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교회에서 아리우스가 일으킨 삼위일체 논쟁(三位一體論爭)이 니체아 공의회로 종식되었으나 4세기말경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논쟁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정확한 관계를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성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명백하게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안티오키아 학파 사이에 격렬한 신학 논쟁이 일어나면서 정통 교리와 이단 교리가 규명되었다. 4세기말경에 아폴리나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갖고 여기에 신의 정신이 첨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이단(異端)으로 단죄(斷罪)되었다. 그러나 이는 동방 교회에서 계속 영향력을 미쳐 몹수에스타의 테오도로는 아폴리나리우스의 교리를 반박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정신적으로 일치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도 후에 에페소 공의회(431년)와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에서 단죄를 받았다. 5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이 아니라 인간 예수를 낳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에 속하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치릴로가 반대하고 나서서 12개항의 파문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역시 반증을 제기하므로 이 사건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논의되어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단자로 정리되었고, 치릴로의 실체적 일치가 정통 교리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단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실체적 일치를 강조하고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지나친 반증은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을 출현시켰다. 이 견해는 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가 내세운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일치가 합치된 후에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어 없어져 버린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거부는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구원행위를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플라비우스가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단성론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디오스쿠루스는 단성론을 지지하여 449년에 에페소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옹호한 데 대해 교황 레오 1세는 이 집회를 강도 회의라고 규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실체적 일치를 주장하였다. 결국 그리스도 문제는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최종 결정을 보아 극단적인 치릴로의 주장과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과 구분이 없이 한 위격 안에서 일치된다는 위격적 일치가 정통 교리로 선포되었다. 칼체돈 공의회 이후로 서방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논쟁이 일단락되었지만 동방 교회에서는 단성론의 영향이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단성론이 이집트의 디모테오와 베드로, 그리고 시리아의 베드로와 필록세누스에 의해 전파됨으로써 동로마제국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여기서 황제(레오, 제논, 아나스타시우스)는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고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의 교리논쟁에 개입하여 단성론 경향의 칙서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단성론의 세력이 확대되기 시작하는 동로마 제구에서 쉬티아 수도자들은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을 다시 강조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칼체돈파와 단성론파의 화해를 주선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단성론적 입장을 갖고 있어서 결국 ‘삼장 논쟁’(三章論爭)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교황 비질리오의 동의가 없이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회하여 ‘삼장 논쟁’을 끝맺었다.
그러나 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에도 그리스도교의 논쟁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세르지오는 단성론파나 정통 교회를 화해시키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백하게 정의 내리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로 단의론(單意論)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단의론 역시 제 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면서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이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았다. (金聖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