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마더 데레사
1. 전기 – 마더 데레사의 생애1)
1.1. 어린 시절 – 어머니의 모범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구 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에 있는 스코프예(Skopje) 에서 태어났다. 마더 데레사는 아버지 니쿨라 보야주(Nikola Bojaxhiu)와 어머니 드라나필(Dranafille)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알바니아인이었다. 마더 데레사는 태어난 다음날(8월 27일) 세례를 받고 아그네스(아녜스) 곤자 보야주(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니콜라는 건축업과 식료품 수입업을 함께 하고 있었으며, 유럽과 이집트 등 아주 먼 곳까지 여행을 다녔다. 아그네스 곤자의 3살 위 오빠인 라자르(Lazar)에 따르면 아버지 니콜라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집에는 방문객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열렬한 알바니아 애국자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가족 중에서 마더 데레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어머니인 드라나필이다. 어머니 드라나필은 가톨릭 신자로서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부지런하였다. 그녀는 매일 종교적 의무를 지키려고 애썼으며 아침마다 자녀들을 데리고 가까운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렸다. 이러한 종교적 모범과 교육은 후일 마더 데레사가 수도 성소를 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아가 어머니 드라나필의 깊은 신앙심은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모습 안에서 더욱 잘 나타났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거나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 옷을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 그리고 돈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야주의 집은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2) 뿐만 아니라 어머니 드라나필은 정기적으로 음식이나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를 도와 함께 길을 나서는 것은 아그네스 곤자였다. 이처럼 아그네스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보고 자랐다. 이것은 훗날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명을 가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이 확실하다.
아그네스 곤자가 9살 되던 해에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이 닥쳤다. 그것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아버지 니콜라는 알바니아 애국운동을 위한 정치 집회에 나간 후 빈사 상태로 집에 돌아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 후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집 한 채 뿐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공동 경영하던 사람이 재산을 횡령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수 제품을 파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해서 카페트에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녀의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역경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9살의 아그네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3)
1.2. 성소(聖召)
아그네스의 가족은 주로 알바니아인들로 이루어진 성심 교구의 성당에 다녔다. 거기에서 아그네스는 합창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어머니를 따라 레트니스의 세르나고레 성모 마리아 성지를 순례하곤 했다. 아그네스가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새로 본당 신부로 부임한(1925) 예수회 얌브렌코비치(Jambrenkovic) 신부였다.4) 얌브렌코비치 신부는 젊은이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에게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특별히 1924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인도의 벵갈 지방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의 활동은 어린 아그네스의 영혼에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18세의 생일을 앞두고 아그네스는 수도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내적 부르심을 다시 한번 강하게 느꼈다. 1928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아 세르나고레의 성모상을 마지막으로 찾아간 후 얌브렌코비치 신부의 도움으로 수도자의 길을 결심한다. 아그네스는 인도의 벵갈로 갈 결심을 한다. 그녀는 이미 벵갈에 파견된 예수회 사제들로부터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레토(Loreto) 수도회의 수녀들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5)
1.3. 로레토 수도원6)에서
1928년 12월 1일 아그네스는 본격적인 수련을 받기 위해 선교지인 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다질링(Darjeeling)에서 2년간 수련을 받았다. 당시 아그네스와 함께 수련을 한 부린 수녀는 “꿈 속에서도 영어 공부를 할만큼 열심이었다”고 회고했다. 아그네스는 1931년 5월 25일 첫 서원을 하고 수도명을 ‘예수의 아기 데레사’(리지외(Lisieux)의 성녀 소화 데레사)로 정하였다.7)
수련기간이 끝나고 데레사 수녀는 캘커타 시의 동쪽에 있는 엔탈리(Entally)지역에 있는 ‘성 마리아 학교’로 파견되어 17년간 지리와 역사 그리고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다. 1937년 데레사 수녀는 다질링에서 종신서원(終身誓願)을 하고 7년 후에는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이 된다. 데레사 수녀가 교장으로 있을 당시 인도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충돌로 도시가 마비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 때 수녀는 학생들을 위해 용감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8)
1.4.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엔탈리의 수도원 밖은 빈민가였다. 데레사 수녀는 가끔씩 성 데레사 학교에 파견 되기도 했는데, 학교로 가면서 빈민가의 현실을 목격했다. 이 때부터 데레사 수녀는 또 다른 부르심을 듣기 시작한다.9) 결정적인 계기는 1946년 9월 10일 다질링으로 피정을 떠나던 기차 안이었다. 데레사 수녀는 기차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거기에 응답했다.10)
그러나 데레사 수녀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을 교회와 수도원의 허가를 얻는데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이미 종신서원을 한 몸이며 나아가 그녀의 방향이 새로운 수도원의 창립에 있기 때문이었다. 1948년 4월 12일 교황 비오 12세는 데레사 수녀의 ‘수도원 외 임시 거주’를 허가하였다.11)
로레토 수녀원을 떠난 데레사 수녀는 파트나(Patna)에 있는 의료선교 수녀회(Medical Mission Sisters)를 찾아가 의학지식과 치료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녀는 빈민가 모티즈힐을 찾아가서 최초의 활동을 시작한다. 데레사 수녀가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이 빈민가에는 하수구가 모여 웅덩이를 이룬 저수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물을 마시고 그 물로 세탁을 했다. 또한 그곳에는 진료소도 약국도 학교도 없었다. 그녀는 먼저 학교를 연다. 그녀의 최초의 학교는 나무그늘 아래였으며, 나뭇가지를 들고 땅 바닥에 글씨를 쓰며 배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진료소도 개설하였다. 빈민가에는 곳곳에 결핵과 나병, 그리고 온갖 질병이 만연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하였다. 데레사 수녀는 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에 많은 이들, 특별히 그녀의 제자들(성 마리아 학교 시절)과 파트나의 의료진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모티힐즈에서 일을 시작한지 2-3주가 지났을 때 이미 데레사 수녀의 활동을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수녀가 빈민가에서 외롭게 홀로 활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활동 방법12)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의문의 소리들은 엔탈리의 로레토 수녀원의 원장의 귀에도 전해졌다. 데레사 수녀를 걱정한 원장은 로레토로 돌아오라고 권고했다.13)
평화로운 로레토로 돌아오라는 것은 데레사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데레사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신앙을 시험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경계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통해 하느님을 섬긴다는 자신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져갔다.
1.5. 사랑의 선교회
빈민가에서 학교와 진료소를 열어 활동하던 데레사 수녀는 시간이 갈수록 독자적인 장소와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1949년 3월 19일 ‘성 요셉 축일’에 옛날의 제자였고 훗날 ‘아녜스’라는 수도명을 갖게 된 스바시니 다스(Subashini Das)가 데레사 수녀를 찾아온다. 그날 이후 입회자는 차츰 늘어 갔다. 1950년 초 캘커타의 페리 대주교는 데레사 수녀가 이끄는 회의 활동을 승인하기로 결정한다. 수도회의 이름은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로 정해졌고, 275조의 회헌도 마련되었다. 사랑의 선교회에는 ‘청빈, 정결, 순명’의 일반적인 서원 이외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를 네 번째 서원으로 지켰다. 또한 사랑의 선교회의 수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야 하고, 둘째는 배우려는 자세와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셋째는 성격이 명랑해야 하며, 넷째는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
1950년 10월 7일 새로운 수도회 ‘사랑의 선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인가가 내렸다. ‘사랑의 선교회’ 회헌은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했으므로 이날부터 데레사 수녀는 정식으로 ‘마더 데레사’가 되었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죽어 가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보호시설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계기가 되는 사건들이 몇 가지 있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날 데레사 수녀는 협조자인 마이클 고메스(Michael Gomes)와 함께 약국에서 약품을 기증 받아 전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에 나무 밑에 비를 맞으며 웅크리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데레사 수녀는 저 사람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고메스에게 말했다. 이 둘은 전차가 멈추는 곳에서 급히 되돌아와 나무 밑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얼굴이 물에 잠긴 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의 죽음에는 최후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날 데레사 수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그 사건을 만난 후 데레사 수녀는 사람이 더 이상 홀로 절망 속에서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으며 그날의 그러한 다짐이 나중에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을 실현시킨 것으로 본다”고 마이클 고메스는 말했다.14)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랑의 선교회를 교황청 직속단체로 만들어 인도 밖으로 성장하는 길을 열었다. 현재 사랑의 선교회는 4천 5백 명이 넘는 회원과 1백 26개국에 5백50개 구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마더 데레사는 87회 생일 며칠 후인 1997년 9월 5일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는 9월 13일, 인도의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