른다. 특별히 분노와 성(性)의 분야에 있어서.
나는 Irene Bloomfield가 올바르게 투쟁의 어떤 영역을 확실히 했다는 것을 믿는다. 비록 그들이 종교와 심리치료 사이의 대화뿐만 아니라 토론의 더넓은 영역을 위해서 질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 종교 이상주의자냐 현실주의자냐? 종교가 확장하는 것은 개인적인 자유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그것이 넓히는 것이 인간의 가능성, 원죄 그리고 등등에 스트레스를 주는 것인가? 그러나 Bloomfield에 의해서 제기된 요점들에 대해서 답하는 한 글은 심리치료의 통찰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서 중요한 열쇠를 전해줄 것이다.(?)
ⅰ)의심 없이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성은 ‘인간본성’의 거부로서 거룩한 방법을 해석해 왔다. 그래서 한사람이 더욱 영성적으로 변할수록 그 사람은 더 인간적인 것을 벗어나게 된다.(덜 인간적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만 한다: 모든 영성이 이것을 수행하는가? 어느 정도 기업으로서의 영적인 지도 전체의 타당성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그리고 인간 전체에 대한 긍정적인 영성은 가능하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전체성과 성숙도와 함께 거룩함의 연상(관련)은 강생의 중요성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숙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단어 teleios(완전한)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성숙한’이나 ‘어른이 된’으로 번역된다. 물론 많은 영성 혹은 신앙심이 깊음은 미숙을 영속케하는 방법이다. 영적 지도의 중심적인 목적은 그러한 미숙한 종교의 제한을 넘어서서 사람들을 이끄는데 있다.
의학계는 같은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모두 너무 쉬워서 인공적인 세계, 문제의 기원되는 문화, 치료의 겟토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즉 그것은 종파의 겟토적인 삶과 마찬가지로 더 넓은 문화로부터 그의 구성원을 막는다.
ⅱ)다시, 의심 없이 많은 종교가 원시적으로 인간적인 무지와 외부의 강제의 힘을 무시하는 ‘자유의지’의 관점을 주장한다. (요즘 그러한 원시적인 교리가 신학자사이에서보다 정치가들 사이에서 더욱 보편화된 것 같다.) 반면에 ‘귀신들린 사람’, 구조적인 죄, 그리고 타락된 세상의 ‘공국들과 세력’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안의 긴 전통이 있다. 사실, 어떤 세상은 너무 결정론적인 것에 대해 종교를 비난한다. 만약 영적 지도가 진정한 해방과 진정한 자유에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라면 그것은 안과 밖으로 개인을 압박하는 현실에 직면해야만 한다. 그러한 비판에 응답하면서 많은 정신의학과 보편적인 의료활동은 정신병 약과 약품들을 통한 외부의 조종에 너무 지나친 신뢰와 함께 인간에 대한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관점에 대단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을 바꾸는 약품에 대한 오용을 반대하면서(남용이 아니라?) 심리 치료사 그리고 영적인 지도는 많은 보편적인 근거를 찾을 것이다.
ⅲ)다시, 많은 종교와 많은 영성은 사람들을 충성에로 고무시키지 않는다. 그러한 비판은 치료자가 대단한 충성과 신실함을 달성하는데 종교 공동체에 줄 수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도우려는 듯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모다 명백하게 보는 그리고 개인을 환영과 잘못됨을 꿰뚫어보게 도와주는 영적인 지도의 중심적인 목적들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 없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종교가 아편이상으로 하찮은 것이 된다는 위험은 매우 현실적으로 남아있다.
종교세계는 그자신의 독특한 방법에 있어서 진리와 충성에 대한 요구들을 모호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특별하지 않다. 교회 밖에서나 안에서나 상담하는 일은 한사람의 필요와 그 사람 자신에 대한 진리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David Brandon이 기록한 것처럼.
하나의 기피된 지역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방해하는(저지하는) 범위이다. 돕는 것에 대한 우리의 실행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의뢰인에게 주는 것은 우리의 깊이 느낀 공허를 감추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나는 자주 내가 완벽하게 내 자신에게 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도와 충고를 주는 것을 자주 경험해 왔다.(?들어 왔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돌보는 것은 절망적인 인간의 욕구를 감추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억제하는, 뿐만 아니라 벌주는 필요를 감출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부적당함의 사실 안에서 적당한’ 것을 찾을 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나의 직업적인 경력을 통해 나는 나의 의뢰인들에 대해 반대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계속되는 기만, 할 가치가 없음을 느꼈다.
결국 나에게 그것은 Irene Bloomfield가 정학하게 영성의 어떤 해롭고 병리학적인 나타남을 지각했다는 것처럼 보였다. 영적 지도자는 깊은 심리학에 대한 통찰로부터 배워야만 하고 배울 수 있다. 반면에 종교 공동체가 어느 곳으로부터 직면하는 통찰을 흡수하는 ‘스펀지’를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영적 지도의 전통이 치료와 도와주는 직업간의 대화에 공헌할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고려와 함께 이 장을 끝내려 한다.
첫째로, 전통은 현실성과 물질성안에서, 육화적인 신앙에 기초하는 인간의 완전(성실)에 대한 걱정과 세속의 악에 기인한다. 동시에 영성과 영적 지도가 어떤 형태의 그노시즘, 영적 엘리트주의, 남자와 여자의 일상의 삶으로부터 분리를 지도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리는 현존하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가 그들의 직무와 인간 성격과 은총의 업적들 의 물질적인 문맥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도는 하느님 나라의 운동 안에서 일어나는 육화적인 직무, 사회적인 직무이다. 치료와 상담과 같이 그것은 모든 시대에서 그노시스의 성격인 ‘육체의 두려움과 책략(동기, 정치?)’을 피해야만 한다.
둘째로 전통은 자신과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것들이 같지 않을 때 그들은 해결할 수 없게 엉키고 만다. 영혼이 근본적으로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Norwich의 Julian에 의해서 매우 명백하게 진술된 이 신학적인 믿음은 모든 영성의 마음에 있다. 우리는 단지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모상과 그 닮음 안에서 창조된 신의 모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요청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아는 방법은 자신을 아는 것에 대한 방법을 겪어야만 한다. 마치 최근의 치료의 접근들의 대다수처럼 그것은 영성신학에 있어서 중심적인 믿음이다.
셋째로, 전통은 영성적 삶의 위기와 투쟁의 장소를 매우 중요시한다. ‘어두운 밤과 영혼’과 마음의 투쟁은 영적인 삶의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어떠한 양의 연구 혹은 덕을 닦는 기술도 그것들과 대치될 수는 없다. 영적인 지도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업적에 마음을 열게 될 때 그리고 평화와 안전 안에서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구를 포기할 때 영혼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영적 지도는 내적인 평화가 아니라 동요와 대변동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에 관한 것이며 사람들을 이 필요성에 응답할 수 있는 한 홀로 진실된 전체성이 이르게 되는 진보를 준비하게 해주는 것에 관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