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권 제 15장 헤롯이 이달리야를 떠나 유대로 와서 안티고누스와 싸운 것과 그 때 유대에서 일어났던 다른 일들에 대하여

 


제 15 장



헤롯이 이달리야를 떠나 유대로 와서 안티고누스와 싸운 것과 그 때 유대에서 일어났던 다른 일들에 대하여



 1. 로마의 지원을 받은 헤롯이 많은 유대인들을 누르고 승리함



  이때 헤롯은 이달리야에서 톨레마이스로 항해하여[㈜ 헤롯은 주전 40년 12월에 이달리야에서 항해를 하였거나 주전 39년 말에 했을 것이다<고대. 14권. 14 3, 5(379, 307> 주를 보라). 벤티디우스는 주전 39년 말에 예루살렘 근처에 있었다. 참). Debevolse, p.116. 헤롯은 안티고누스와 싸을 군대를 준비하려고 1년 반 이상 있었음이 틀림 없다.] 돌아와서 외국인과 자기 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적지않은 연합군대를 만들어 갈릴리를 지나서 안티고누스와 싸우려 하였다. 그는 실로와 벤티디우스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안토니가 헤롯을 복귀시키기 위해 보낸 델리우스(Dellius)가[㈜ 전쟁.에서 수정된 이름.] 그들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벤티디우스가 파르티아인들이 도시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정시키고 있는 동안 실로는 유대에 머물러 었었는데, 그는  안티고누스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헤롯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져서, 몇 곳을 제외하고는 전 갈릴리가 그의 편을 들게 되었다. 그가 마사다 요새에서 포위되어 있는 자기 친척들을 구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 가는 도중에 욥바를 지나게 되었  는데, 욥바는 자기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므로 그는 먼저 그 성을 공략하여 그가 예루살렘까지 진군하는 동안 후미에 강력한 세력을 적의 손에 남기지 않으려 하였다. 실로가 이를 기회로 떠났으며 유대인들이 그를 추격해왔다. 헤롯은 소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쳐서 쫓아버리고 겨우 버티고 있던 실로를 구해내었다. 헤롯은 욥바를 함락시킨 후에 서둘러 마사다에 있는 친척들을 구하였다. 그러자 지역주민들이 그에게 가세하였는데, 어떤  이는 헤롯의 아버지와의 정 때문이었고,[㈜ 안티파테르(Antipater)는 이두매인이었다. (8-10)을 보라.] 또는 헤롯의 평판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경우는 그 두사람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헤롯이 왕위에 오르리라는생각과 기대 때문이었다.



2. 헤롯과 실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안티고누스를 포위공격함



  헤롯이 큰 군대를 모으고 전진하자, 안티고누스는 그들이 지나는 장소에 함정을 파고 매복을 두어 공격하게 했으나, 적에게거의 타격을 주지 못했다. 헤롯은 마사다의 친척들을 구해내고 오레사[㈜ 다른 사본에 있는 \’레사\'(Rhesa, 또는 Rhysa)의 추정에 대해서는 (361)의주를 보라.] 요새를 함락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실로의 부대와 여러 성에서 끌어온 사람들과 합세하였다.[㈜ 본문은 약간 확실치 않다.] 그가 도시 서쪽 에 진을 치자 그쪽을 지키던 수비대가 창을 던지며 활을 쏘아대었다. 또 일부 병사가 무장하고 나와 헤롯 부대의 전열과 맞싸웠다. 그러나 헤롯은 병사들에게 먼저 성 앞에서 이렇게 외치라고 명령을 내렸다. 즉 그는 시민을 이롭게 하고 도시의 번영을 위해왔으며 그의 적에게조차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에게 행했던 적들의 모든 적대행위를 잊을 것이라고 했다. 안티 고누스는 헤롯의 말을 듣고 실로와 로마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개 평민인데다가 반쪽 유대인인 이두매 사람 헤롯을 왕위에 앉히려는 것을 유대 백성들은 결코 옳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유대 백성들은 관례대로 왕족에게 왕위가 물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나를 반대하여 내가 파르티아인들을힘입어 왕위를 차지했으므로 내게서 왕위를 빼앗아야 된다고 여기고 있다면, 이제 로마에 어떤 위법도 저지르지 않은 법적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자들이 많이 있고 또 그들은 제사장들이니, 그들에게서 왕위를 차지하는 기회를 빼앗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선행 본문(403, 404)에 나오는 왕권을 요구한 하스모네아인에 대해서는 전쟁. 에 첨가된 것이다. 거기에는 \’안티고누스가 (헤롯의) 이런 선언을 듣거나 배반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반 – 훈계를 발표하였다\’주 623과 주 626을 보라.]  안티고누스가 부하들을 보내 성벽에서 헤롯의 군대와 싸우게 했을 때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저주하였다.[㈜ 본문은 오해일 것이다. 전쟁은 더 알기 쉽게 \’즉시 헤롯이 자기 부하들에게 성벽 위에 있는 자들과 전투를 허락하였다\’로 나온다.] 그러나 안티고누스는 활을 쏘며 용감하게 대적하여 헤롯의 군대를 쉽게 망대에서 물러가게 하였다.



 3. 실로는 신뢰할 수 없는 헤롯의 동맹군임이 증명됨



  실로가 뇌물을 받아먹었음이 드러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티고누스에게서, (395)와 (412)를 보라.] 그는 많은 부하들을 시켜 물자가 부족하다는 불평을 터뜨리게하고 음식 살 돈을 요구하게 하고 안티고누스의 군대에 쫓긴 결과 도시 주위지역은 황폐하므로 겨울을 나려면 알맞은 시설이필요하다고 주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실로는 진지를 옮겨 후퇴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헤롯은 실로의 부하장군들을 재촉하면서 안토니와 원로원 그리고 가이사까지 자기를 지지하였기[㈜ 다른 (\’전쟁사\’에 있는 것처럼)에는 \’그에게 임무를 주었다.\’] 때문에 그들도 자기를 내버려두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말하면서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들을 알아보고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채워주겠다고 말하였다. 이 약속을 한후 헤롯은 지방으로 나아가 실 에게 후퇴하려는 구실을 주지않기 위해, 아무도 기대할 수 없었던 엄청난 물자를 거두어가지고 자신과 친하게 된[㈜ 또는 \’그에게 복종하게 된\’; appian, \’Bell. Civ.,\’v.75에 의하면 사마리아(그리고 이두매)는 마크 안토니(mark Antony)에 의해서 헤롯의 영역으로 통합된다. 참). Momigliano, \’Ricerche\’, pp.347-350.]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곡식과 술, 기름, 가축 등 모든 물건들을 여리고로 가지고 내려와 며칠 후에 그곳에 오게 될 군사들의 쓸 것이부족함이 없도록 조처하였다. 그러나 안티고누스 역시 이런 일들을 알아 차리고는 즉시 각지방으로 부하들을 보내어 식량 모으는 자들을 방해하고 습격하게 했다. 안티고누스의 명령을 따라 부하들은 무장한 채 큰 떼를 이루어 여리고 근처에 모여 언덕위에 자리잡고서 물자 수송하는 자들을 감시하였다. 헤롯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로마군 5개부대와 유대인 5개부대로 모두 10개부대와 연합용병 과 기병을 거느리고 여리고로 나아갔다. 그는 도시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언덕 위에 처자를 거느리고 있는500명의 사람들을 구해내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로마군인들은값진 물건들이 가득한 집들을 발견하고는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헤롯은 여리고에 수비대를 남겨둔 다음 돌아와서 로마군대를 그와 동맹한[㈜ 또는 \’그의 영토에 첨가시켰던\’은 앞의 주를 보라.] 지역, 즉 이두매,[㈜ 다른 본문에는(잘못된) \’유대\'(Judaea) ; 전쟁.에는 \’이두매\'(Idumaea)로 되어 있다.] 갈릴리, 사마리아의 겨울 진영으로 보냈다. 동시에 안티고누스는 실로에게 뇌물을 주어 그 부대의 일부를 롯다(Lydda)에[㈜ 현재는 룻(Ludd), 이는 야파(Jaffa)의 남동쪽 약 10마일, 참). 고대. 13권. (127) 주. Dr. Thackeray는 병행구절인 전쟁. 1권. (302)에 대해 언급을 한다. 이는 \’적절하게 로마 군대들의 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해 구상된 행위였다.\’] 주둔시키게 하고 안토니의 호의를 얻으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거기서 로마군은 무기를 놓고 호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주전 39-38년의 겨울 동안.]



 4. 헤롯의 군대가 갈릴리를 정복함



  헤롯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의 동생 요셉에게 보병 2,000명과 기병 400명을 주어 이두매로 보내고[㈜ 전쟁. 1권. 16 : 1(3030)에는 안티고누스를 우이해 반란을 막는\’이 첨가된다.] 자신은 마사다에서 나와 사마리아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갔다가, 갈릴리로  가서 안티고누스의 수비대에 점령된 몇몇 요새를 빼앗으려 하였다. 그는 눈보라 속에 세포리스에 도착했는데, 안티고누스의 수비대가 조용히 퇴각했기 때문에 풍성한 물자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동굴 속에 살면서 약탈하는 도적떼를 소탕하기로 마음  먹고,[㈜ 헤롯은 갈릴리에서 \’강도떼\’를 만났다. (159, 160)을 보라. 그러나 이 경우에 그들은 더 정치적인 적대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는 Otto가  \’Herodes\’, 30에서 말하고 있다.] 1개 기병부대와 3개 보병부대를 보냈다. 그들의 동굴은아르벨라(Arbela)라는[㈜ 현재는 키르베트 일비드(Khirbet Irbid) 이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서쪽 몇 마일되며 디베랴(Tiberias)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참). 고대. 12권. 11 : 1(421) 주, 자서. 24(118)에서 요세푸스는 그곳을 \’아르벨라(Arbela)의 동굴\’로 부른다. 후기 회당의 파괴는 그곳에서 아직 볼 수가 있다. 참). \’JPOS\’, 15(1935), p. 143에 나오는 E. Sukenik의 논문을 보라.] 마을에 아주 가까이 있었다. 40일 후 헤롯은 직접 전군을 지휘하였는데, 적의 대담한[㈜ 다른 본문에는 \’날쌘\’.] 공격으로 헤롯의 왼쪽부대가 무너졌다. 그러자 그는 일단의 무장한 병사를 거느리고 이겼다고 의기양양했던 적들을 공격해 물리쳐 도망가게 하고 도망갔던 자기 병사들을 다시 모아들였다.[㈜ 전쟁. 1권. (306)은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헤롯은 곧 우편에서 그의 군대를 돌렸는데 거기는 그가 지휘하는 부대였다.] 그는 적을 쫓아 요단강까지 이르렀는데, 적들은 서로 다른[㈜ 본문은 약간 라틴어에서 수정된 것이다.] 길로 도망하였다.[㈜ 전쟁. 1권. (307)은 그가 수많은 적들을 물리 쳤다고 첨가한다.] 헤롯은 동굴에[㈜ 추측컨데 아르벨라(Arbla) 근처.] 사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갈릴리의 모든 백성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 게 각각 150드라크마씩을 그리고 장교들에게는 상당한 돈을 주어 각자의 겨울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그때 겨울 진영에 있던 실로와 그의 부하장교들이 헤롯을 찾아왔는데 이는 안티고누스가 그들에게 식량공급을 한달동안만 해주었을 뿐 더이상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히려 주민들에게 명령해서 모든 지방의 식량을 거두어 언덕으로 피하여 로마군인들이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헤롯은 그의 막내동생 페로라스(Pheroras)에게 이들을 돌보도록 하고 알렉산드레이온을 요새화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페로라스는 병사들을 시켜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모으게 하고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알렉산드레이온을 복구하였다.[㈜ 병행구 전쟁. 1권. (308)에서는 실로(Silo)나 안티고누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단지 페로라스(Pheroras)가 헤롯 군대의 병참부의 책무를 맡는 것과 알렉산드레이온(Alexandrelon)을 요새화하는 것을 맡기로 명령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92)를 보라). Laqueur는 p.202에서 (418)이 전.쟁.에서 생략된 요세푸스의 원자료가 아니라 제 2차 자료에서 오히려 요세푸스 자신에 의해 후에 첨가된 것이며 이는 안티고누스를  믿을 수 없게 보이도록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5.헤롯이 동굴 속에 거주하던 갈릴리 도적떼를 격파함



  그때에 안토니는 아덴에 머물고 있었고[㈜ 안토니(Antony)와 그의 부인 옥타비야는 주전 39년 가을에 아덴(Athens)으로 갔다. 그는 아시아와 이달리아(Italy)로 간단한 여행을 하면서 2년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수리아의 벤티디우스는 실로에게 와서 파르티아인들과 싸우는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주전 38년 봄에 있었던(Pacorus와 싸우려고) 원정에 대한 설명은 Debevoise, pp. 116-120을 보라.] 그러나 벤티디우스는 실로에게 먼저 헤롯이 벌이  고 있는 싸움을 도운 다음에 동맹군을 몰고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굴 속에 있는 도적떼와 싸우기에 급했던  헤롯은 실로를 벤티디우스에게 보내고,[㈜ 전쟁. 1권. (309)는 \’기쁘게 보냈다\’로 되어 있다.] 자신이 직접 도적떼와의 싸움에 나섰다. 그 동굴들은 울퉁불퉁한 언덕에 있었으며   그 입구는 급경사진 절벽의 중턱에 있었고 뾰족한 바위들로 둘  러싸여 있었다. 그런 곳에 도적떼들은 가족들과 숨어 살고 있었 다. 헤롯의[㈜ 고대. 14권. 15 : 5(423-428)은 전쟁. 1권. 16 : 74(311)에 있는 동굴위로 공격한 간략한 이야기에 대한 상당한 부분을 첨가했다] 부하들은 언덕이 너무 가파로워 아래에서부터 기어오를 수도, 위에서부터 기어내려올 수도 없었기 때문에, 헤롯은 궤를 만들어 언덕꼭대기에 기계를 두고 여기에 쇠줄로 궤를매달아 내리도록 하였다. 궤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타고 있어 큰  갈고리를 가지고 있다가 그들에게 대항하는 도적들을 걸어 당겨  절벽 아래 내던져 죽이려는 것이었다. 궤를 달아내리는 것은 비록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워낙 깊은 계곡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궤가 아래로 내려지면,  적들은 아무도 동굴입구 가까이에 서서 덤비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포에 눌려 쥐죽은듯이 조용히 있었다. 적들이 감히 나오지 않고 지체하자 한 병사가 칼을 차고 궤가 매달린 쇠줄을 두손으로 붙들고는 동굴입구로 줄을 타고 내려 갔다. 그리고는 먼저  창으로 동굴입구에 서있던 적들을 뒤로 물러나게 한 후 긴 갈고  리를 마주하는 적에게 던져 그들을 절벽으로 내밀어 떨어뜨렸다. 그는 그안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여 많이 죽인 후 궤에 다시들어가 기다렸다. 절벽으로 떨어지면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들은 적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지 못하리라는 절망에 빠졌다.그러나 밤이[㈜ \’밤\’이 란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와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자 헤롯이 사자를 보내말을 전하자[㈜ 본문은 약간 수정되었다.] 많은 적들이 항복하고 복종하였다.[㈜ 전쟁. 은 반대로 \’한 사람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날도 같은 방법으로 공격하였다. 바구니에[㈜ 또는 \’구유\'(cribs). (423)을 보라,] 탄 병사들은 더욱 격렬하게 적들을 덮쳐 입구에서 싸우고 동굴안에 불화살을 쏘았는데동굴안에는 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곧 동굴이 불에 휩싸여 버렸다. 어떤 동굴에서는 한 늙은이가 그의 일곱자녀와 아내와 함께 문을 걸고 있다가, 처자식들이 적을 들고 나가도록 내보내 달라고 애원하자 그는 입구에 서서 아들들이 나오는 대로 칼로 베고는 마지막으로 그의 아내를 죽여 그 시체를 계곡으로 내던진 다음에 자신도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 버렸다.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헤롯을 비열한 인간이라며 저주하였다.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보면서 그의 오른손을 내밀어 그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으나 허사였다. 이런 방법으로 모든 동굴이 토벌되었다.



 6. 헤롯이 갈릴리에서 계속 승리함



  헤롯은 톨레미를 그 지역의 장관으로 임명하고 기병 600명과 보병 3,000명을 주어 안티고누스와 싸우도록 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보냈다. 그러나 톨레미는 그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는데, 갈릴리를 어지럽혔던 자들이 먼저 공격해와서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후 그들은 맨몸으로 늪지대나 추격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달아나면서 그 지역 전체를 약탈하였다. 이에 헤롯은 돌아와서 그들을 처벌하였고 폭도 중 일부는 살해하고 요새화된 곳에서 도망가 있던 자들을 포위하여 죽였으며 그 요새도 다 폐허로 만들었다. 이렇게 모든 반란을 진압한 후 헤롯은 그 도시들에게 100달란트의 벌금을 물렸다.



7. 헤롯이 로마장군 마카이라스 때문에 불평함



  그동안 벤티벤디우스는 파코루스를 죽이고 파르티아군을 패배시킨 후,[㈜ 다른 본문에는 \’참패시켰다.\’ 전투는 주전 38년 6월에 킬레스티카(Cyrrhestica)의 수리아 지역에 있는 긴다루스(Gindarus)에서 있었다. 고대 자료에 대해서는 Debevoise, pp.118-119, 97-100의 주들을 보라.] 안토니의 독촉을 받아[㈜ 누가 지금(주전 38년 여름) 수리아에 있었는지 (439)를 보라.668) 참). ] 마카이라스에게 2개 군단과 기병 1,000명을 주어 헤롯을 도우라고 보냈다. 그러나 마카이라스는 안티고누스의 초청을 받고 뇌물을 먹었으므로 헤롯의 반  대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정찰하려는 듯이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오는 의도를 의심한 안티고누스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돌을던지며 그를 막음으로써 그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자 마카이라스는 헤롯이 그에게 주었던 훌륭한 충고와 그가 헤롯의 충고를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닫고 엠마오성으로 후퇴하였다.[㈜ 참). 고대. 8권. (15) 주.]  그리고 자기가 받은 푸대접에 화가 난 나머지  마카이라스는 가는 도중에 만나는 유대인들을 적과 친구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해하였다.[㈜ 마카이라스(Machaeras)의 행동에 대한 설명은 전쟁. 1권. (317-319)의 병행구에서 발췌한 중요한 사항들과는 다르다. 전쟁에는 비통하게 헤롯을 불평하던 안티고누스가 마카이라스에게 뇌물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뇌물은 거절되었다. 채냐면 마카이라스가 벤터디우스(Ventidius)의 명령을 존중하였고 헤롯이 준 더 큰 뇌물 때문이었다. 안티고누스가 거절을 당한 후 마카이라스는 (헤롯의 충고가 건전아다고 뒤늦게 인식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부끄러워하며 엠마오(Emmaus)로 퇴각해야 했으며 헤롯과 재결합한다. 그는 도중에 만난 모든 유대인들을 죽였으며 심지어 헤로디안 조차도 인정을 봐주지 않았다. 오토(Otto)는 \’Herodes\’, p.31주에서 고대.에서 요세푸스가 두개의 모순된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반면 Laqueur는 pp.202-205에서 요세푸스는 안티고누스에 대한 적의에서 고대. 를  쓸 때 전쟁. 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티고누스에 관한 전쟁과 고대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전자는 그가 마카이라스에게 뇌물을 주지 못한 것이고, 후자는 그에게 뇌물을 주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대사\’의 반 안티고누스적인 번역은 분명치가 않다] 이 일에 격노한 헤롯은 사마리아로 가서 안토니에게 이 모든 일들을 알리고 또 적보다 자기에게 더 큰 해를 주는 그런 동맹국은 필요치 않으며, 그 자신만으로도 안티고누스를 충분히 무찌를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대조적으로 전쟁, 1권. (320)은 \’이런 행동에 화가 나서 헤롯은 적으로 마카이라스를 공격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자기 화를 억제하고 대신에 안토니 앞에서 그의 무법성을 비난하는 것에 착수한다.\’]  그러자 그와 함께 가던 마카이라스는 헤롯에게 가지 말라고 간청하면서 꼭 가야한다면 헤롯의 동생 요셉이 함께 안티고누스와의 싸움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헤롯의 형 요셉(Joseph)은 전쟁. 1권. (320)의 병행구에서 마카이라스가 언급하지 않는다.] 마카 이라스의 간절한 요청에 헤롯은 다시 화해하고 자기의 동생 요셉에게 부대를 거느리고 남아있게 하고 어떤 모험을 한다거나 마카이라스(Machaeras)와 다투지 말라고 그에 게 주의를 주었다.[㈜ 전쟁.에는 안티고누스(그의 신빙성 없음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마카이라스와 싸운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에게 가담하지 말라며 요셉에게 한 헤롯의 경고가 여기서처럼 선행 본문대신 사모사타(Samosata)를 공격한 이야기에 따라 나오고 있다.]



 8. 안토니를 도우러 간 부대가 파르티아인들에게 기습을 당할 때 헤롯이 구해줌



  헤롯은[㈜  고대. 14권. IS . 8-13(439-464)와 전쟁. 1권. 16\’7-17 : 1-8(321-342) 사이의 병행구에 대해서는 Laqueur, pp. 205-210을 보라. 이 사람은 고대사에서 요세푸스가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를 제외한 제 2의 자료 즉 헤롯자신의 실록(the Memoines)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고대사\’가 \’전쟁사\’보다 더 반헤롯(anti-Herodian)적이라는 Laqueur의 이론에 모순이 된다.] 자기를 도우러 왔던 기병과 보병을 데리고 안토니에게로 급히 떠났는데, 그는 유브라데 강변의 사모사타를 포위 공격하는 중이었다.[㈜ 안토니가 파르티아인들과 동맹한 콤마게네의 안티오쿠스(Antiochus of Commagene)를 공격한 벤티디우스(Ventidius)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대 자료에 대해서는 AH\’, x.53 주 3에 있는 W.W. Tarn의 글과 Debevoise, p.120 주 103을 보라. ] 헤롯이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전쟁사\’는 \”헤롯이 그의 평화를 활기있게 하였다. 이는 그가 이것으로 안토니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자기의 용기와 힘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를 보았던  것이다.\’고대. 14권. 15 : 8(444)에서 헤롯의 군대 행진과 안토니가 영접하는 사항은 전쟁. 1핀. 16 : 7(321, 322)친 동일한 단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안토니에게 가고는 싶으나 가는 도중에 야만인들에게 공격당해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격려하고 지도자가 되어 길을 떠났다. 사모사타를[㈜ 이는 사모사타(Samosata)의 남서쪽 약 40마일 지점이다. 추측컨대 콤마게네(Commagene)의 남쪽 국경 근처일 것이다.] 향해 떠난  지 이틀 후 안토니에게 가는 자들을 숨어 기다리던 야만인들의 기습을 받았다. 평야로 접어드는 곳에 우거진 수풀이 있었는데, 적들은 기습하기 위해 조용히 숨어서[㈜ prolocivxousi는 투키디데스의 어휘이다.] 지나가는 자들이 말을 부릴 수 있는 곳까지 다가오도록 기다렸다. 전열이 그곳을 지나 갈 때 헤롯은 후미에 있었다. 약 500명의 적이 갑자기[㈜ ehxapinaiw\”는 투키디데스의 어휘이다.] 기습하자 전열이 무너져 도망가게 되었다. 그때 헤롯왕은 달려가 군대를 지취하여 단숨에 적을 물리쳐 버렸다. 동시에 그는 부하들의  정신을 일깨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자 도망갔던 자들이 돌아와 싸우게 되어 야만인들을 사방으로 포위하여 죽였다. 헤롯왕은 앞으로 나가면서 적을 죽이고 밀어붙여서 빼앗겼던 것들, 즉 짐을 나르는 많은 짐승들과 노예들을 되찾았으며 행군을 계속했다. 평야의 길목에 있는 수풀 속에서 다시 많은 적에게 공 격을 받았지만 그는 정예병사들을 거느리고 그들과 싸워 쫓아내고 많은 적들을 죽였다. 이렇게 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통행하게 되자 그들은 헤롯이 그들의 구세주이자 보호자라고 칭송하였다.



 9. 안토니가 사모사타에서 헤롯을 반갑게 맞이함



  헤롯이 사모사타에 가까이 왔을 때, 안토니는 그의 군대를 의 장을 갖추어 그를 맞으러 보냈다. 이들을 보내는 것은 헤롯에 대한 경의이자 그를 도우려는 뜻에서였다. 왜냐하면 안토니는 이미 야만인들이 그들을 공격했다는 것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고더우기 헤롯이 도착하자 그는 매우 기쁘게 맞았으며, 오는 도중 에 헤롯이 여러 차례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손뼉을 치며 그의 용맹에 경의를 표하였다. 안토니는 헤롯을 볼때 직접 껴안으며 환영하고[㈜ 분문은 여기서 혼동되고 반복된다.] 그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풀었는데, 왜냐하면 얼마전에 그를 왕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대. 14권. 14 : 5(386)을 보라. 전쟁. 1권. 16 : 7(322)는 단순히 안토니가 \’왕권에 대한 자기의 명예와 기대를 넓혔다\’라고 말한다.] 얼마 후에 안티오쿠스가[㈜ 콤마게네 (Commagene)의 왕. 주 674를 보라.] 요새를 내놓고 항복하자,[㈜ \’전쟁사\’는 헤롯의 도착이 \’결론적으로 공격을 가져왔다\’라고 말한다. Plutarch,\’Ant\’\’, 34에 의하면, 안토니는 안티오쿠스가(이전에 Ventidius가  요구한 1,000달란트 대신 300달란트를 지불하고서 화해를 이루었다. Tarn은 그의 책에서 이 이야기를 \’헛소리\’라고 부른다.]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안토니는 소시우스에게 헤롯을 도우라는 말과 함께 수리아를[㈜ \’수리아\’는 \’전쟁사에서 보충한 것으로 추정된다.] 맡기고 자신은 애굽으로 떠났다.[㈜ Plutarch, 앞의 책에 의하면 안토니는 수리아에서 아린(Athens)으로 돌아왔다. 전쟁. 에는 소시우스(S0ssius)에게 가르친 것은 요셉(Joseph)이 여리고(Jericho)에서 패배한 이야기 다음에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앞에서 나온다 ; (447)은 전쟁. 1권. (327)과 병행하며 반면 (448-450)은 전쟁. 1권. (323-326)과 병 행이다.]  소시우스는 헤롯을 돕기 위해 2개 군단을 유대로 먼저 보낸 후[㈜ 타른(Tarn), \’CAH\’, x.54는 이것이 \’로마 군대를 지휘하는 외국인은 드문예\’였다라고 말하다.] 자신이 직접 주력부대를 이끌고 뒤따라 왔다.



10. 요셉이 여리고 전투에서 죽음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요셉은 다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 유대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요셉은 헤롯이 안토니에게 가면서 자기에게 준 명령을 잊고, 언덕 위에 진을 치고 마카이라스가 준 5개부대를 거느리고 여리고의 모든 수확물을 거두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군인들이 새로 소집되어 전투 경험이 없고 수리아에서 왔기 때문에 적이 그를 공격해왔을 때 그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어 용감히 싸웠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그의 부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6개부대가 대패하였다.[㈜ 이 사항은 전쟁.에는 찾아 볼 수 없다.] 안티고누스는 시체를[㈜ 라틴어는 \’적 \’ 본문은 전쟁. 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가져다가 요셉의 형제 페로라스가 50달란트를 내겠다고 제의했지만 요셉의 머리를 잘랐다. 이후에 갈릴리인들이 그 지방의귀족들에게 반역하여 일어나 헤롯의 잔당들을 호수에[㈜ 게네사렛(Gennesaret : 갈릴리 바다)의.] 빠뜨려죽였다. 유대의[㈜ 전쟁.은\’이두매\’로 되어 있다. 이것이 잘된 본문이다. 왜냐면 Otto가 \’Herodes\’, p.32에서 지적했듯이 유대는 헤롯이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전쟁. 1권. (303)에 의하면 그는 일찌기 이두매의 반역을 두려워 했었다.] 많은 지역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마카이라스는 가드(Gittha)를[㈜ 이름은 전쟁. 이후에 약간 수정되었다. 장소는 헤브론(Hebron)의 남서쪽에 있다. 참). 전쟁. 1권. 17 : 2(326)에 대한 Dr. Thackeray의 주691,] 요새화하고 있었다.



11. 헤롯이 요셉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여리고로 급히 나아감



  사신이 헤롯왕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와서 그의 동생의 운명을 이야기한 것은 안디옥 근처 다프네(Daphne)에서였다.그러나 헤롯은 꿈속의 환상을 통해 자기동생의 죽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전쟁. 의 언어는 더 생동감이 있다. 경악하여 자기 침실에서 튀어나와 그는 대이변의 소식을 가져온 사신들을 만났다.] 그는 길을 재촉하여 레바논산에 이르러서는 그 지역 의 800명을 거느리고, 로마군 1개군단과 함께 톨레마이스로 갔다.[㈜ 톨레마이스(Ptolemais)에서 멈춘 것은 \’전쟁사\’에는 언급되어 있지않다.Laqueur, pp. 206-207은\’고대사\’에서 요세푸스가 헤롯이 그의 형을 보복하려고 열정적으로 서두는 것을 보여주는 그의 자료에 대한 사항을 심사숙고하여 자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쟁사\’는 고대. 14권. 15 12(458)과 앞의 주들에서 보았던 것처럼 대사다 수사학적으로 더 단순하다.]  거기서부터 부대를 거느리고 밤에 출발하여 갈릴리를 지나 나아갔다. 헤롯은 적을 만날때마다 패배시키자, 적은 그들이 싸우러 나왔던 요새속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헤롯이 새벽에 다시 공격했으나[㈜ 다른 본문에는 \’새벽에\’가 빠져 있다. 이 사항은 \’전쟁사\’에서도 찾아볼 수없다. eJwqe 한 단어는 앞에 있던 toujnteu\’qen에 기인한 필사자의 실수일 것이다.]심한 폭풍이 일어난 까닭에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그는 부대를 마을 가까이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안토니가 보낸 1개군단이 도착하자[㈜ 고대. 1권. (447).] 요새를 지키던 적들은 두럭워 떨다가 밤사이에 다 도망가 버렸다. 헤롯왕은 동생의 원수를 갚으려는 생각으로 서둘러 여리고로 나아갔다. 진을 친 후  에 그는 중요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 했다. 잔치를 마친 후 손님  들을 보내고 그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곧이어 일어난 사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이 왕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보게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전쟁.1권. (82)에 실제적으로 없다. \’전쟁사\’는 이곳에서 헤롯이 \’다가오는 전쟁에서 패망과 보존의 표석이 될 것이라고 이를 판단하였다.\’]  그 집의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였는데[㈜ 추측컨대 지진 속에서, J. Garstang,\’The Story of Jericho\'(1940), p.136.에 의해 제안된 것이다.] 그안에 있었던 사람들 중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결과 그들은 헤롯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기에 그토록 예기치 않았던 큰 위험에서 피할 수 있었다고 믿게 되었다.



 12. 안티고누스의 군대가 여리고에서 헤롯에게 크게 패함



  다음날 6,000명의 적이 언덕 꼭대기에서부터 싸우려고 밀고내려와서는 로마군을 두렵게했다.[㈜ 전쟁.1권. (8)는 대조적으로 안티고누스의 군대가 로마인들과 같이 진영을 패쇄하러 올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고대사\’에는 ejfovboun이 아니라 ejfovbou\’vte\”(touj\” !Rwmaivou\”), 즉, \’그러나 그들이 로마인을 무서워하였다\’로 읽어야 할 것이다.] 경무장한 부대가 가까이다가와서 맞서 싸우려는 헤롯의 부하들에게 창과 돌을[㈜ 본문은 약간 수정됨,] 던졌다.그 중 하나가 창을 헤롯의 옆구리에 던졌다. 한편 안티고누스는자신이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파푸스라는 장군에게 병사들을[㈜ 사본에는 \’큰 군대\’] 거느리고 사마리아로 가게 했다. 한편 헤롯은마카이라스 장군과의 문제로 바쁘기도 했지만 다섯 도시를 점령하여 사로잡은[㈜ 편집은 동일. 사본은 \’남겨두었던\’.] 약 2,000명의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불지른 후, 이사나(Isana)라는[㈜ 서기적인 실수로 인해 \’전쟁사\’에처럼\’카나(Kana)\’가 아니다. 이사나 (Isana)는 성경에는 예사나(Jeshanah)로 되어 있다. <참). 고대. 8권. 11 : 3(284)). 이곳은 Albright,\’BASOR\’, 9(1923. 2월), p.7은 현재 부뤼엘-이사네(Burj el-lsaneh)와 동일하게 보고 있으며, 이곳은 나블루스(Hablus) 도상의 예루살렘의 북쪽 약 20마일 지점에 있다 (참). Abel,\’GP\’, ii. 364와 Klein,\’EY\’, p.85 주 8>.] 마을근처에 진지를 치고 있는 파푸스 (Pappus)와 싸우려고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여리고와 유대 여러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른 본문에는 \’여리고와 유대에서\’ ; \’전쟁사\’에는 \’여리고와 나머지 지역에서\'(cwvra\”)-이는 유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사\’는 이들 신병들이 온 것은 \’어떤자는 안티고누스에 대한 미움으로, 어떤자는 자신의 성공으로, 그리고 대다수는 변화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으로\’ 왔다고 첨부한다.]  그가 적들에게 가까이 가면 적들은 대담하게도 그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싸움에서는 헤롯이 이겼고 헤롯은 자기 형제의 원수를 갚으려고 마을로도망가는 적을 뒤쫓아가서 죽였다.[㈜ 이것은 전쟁. 1권. (336)에 더 생동감있게 표현된다.\’그의 살해당한 형에 대한 기억으로 그는 그 살해자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괴롭게 하였다.\’대사제는 병행되지 않는 \’전쟁사\’의 단락에는 몇개의 다른 생동감 있는 단락들이 있다.] 일부 적들은 집에 몰래 들어가 숨었고, 또 나머지[㈜ 다른 본문에는 \’약간\'(some) \’전쟁사\’는 우리의 본문을 지지한다.] 적들은 지붕 위로 도망가기도 하였다.헤롯은 이런 집들을 포위하고 지붕을 끌어내렸다. 그 집안에 적들이 겹겹이 포개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자 헤롯의 부하들은 위에서 돌을 던져 그들을 쳐죽인[㈜ 이 사항은 \’전쟁사\’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시체로 무더기를 이루었다.집안에 갇힌 채 수없는 시체들이 쌓여있는 모습은 어떤 전쟁 중 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참혹한 모습이었다. [㈜ toivcwn \’집의 벽\’은 소사본 teicw\’n \’성벽\’에서 추정된 것이다. 추측된 다른 본문은 사본들 \’~안에\’대신에 \’~밖에\’로 되어 있다. 전쟁.은 \’거리는 통행할 수 없도록 시체더미로 쌓였다\’ ] 이러한 행위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해하는 적들을 혼비백산케 하였다.그들은 많은 무리가 마을 저 밀리서 오는 것이 보이기만 해도 도망됐다. 만약 심한 폭풍이[㈜ 이는 주전 38-37년의 겨울이거나 주전 37년 초봄 동안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막지만 않았더라면 헤롯왕의 군대는 승리로 인한 자신감으로 예루살렘에도 진격해서 모든 일들을 끝냈을 것이다. 안티고누스는 이미 무작정 도망가기로 마음먹고 도시에서 후퇴하려 하고 있었다.



13. 헤롯이 기적적으로 암살을 모면함



  [㈜ 다음에 나오는(아마도 외경) 이야기에 \’고대사\’와 \’전쟁사\’사이에 있는 약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Laqueur, pp.209-210(다소 미묘하다)를 보라.]



  이때에 헤롯왕은 하들에게 식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밤이 늦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은 너무 피곤해서 목욕하러 방으로 갔다. 바로 여기서 그는 큰 위기를 맞았으나 하느님의 섭리로 피  할 수 있었다. 그가 옷을 벗고[㈜ 또는 \’무장하지 않은\’] 내실에서 목욕을 할 때 종 한명  만이 시중들고 있었는데 그 방에는 무장한 여러명의 적이 두려워하며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목욕하고 있을 때 그중 하나가  칼을 뽑아든 채 슬그머니 나오더니[㈜ 다른 본문에 있는 그에게 육박한\’은 문맥상 빠져 있다.] 문밖으로 나갔다. 뒤를 이어 두번째, 세번째 사람이 무장한 채 나오다가 당황해하면서 왕을 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만 다치지 않고 밖으로 달아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헤롯은 이미 살해된 파푸스의 머리를 베어 고통받았던 동생의 복수로서 그것을 페로라스에게 보냈다. 파푸스가 바로 자기동생의 사형을 집행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 (450)을 보라.]



14. 헤롯이 사마리아에서 마리암메와 결혼하려고 예루살렘 포위공격을 중지함



  폭동이 가라앉자[㈜ (465-491)과 전쟁. 1권. (343-357) 사이에 있는 병행구에 대해서는 Laqueur, pp.210-215를 보라.] 헤롯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 가까이로 왔다. 그리고 도시 가까이에 진을 쳤다. 이것은 그가 로마에서 왕이 된지 3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의 실망 이후에 정확히 2년 반 이상. 이것은 주전 40년의 늦가을에 일어났으며 ((389)를 보라) 그리고 지금은 주전 37년 초봄이다.] 그는 진을 옮겨 성벽 가까이 다가와 성전 앞에 진을 쳤는데, 그곳의 성벽이 가장 쉽게 공략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전에 폼페이가 공격했던 바로 그곳을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60)을 보라.]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주위의 나무를 잘라내어 토성 세군데와 망대를 세웠다. 그는 할일을 할만한 자에게 이 일을 책임지우고 그의 군대는 여전히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아리스토불추스의 아들인 알렉산더의 딸과[㈜ 마리암메 (Mariamme).] 결혼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떠났다. 그녀와는 이미 말했던 대로 약혼한 사이였다.[㈜  (300)을 보라. 전쟁. 1권. (344)는 \’그는 공격하는 사이에(pavrergon) 결혼을 하였다. 왜냐면 그는 이미 적을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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