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권 제 8장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이방 풍속을 헤롯이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시민 10명이 헤롯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 것과 헤롯이 세바스테와 가이사랴에 세운 건물과 그 외의 건물들에 대하여

 


제 8 장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이방 풍속을 헤롯이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시민 10명이 헤롯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 것과 헤롯이 세바스테와 가이사랴에 세운 건물과 그 외의 건물들에 대하여



1. 헤롯이 이교의 경기를 보급시키는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괴롭히다



  [㈜ 쉬러(Schurer,i ; 366, 주 8)는 고대. 15권. 8:1-5(267-298) (8장)이 다른 자료에서 나오며 원래 고대. 15권. 7 : 10(266) 다음에 바로 고대. 15권. 9 : 1(299)가 나온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이유로 헤롯은 유대민족 고유의 풍습과는 더 멀어졌으며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름으로써 유대 고대의 풍습을 더욱더 오염시켰다. 그 결과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우리 유대인들은 막중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그런 이방인들의 풍습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견지해 오던 우리민족의 종교의식을 약화시켜버렸다. 이와같은 막대한 피해를 끼친 이방 경기는 원래 헤롯이 가이사에게 존경심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5년에 1회씩[㈜ 우리의 계산으로는 4년마다.] 각종 체육대회를 개최할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극장(theatre)을 건설하고, 그 후 평원에[㈜ 이 경기장의 유적들은 쉬크(Schick)가 약 70년전에 와디 야술(Wady Yasul)근처에서 발견하였다. 이 곳은 예루살렘 서쪽으로 850m쯤 되는곳에 있다. Schick의 \’팔레스틴 탐사기금 계간지 일람표\'(Palestine Explo-ration Fund, Quarterly Statement), 1987, pp.161-166을 보라. 그러나 쉬크는 이 경기장의 유적들을 원형 경기장의 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헤롯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장은 고대. 17권. 10 : 2(255)에 나온다<전쟁, 2권. 3 : 1(44)와 병행>. 빈센트(H. Vincent)와 아벨(F. M. abel)의 \’예루살렘\'(Jerusalem)(2권 4, 파리, 1912-1926) ii ; 34, pl. 1를 보라. 달만(Batman)은 \’구별된 곳과 길\'(Sacred Sites and Ways)에서 원형 경기장과 경기장은 같은 것이 라고한다.] 거대한 원형경기장(amphitheatre)을 건설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이 두 건축물의 사용은 유대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규모는 웅장하였으나 유대인에게는 생소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가장찬란하게 이웃의 주민들과 전 국가를[㈜ 異文은 \’모든 나라에서\’] 초청하여 5년에 한번씩 성대한 대회를 열었다. 그는 각 나라의 운동선수들과 그밖에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승리 후에 얻게 될 영예와 푸짐하게 주어질 상품을 기대하라고 광고하면서 그들을 초청하였다. 헤롯은 운동경기에서 이긴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디멜리코이(thy-melikoi)라고[㈜ 배우들과 악사들은 디오니소스의 조합(the guild)과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같다. Rostovgeff의 \’헬라 세계의 사회 경제사\'(Social ard Economic History of the Hellenistic Wortd) 2권. 1048 이하를 보라. 티멜리코이(thymelikoi) 조합과 다른 흥미 돋우는 자들에 관해 Plutarch의 \’술라\'(Sulla) 36을 참조하라.] 불리는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푸짐한 상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유명한 자들은 모두다 모여들었다. 헤롯은 이런 경기에 유능한 자들을 모으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헤롯은 말 네필, 두필이 끄는 전차경 기와 말을 타고 산을 오르는 경기에도 대단히 많은 경품을 제공하였다. 헤롯은 자기의 위세를 많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야심에 사로잡혀서 많은 사람과 많은 노력을 동원하였다. 헤롯은 가이사의 탁월한 공적과 전승(戰勝)사실을 금과 은으로 만든기념비에 새기고,[㈜ 그러한 기념비의 예에 관해 벵겔(L. Wenger)의 \’Zeit. 4. Savigny Sti ftung,i Rom Abt.\’44(1929), 308-314에 나오는 \’황제의 직위에 관한 헬라비명\’ (Griechische Inschriften Zum Kaiserkult)을 보라.] 경기장에 그것들을 돌아가며 세웠다. 경기진행 도중, 호화찬란한 의복이나 촘촘히 박힌 보석 등,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자기를 과시 하려는 헤롯의 의도가 스며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또한 출중하게 힘이 센 많 은 사자들이나 보기 드물게 사나운 야수들을 대기시키도록 하였다. 그 까닭은 맹수끼리 서로 싸움을 붙이게 하거나 혹은 사형수와 맹수를 서로 싸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많은 비용이 소모됨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는 서로 피흘리며 싸우는 처절한 모숩을 보면서 극적인 흥분으로 전율하는 하나의 오락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들이목숨처럼 지켜오던 전통적인 율법을 정면으로 파기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야수에게 던지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 대한 명백한 불순종이었다. 특히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이방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불경건의 극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유대인들을 격분케 한 것은 전승(戰勝) 기념비였는데 그 둘레에 무기들을 둘러 세워놓았던 것이다. 어떤 상(像)이   든지 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전승 기념비에 대한 항의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예루살렘에 들여온 로마군기(軍雌)에 대해 더 심각한 항의를 불러들이는 전조였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이라고 유대인이 느꼈기 때문이다. 고대. 18권. 3 : 1(55-59)를 보라(전쟁. 2권. 9 : 2, 3(169-174)와병행). 또한 Carl H. Kraeling의\’Harvard Theological Review\’35(1942), 263-289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의 로마기에 관한 이야기\'(The Episode of the Roman Standards inJerusalem)와 같은 책 45(1952), 187-252에 나오는 A.D.Nock의 \’로마군과 로마의 종교 해\'(The Roman Army and the Roman Religious Year)를 보라. 최근에 하박국 6 : 3-5에 이르는 사해(Qumran)주석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킷팀(Kittiim), 즉 그들의 깃대(히브리어로는 otot\’m=표적)와 무기를 숭배하는 로마인들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이 국가적으로 지키는  관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격분은 극에 달하였다.



 2. 헤롯이 유대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방적인 장식을 제거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는 것을 의식한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자기에게 결코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헤롯은 유대 인들 가운데몇명을 불러 그들의 종교적 미신을[㈜ deisidaimoniva \’종교적인 의심\’이나 \’미신\’이라는 뜻을 가진다. Tha-ckeray-Marcus의 \’요세푸스에 관한 헬라어 사전\'(Greek Lexicon to Jesephus) 5. v.를 보라.] 없애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율법에 위배되는 죄를 범한 헤롯에게 불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하였다. 유대인들은 그에게 다른 모든 것은 참을수 있어도 사람의 상(像)이 예루살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유대 관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헤롯 은 그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데다가, 그들이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해 주기 전에는 좀처럼 그들의 기세가 수그러들 것 같지 않자 그들 중 지도급 인사 몇명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들을 경기장으로 인도하여 기념비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질문하였다. 이에 그들이 한 목소리로 \”사람의 상(Images ofmen)\”이라고 외치자, 헤롯은 즉시 그의 부하들에게 기념비에 둘려 있는 장식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 헤롯은 그의 명령에 의해 장식물이 제거된 기념비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아무것도 장식되지 않은 통나무로 바뀌어진 기념비는 헤롯과 동행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하나의 조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가장 큰 흔동되는 점은[㈜ 異文은 \’해산\’, \’처분\’.] 그 기념비가 모습을 바꾼 위장된 상(像)[㈜ 혹은 이 점에 있어 그들은(권력자들) 상의 구조에 관하여 가장해 왔었다.]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3. 헤롯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발생하다



  헤롯이 유대인들의 분노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누그러뜨리자 그 동안 헤롯에게 불만을 품어 왔던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더 이상 화를 품지 않기로 태도를 바꾸었다. [㈜ eiwJ\” 뜻에 관해 Schmidt의 책 p.419률 보라.]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유대의 관례를 어기는 것은 엄청난 죄악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헤롯이 왕위에 오르기가 무섭게 그 이전까지는 전혀 접하지도 못한 낯선 풍습을 그것도 강압적으로 보급하였으므로 헤롯은 겉으로는 우리들의 왕이지만 실제로는 유대의 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헤롯에 대하여 무관심하기보다는 목숨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항거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기존의 태도를 그대로 견지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0명의 이스라엘인들이 모여 음모를 꾸미고,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겠다고 맹세한 후 옷 섶에다 단검을 감추고 다녔다.[㈜  (맹세한 후) 다음에 한정 동사가 빠진 것으로 추정됨.] 이들 가운데는 맹인도 있었는데, 헤롯의 가증한 행위에 관한 말을 듣고 끓어오르는 격분을 누르지 못하여 그  공모에 가담하였다. 사실상 이 맹인은 그들이 계획하는 일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면 자기도 함께 그들과 고통을 나눌 각오가 되어 있다고 격려함으로써 그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4. 그들의 음모가 탄로나 처형되다



  헤롯을 암살하기로 결심한 이들은 사전에 공모한 대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차례 극장에 갔다. 그들이 갑자기 기습하면 제아무리 헤롯이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헤롯을 암살하는 것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를 경호하는 많은 부하들은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하였다. 그들은 비록  이와 같은 거사를 일으키다가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 백성들과 헤롯 왕에게 그가 얼마나 유대인의 원성을 사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그리하여 이들은 거사에 필요한 사전준비를 철저히 마치고 실행에 옮길 그날 만을 학수고대 하였다. 그러나 헤롯으로부터 각종 정보를 입수하여 보고토록 지시를 받은 특수 요원에 의해 이들의 음모는 발각되었고, 왕의 부하는 헤롯이 극장에 입장하기 직전에 이를 급히 보고하였다. 헤롯은 수많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증오하고 시내 곳곳에서 소요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작  금의 사태로 미루어 보아,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극장에 잠입해 있다는 그의 보고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왕궁으로 되돌아 갔다. 헤롯은 왕궁에 도 착하자마자 자신을 암살하려고 공모한 자들을 즉시 잡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헤롯을 암살하려던 자들은 헤롯의 부하들 에 의하여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망치는 것이 불 가능함을 깨닫고 죽더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떳떳하게 죽기로 각오하였다. 이에 그들은 자기들의 암살음모를 부인하지 않았으 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또한미리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보이면서, 칼로 헤롯을 암살하고자 하였던 자기들의 음모는 고귀하고 신앙적인 의분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사사로운 감정이나 어떠한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이나 개인적인 이득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유대 율법을 지 키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율법을 위하여 죽든지 양자택일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였다. 결국 이들은 헤롯의 군사들에 둘러쌓여 갖은 고문과 수모를 당한 끝에 비참하게 처형되었다. 이들이 이렇게 처형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들의 음모를 헤롯에게 알려 주었던 그 자는 그에게 앙심을 품은 몇몇 사람에게 붙잡혀 죽었다. 그들은 그 자를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온 몸을 토막내어 그 시체를 개에게 던져주어 개들이 뜯어 먹게 하였던 것이다.그들의 이와 같은 행위를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으나 아무도 이를 치안 당국에 알리지 않았다. 헤롯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흑독한 고문으로 심문하자 그때서야 여자 몇명이 그 자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 사실을 자백하였다. 이에 헤롯은 격앙된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그들을 처형할 때, 그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딸린 가족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기 위한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결사적인 충성심은 보다 더 안전한 신변경호책을 장구하기 전까지 헤롯을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헤롯은 이전보다 더 철저한 신변경호책을[㈜ 본문이 약간 불확실함.] 마련하면서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암살음모가 더이상 공개적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그들을 더욱 더 철저하게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 헤롯이 유대 국수주의자들의 적대행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와 헬라 병력을 사용한 정책에 관해서는 Schalit의 p.40이하를 보라.]



 5. 헤롯이 나라 전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다



  헤롯은 그가 살고 있는 왕궁으로 인해 온 도시의 치안이 철저   히 유지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건축한[㈜ 요한 힐카누스가 세운 망대(baris)의 장소에 대해 참). 고대. 13권. 11 : 2 (307).] 성전 옆에   안토니아(Antonia)라고[㈜ 고대. 15권. 11 : 4(403) 이하에 다시 언급된 성전 구내의 북서쪽 모서리에서, 전체적인 설명은 전쟁. 5권. 5 : 8(238-246)에 나음. Pere H. Vi n-cent는 \’성경 논평지\'(Revue Biblique) 61권(1954), 87-107에 나오는\”L\’Antoni , palais imitif d\’Herode\”에서 헤롯은 상부 도시에 \’있는 하스모네안 대신 안토니아 요새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Watzinger, ii : 32에보면 안토니아 망대는 \’거주하는 궁과 로마 성채(Roman castellum)의 결합물로 안디옥에 있는 갈리에누스(Gallienus)궁과 스폴레토(Spoleto)에 있는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궁의 선구자격이다\’라고 한다.] 불리는 견고한 요새가 있었으나, 제 3의 요새를 사마리아에 구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요새를 구축한 후 이를 세바스테 (Sebaste)라고[㈜ 고대. 15권.7 : 7(246)을 보라.\’] 이름하였다. 그가사마리아에 제3의 요새를 구축해야 되겠다고 판단한 까닭은 그   곳이 다른 지방보다[㈜ 유대 지역 자체에 있는 요새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함.] 그의 신변경호에 유리하다는 확신을 가   졌기 때문이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하룻길 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 곳에서도 예루살렘에서와 다름없이 예루살렘 시정(市政)과 국정(國政)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헤롯은 이전까지는 스트라톤 망대 (Straton\’s Tower)라고 불리웠으나 그에 의해 가이사랴(Caesarea)라고[㈜ 고대. 15권. 9 : 6(331) 이하를 보라.] 명명(命名)된 지역에 또 하나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평원(the Great Plain)에도[㈜ 에스드라엘론 평원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다. 참) 고대. 5권. 1 ; 22(83),8권. 2 .3(36), 전쟁. 2권. 10 : 2(188),] 요새를 구축하고 그 곳에 기병대를주둔시키고 통치권을 위임[㈜ 즉 점령지로서, 병역을 조건으로 한 토지. 주 261)을 보라.] 하였는데 갈릴리의 가바(Gaba)와[㈜ 전쟁. 3권. 3 : 1(36)에서 요세푸스는 갈멜 인접한 곳으로서 가바(Gaba)를 말하며 제대한 기병들이 헤롯의 명으로 그곳에 체류하여 \’기병대의 도시\’로 불렸다. A Alt의 \’ZDPV\’, 62(1939), 3~21에 나오는 \”Die Reiterstadt Gaba\”와 Abel의 \’GP\’ii : 319-320을 보라. 최근에 마이슬러(B. Maisler)는 가바가 엘 하리티애(el-\’arithiyye)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가\’HUCA\’24(1952-1953), 75-84에 나오는 \’벳 세아림, 가빠, 하로셋의 주민들\'(Beth ShearinL Gaba and Harosheth of the Peoples)을 보라. 헤롯이 세운 군 식민 도시에 대해 Otto의 책 p.59-60을 보라.] 에세보니티스(Esebonitis)가[㈜ 초기에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가 장악함. 참). 고대. 13권. 15 : 4(397), 아비 요나(Avi Yonah)는 그의 책 p.55에서 아랍인들에 게서 그곳을 다시 회복했다고 생각한다. 고대. 15권.5 : 1-5(108-160).] 이 지역에 속했다. 그는이와 같은 신변 안전장치를 틈나는 대로 고안해 내느라고 골몰하였다. 그 일환으로 헤롯은 수비대를 전국 주요 도시에 배치하여 유대인들에 의한 소요사태를 가능한 한 신속히 진압하도록 하였고, 부하들로 하여금 유대인 밀집지역에 상주시켜 그들의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게 하였으며 동정이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지체없이 보고토록 하여 소요를 가능한 한 최소화하려 하였다. 이 무렵 헤롯은 또한 사마리아 성을 축성하고 싶은열망에 사로 잡혀서, 과거 전쟁때 그를 도와 함께 싸운 많은 사람들과 이웃의 많은 주민들을 이주시켜 사마리아에서 살게 하였다. 그가 이와 같이 강제적인 이주정책을 강행한 이유는 그 혼자  만의 노력으로 새로운 시를[㈜ 본문이 불확실함.] 한번 세워보자는 야망과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야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헤롯은 그 도시의 이름도 사마리아에서 세바스테(Sebaste)로 바꾸고,[㈜ 라틴역은 \’아구스도 가이사를 기념하여\’라고 첨가한다. 각주 214를 보라.] 다른 지역의 거주민들이 사마리   아에 이주하여 살면 잘 살 수 있다는[㈜ 전쟁.1권.21 : 2(403)에는 헤롯이 거기에 600개의 식민지를 두었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이주해 가도록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진 인접한 땅을 그들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였다. 그들 또한 경사를 가파르게 하여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건축된 튼튼한 성벽으로 사마리아 시를 둘러쌓았다.[㈜ 사마리아 세바스테(Samaria-Sebaste)에 있는 헤롯 건축물의 유적은 G. A. Reinsner, C. S. Fishor와 D. e. Lyon이 기술한 \’사마리아에서의 하바드 발굴 작업\'(Harvard Excavations at Samaria), 1909-1910, 2권(캠브릿지, 메사추세츠주, 1924)에 설명되어 있다. 최근에 와서 그것에 대해 완전히 설명한 J. W. Crowfoot, K. M. Kenyon과 E. L. Sukenik의 \’사마리아의 건축물\'(The euitdings at Samaria)(런던)이 있다. 간략하게 설명 한 것으로 R. W. Hamilton외 \’세바스테의 역사적 인 장소에 관한 안내\'(Guide to the Historicat Site of Seba stieh) (예루살렘)과 Watzinger외 ii 47-54를 보라.] 이렇게 조성된 사마리아 시는 예루살렘 시보다 결코 작지 않았으며, 여타 명성있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사마리아 시는 그 변경이 20스다디온(stades)이나 되었는데, 헤롯은 그 시 한가운데에 반경 1/2스다디온 되는 신전을 건축한 후,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외형을 아름  답게 꾸미고 그 중심부에 그 규모면이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다른 유명한 도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사원을 세웠다.

  그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꾸며진 그 시의 중심부에 대한 치안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중심부만을 둘러싸는 일급(fir-st-class)꼭대기 위에 있는 인공적인 대(臺) 위에 세워졌다. 그 구조물의 계단과 다른 부분들은 지금도 볼 수 있다. Watzinger에 따르면 그 신전은 로마식이라기 보다 헬라식이었다고 한다(그는 페르가몬에 있는 디오니소스의 신전과 비교한다).반면 Crowfoot, Kenyon과 Sukenik은 p.126-127에서 \”성전 앞마당에 인공적인 대를 건축하는 것은 로마 시대의 수리아에서는 매우 평범한 일이었고 제 2로마시대의 사마리아에서는 많은 지하 동굴과 회랑들이 있었다. 구조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헤롯이 예루살렘에 지은 성전이다\”고 한다.[㈜ 혹은 \’최고급으로\’.] 성벽을 또 다시 세웠다. 그는 자신의, 미(美)에 대한 사랑에서 발원한 인간애의 기념비를 후손들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어마어마한 사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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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권 제 8장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이방 풍속을 헤롯이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시민 10명이 헤롯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 것과 헤롯이 세바스테와 가이사랴에 세운 건물과 그 외의 건물들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8 장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이방 풍속을 헤롯이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시민 10명이 헤롯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 것과 헤롯이 세바스테와 가이사랴에 세운 건물과 그 외의 건물들에 대하여


    1. 헤롯이 이교의 경기를 보급시키는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괴롭히다


      [㈜ 쉬러(Schurer,i ; 366, 주 8)는 고대. 15권. 8:1-5(267-298) (8장)이 다른 자료에서 나오며 원래 고대. 15권. 7 : 10(266) 다음에 바로 고대. 15권. 9 : 1(299)가 나온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이유로 헤롯은 유대민족 고유의 풍습과는 더 멀어졌으며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름으로써 유대 고대의 풍습을 더욱더 오염시켰다. 그 결과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우리 유대인들은 막중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그런 이방인들의 풍습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견지해 오던 우리민족의 종교의식을 약화시켜버렸다. 이와같은 막대한 피해를 끼친 이방 경기는 원래 헤롯이 가이사에게 존경심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5년에 1회씩[㈜ 우리의 계산으로는 4년마다.] 각종 체육대회를 개최할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극장(theatre)을 건설하고, 그 후 평원에[㈜ 이 경기장의 유적들은 쉬크(Schick)가 약 70년전에 와디 야술(Wady Yasul)근처에서 발견하였다. 이 곳은 예루살렘 서쪽으로 850m쯤 되는곳에 있다. Schick의 ‘팔레스틴 탐사기금 계간지 일람표'(Palestine Explo-ration Fund, Quarterly Statement), 1987, pp.161-166을 보라. 그러나 쉬크는 이 경기장의 유적들을 원형 경기장의 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헤롯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장은 고대. 17권. 10 : 2(255)에 나온다<전쟁, 2권. 3 : 1(44)와 병행>. 빈센트(H. Vincent)와 아벨(F. M. abel)의 ‘예루살렘'(Jerusalem)(2권 4, 파리, 1912-1926) ii ; 34, pl. 1를 보라. 달만(Batman)은 ‘구별된 곳과 길'(Sacred Sites and Ways)에서 원형 경기장과 경기장은 같은 것이 라고한다.] 거대한 원형경기장(amphitheatre)을 건설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이 두 건축물의 사용은 유대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규모는 웅장하였으나 유대인에게는 생소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가장찬란하게 이웃의 주민들과 전 국가를[㈜ 異文은 ‘모든 나라에서’] 초청하여 5년에 한번씩 성대한 대회를 열었다. 그는 각 나라의 운동선수들과 그밖에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승리 후에 얻게 될 영예와 푸짐하게 주어질 상품을 기대하라고 광고하면서 그들을 초청하였다. 헤롯은 운동경기에서 이긴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디멜리코이(thy-melikoi)라고[㈜ 배우들과 악사들은 디오니소스의 조합(the guild)과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같다. Rostovgeff의 ‘헬라 세계의 사회 경제사'(Social ard Economic History of the Hellenistic Wortd) 2권. 1048 이하를 보라. 티멜리코이(thymelikoi) 조합과 다른 흥미 돋우는 자들에 관해 Plutarch의 ‘술라'(Sulla) 36을 참조하라.] 불리는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푸짐한 상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유명한 자들은 모두다 모여들었다. 헤롯은 이런 경기에 유능한 자들을 모으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헤롯은 말 네필, 두필이 끄는 전차경 기와 말을 타고 산을 오르는 경기에도 대단히 많은 경품을 제공하였다. 헤롯은 자기의 위세를 많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야심에 사로잡혀서 많은 사람과 많은 노력을 동원하였다. 헤롯은 가이사의 탁월한 공적과 전승(戰勝)사실을 금과 은으로 만든기념비에 새기고,[㈜ 그러한 기념비의 예에 관해 벵겔(L. Wenger)의 ‘Zeit. 4. Savigny Sti ftung,i Rom Abt.’44(1929), 308-314에 나오는 ‘황제의 직위에 관한 헬라비명’ (Griechische Inschriften Zum Kaiserkult)을 보라.] 경기장에 그것들을 돌아가며 세웠다. 경기진행 도중, 호화찬란한 의복이나 촘촘히 박힌 보석 등,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자기를 과시 하려는 헤롯의 의도가 스며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또한 출중하게 힘이 센 많 은 사자들이나 보기 드물게 사나운 야수들을 대기시키도록 하였다. 그 까닭은 맹수끼리 서로 싸움을 붙이게 하거나 혹은 사형수와 맹수를 서로 싸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많은 비용이 소모됨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는 서로 피흘리며 싸우는 처절한 모숩을 보면서 극적인 흥분으로 전율하는 하나의 오락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들이목숨처럼 지켜오던 전통적인 율법을 정면으로 파기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야수에게 던지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 대한 명백한 불순종이었다. 특히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이방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불경건의 극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유대인들을 격분케 한 것은 전승(戰勝) 기념비였는데 그 둘레에 무기들을 둘러 세워놓았던 것이다. 어떤 상(像)이   든지 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전승 기념비에 대한 항의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예루살렘에 들여온 로마군기(軍雌)에 대해 더 심각한 항의를 불러들이는 전조였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이라고 유대인이 느꼈기 때문이다. 고대. 18권. 3 : 1(55-59)를 보라(전쟁. 2권. 9 : 2, 3(169-174)와병행). 또한 Carl H. Kraeling의’Harvard Theological Review’35(1942), 263-289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의 로마기에 관한 이야기'(The Episode of the Roman Standards inJerusalem)와 같은 책 45(1952), 187-252에 나오는 A.D.Nock의 ‘로마군과 로마의 종교 해'(The Roman Army and the Roman Religious Year)를 보라. 최근에 하박국 6 : 3-5에 이르는 사해(Qumran)주석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킷팀(Kittiim), 즉 그들의 깃대(히브리어로는 otot’m=표적)와 무기를 숭배하는 로마인들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이 국가적으로 지키는  관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격분은 극에 달하였다.


     2. 헤롯이 유대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방적인 장식을 제거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는 것을 의식한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자기에게 결코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헤롯은 유대 인들 가운데몇명을 불러 그들의 종교적 미신을[㈜ deisidaimoniva ‘종교적인 의심’이나 ‘미신’이라는 뜻을 가진다. Tha-ckeray-Marcus의 ‘요세푸스에 관한 헬라어 사전'(Greek Lexicon to Jesephus) 5. v.를 보라.] 없애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율법에 위배되는 죄를 범한 헤롯에게 불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하였다. 유대인들은 그에게 다른 모든 것은 참을수 있어도 사람의 상(像)이 예루살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유대 관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헤롯 은 그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데다가, 그들이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해 주기 전에는 좀처럼 그들의 기세가 수그러들 것 같지 않자 그들 중 지도급 인사 몇명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들을 경기장으로 인도하여 기념비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질문하였다. 이에 그들이 한 목소리로 “사람의 상(Images ofmen)”이라고 외치자, 헤롯은 즉시 그의 부하들에게 기념비에 둘려 있는 장식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 헤롯은 그의 명령에 의해 장식물이 제거된 기념비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아무것도 장식되지 않은 통나무로 바뀌어진 기념비는 헤롯과 동행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하나의 조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가장 큰 흔동되는 점은[㈜ 異文은 ‘해산’, ‘처분’.] 그 기념비가 모습을 바꾼 위장된 상(像)[㈜ 혹은 이 점에 있어 그들은(권력자들) 상의 구조에 관하여 가장해 왔었다.]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3. 헤롯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발생하다


      헤롯이 유대인들의 분노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누그러뜨리자 그 동안 헤롯에게 불만을 품어 왔던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더 이상 화를 품지 않기로 태도를 바꾸었다. [㈜ eiwJ” 뜻에 관해 Schmidt의 책 p.419률 보라.]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유대의 관례를 어기는 것은 엄청난 죄악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헤롯이 왕위에 오르기가 무섭게 그 이전까지는 전혀 접하지도 못한 낯선 풍습을 그것도 강압적으로 보급하였으므로 헤롯은 겉으로는 우리들의 왕이지만 실제로는 유대의 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헤롯에 대하여 무관심하기보다는 목숨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항거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기존의 태도를 그대로 견지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0명의 이스라엘인들이 모여 음모를 꾸미고,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겠다고 맹세한 후 옷 섶에다 단검을 감추고 다녔다.[㈜  (맹세한 후) 다음에 한정 동사가 빠진 것으로 추정됨.] 이들 가운데는 맹인도 있었는데, 헤롯의 가증한 행위에 관한 말을 듣고 끓어오르는 격분을 누르지 못하여 그  공모에 가담하였다. 사실상 이 맹인은 그들이 계획하는 일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면 자기도 함께 그들과 고통을 나눌 각오가 되어 있다고 격려함으로써 그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4. 그들의 음모가 탄로나 처형되다


      헤롯을 암살하기로 결심한 이들은 사전에 공모한 대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차례 극장에 갔다. 그들이 갑자기 기습하면 제아무리 헤롯이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헤롯을 암살하는 것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를 경호하는 많은 부하들은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하였다. 그들은 비록  이와 같은 거사를 일으키다가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 백성들과 헤롯 왕에게 그가 얼마나 유대인의 원성을 사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그리하여 이들은 거사에 필요한 사전준비를 철저히 마치고 실행에 옮길 그날 만을 학수고대 하였다. 그러나 헤롯으로부터 각종 정보를 입수하여 보고토록 지시를 받은 특수 요원에 의해 이들의 음모는 발각되었고, 왕의 부하는 헤롯이 극장에 입장하기 직전에 이를 급히 보고하였다. 헤롯은 수많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증오하고 시내 곳곳에서 소요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작  금의 사태로 미루어 보아,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극장에 잠입해 있다는 그의 보고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왕궁으로 되돌아 갔다. 헤롯은 왕궁에 도 착하자마자 자신을 암살하려고 공모한 자들을 즉시 잡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헤롯을 암살하려던 자들은 헤롯의 부하들 에 의하여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망치는 것이 불 가능함을 깨닫고 죽더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떳떳하게 죽기로 각오하였다. 이에 그들은 자기들의 암살음모를 부인하지 않았으 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또한미리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보이면서, 칼로 헤롯을 암살하고자 하였던 자기들의 음모는 고귀하고 신앙적인 의분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사사로운 감정이나 어떠한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이나 개인적인 이득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유대 율법을 지 키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율법을 위하여 죽든지 양자택일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였다. 결국 이들은 헤롯의 군사들에 둘러쌓여 갖은 고문과 수모를 당한 끝에 비참하게 처형되었다. 이들이 이렇게 처형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들의 음모를 헤롯에게 알려 주었던 그 자는 그에게 앙심을 품은 몇몇 사람에게 붙잡혀 죽었다. 그들은 그 자를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온 몸을 토막내어 그 시체를 개에게 던져주어 개들이 뜯어 먹게 하였던 것이다.그들의 이와 같은 행위를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으나 아무도 이를 치안 당국에 알리지 않았다. 헤롯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흑독한 고문으로 심문하자 그때서야 여자 몇명이 그 자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 사실을 자백하였다. 이에 헤롯은 격앙된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그들을 처형할 때, 그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딸린 가족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기 위한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결사적인 충성심은 보다 더 안전한 신변경호책을 장구하기 전까지 헤롯을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헤롯은 이전보다 더 철저한 신변경호책을[㈜ 본문이 약간 불확실함.] 마련하면서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암살음모가 더이상 공개적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그들을 더욱 더 철저하게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 헤롯이 유대 국수주의자들의 적대행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와 헬라 병력을 사용한 정책에 관해서는 Schalit의 p.40이하를 보라.]


     5. 헤롯이 나라 전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다


      헤롯은 그가 살고 있는 왕궁으로 인해 온 도시의 치안이 철저   히 유지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건축한[㈜ 요한 힐카누스가 세운 망대(baris)의 장소에 대해 참). 고대. 13권. 11 : 2 (307).] 성전 옆에   안토니아(Antonia)라고[㈜ 고대. 15권. 11 : 4(403) 이하에 다시 언급된 성전 구내의 북서쪽 모서리에서, 전체적인 설명은 전쟁. 5권. 5 : 8(238-246)에 나음. Pere H. Vi n-cent는 ‘성경 논평지'(Revue Biblique) 61권(1954), 87-107에 나오는”L’Antoni , palais imitif d’Herode”에서 헤롯은 상부 도시에 ‘있는 하스모네안 대신 안토니아 요새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Watzinger, ii : 32에보면 안토니아 망대는 ‘거주하는 궁과 로마 성채(Roman castellum)의 결합물로 안디옥에 있는 갈리에누스(Gallienus)궁과 스폴레토(Spoleto)에 있는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궁의 선구자격이다’라고 한다.] 불리는 견고한 요새가 있었으나, 제 3의 요새를 사마리아에 구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요새를 구축한 후 이를 세바스테 (Sebaste)라고[㈜ 고대. 15권.7 : 7(246)을 보라.’] 이름하였다. 그가사마리아에 제3의 요새를 구축해야 되겠다고 판단한 까닭은 그   곳이 다른 지방보다[㈜ 유대 지역 자체에 있는 요새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함.] 그의 신변경호에 유리하다는 확신을 가   졌기 때문이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하룻길 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 곳에서도 예루살렘에서와 다름없이 예루살렘 시정(市政)과 국정(國政)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헤롯은 이전까지는 스트라톤 망대 (Straton’s Tower)라고 불리웠으나 그에 의해 가이사랴(Caesarea)라고[㈜ 고대. 15권. 9 : 6(331) 이하를 보라.] 명명(命名)된 지역에 또 하나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평원(the Great Plain)에도[㈜ 에스드라엘론 평원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다. 참) 고대. 5권. 1 ; 22(83),8권. 2 .3(36), 전쟁. 2권. 10 : 2(188),] 요새를 구축하고 그 곳에 기병대를주둔시키고 통치권을 위임[㈜ 즉 점령지로서, 병역을 조건으로 한 토지. 주 261)을 보라.] 하였는데 갈릴리의 가바(Gaba)와[㈜ 전쟁. 3권. 3 : 1(36)에서 요세푸스는 갈멜 인접한 곳으로서 가바(Gaba)를 말하며 제대한 기병들이 헤롯의 명으로 그곳에 체류하여 ‘기병대의 도시’로 불렸다. A Alt의 ‘ZDPV’, 62(1939), 3~21에 나오는 “Die Reiterstadt Gaba”와 Abel의 ‘GP’ii : 319-320을 보라. 최근에 마이슬러(B. Maisler)는 가바가 엘 하리티애(el-‘arithiyye)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가’HUCA’24(1952-1953), 75-84에 나오는 ‘벳 세아림, 가빠, 하로셋의 주민들'(Beth ShearinL Gaba and Harosheth of the Peoples)을 보라. 헤롯이 세운 군 식민 도시에 대해 Otto의 책 p.59-60을 보라.] 에세보니티스(Esebonitis)가[㈜ 초기에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가 장악함. 참). 고대. 13권. 15 : 4(397), 아비 요나(Avi Yonah)는 그의 책 p.55에서 아랍인들에 게서 그곳을 다시 회복했다고 생각한다. 고대. 15권.5 : 1-5(108-160).] 이 지역에 속했다. 그는이와 같은 신변 안전장치를 틈나는 대로 고안해 내느라고 골몰하였다. 그 일환으로 헤롯은 수비대를 전국 주요 도시에 배치하여 유대인들에 의한 소요사태를 가능한 한 신속히 진압하도록 하였고, 부하들로 하여금 유대인 밀집지역에 상주시켜 그들의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게 하였으며 동정이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지체없이 보고토록 하여 소요를 가능한 한 최소화하려 하였다. 이 무렵 헤롯은 또한 사마리아 성을 축성하고 싶은열망에 사로 잡혀서, 과거 전쟁때 그를 도와 함께 싸운 많은 사람들과 이웃의 많은 주민들을 이주시켜 사마리아에서 살게 하였다. 그가 이와 같이 강제적인 이주정책을 강행한 이유는 그 혼자  만의 노력으로 새로운 시를[㈜ 본문이 불확실함.] 한번 세워보자는 야망과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야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헤롯은 그 도시의 이름도 사마리아에서 세바스테(Sebaste)로 바꾸고,[㈜ 라틴역은 ‘아구스도 가이사를 기념하여’라고 첨가한다. 각주 214를 보라.] 다른 지역의 거주민들이 사마리   아에 이주하여 살면 잘 살 수 있다는[㈜ 전쟁.1권.21 : 2(403)에는 헤롯이 거기에 600개의 식민지를 두었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이주해 가도록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진 인접한 땅을 그들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였다. 그들 또한 경사를 가파르게 하여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건축된 튼튼한 성벽으로 사마리아 시를 둘러쌓았다.[㈜ 사마리아 세바스테(Samaria-Sebaste)에 있는 헤롯 건축물의 유적은 G. A. Reinsner, C. S. Fishor와 D. e. Lyon이 기술한 ‘사마리아에서의 하바드 발굴 작업'(Harvard Excavations at Samaria), 1909-1910, 2권(캠브릿지, 메사추세츠주, 1924)에 설명되어 있다. 최근에 와서 그것에 대해 완전히 설명한 J. W. Crowfoot, K. M. Kenyon과 E. L. Sukenik의 ‘사마리아의 건축물'(The euitdings at Samaria)(런던)이 있다. 간략하게 설명 한 것으로 R. W. Hamilton외 ‘세바스테의 역사적 인 장소에 관한 안내'(Guide to the Historicat Site of Seba stieh) (예루살렘)과 Watzinger외 ii 47-54를 보라.] 이렇게 조성된 사마리아 시는 예루살렘 시보다 결코 작지 않았으며, 여타 명성있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사마리아 시는 그 변경이 20스다디온(stades)이나 되었는데, 헤롯은 그 시 한가운데에 반경 1/2스다디온 되는 신전을 건축한 후,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외형을 아름  답게 꾸미고 그 중심부에 그 규모면이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다른 유명한 도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사원을 세웠다.

      그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꾸며진 그 시의 중심부에 대한 치안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중심부만을 둘러싸는 일급(fir-st-class)꼭대기 위에 있는 인공적인 대(臺) 위에 세워졌다. 그 구조물의 계단과 다른 부분들은 지금도 볼 수 있다. Watzinger에 따르면 그 신전은 로마식이라기 보다 헬라식이었다고 한다(그는 페르가몬에 있는 디오니소스의 신전과 비교한다).반면 Crowfoot, Kenyon과 Sukenik은 p.126-127에서 “성전 앞마당에 인공적인 대를 건축하는 것은 로마 시대의 수리아에서는 매우 평범한 일이었고 제 2로마시대의 사마리아에서는 많은 지하 동굴과 회랑들이 있었다. 구조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헤롯이 예루살렘에 지은 성전이다”고 한다.[㈜ 혹은 ‘최고급으로’.] 성벽을 또 다시 세웠다. 그는 자신의, 미(美)에 대한 사랑에서 발원한 인간애의 기념비를 후손들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어마어마한 사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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