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아그립바왕이 유대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과페트로니우스가 유대인을 위해 드리스 주민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1. 아그립바가 유대로 돌아와 금목걸이를 봉헌하다
알렉산드리아와 대부분의 지역에 포고한 이러한 칙령에 따라 글라우디오 가이사는 유대인들에 대해 결정했던 것을 공포하였다. 글라우디오는 이전보다 더 높은 직위를 주고서 유대를 통치하도록 아그립바왕을 보내면서 그 지역의 총독과 행정장관에게 그를 특별히 예우하라는 친서를 주었다. 아그립바왕은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귀향했기 때문에 서둘러 유대로 돌아왔다. 아그립바왕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율법이 명한 의식 중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고 감사의 제물을 바쳤다.[㈜ 아그립바의 부하들 중의 한명이 안전하게 귀환했을 때에 느꼈던 기쁨이 W. Dittenberger, \’Or. Gr. Inscr. Sel\’. I. 1903, no. 418, pp.629-630에서 발견된다.] 그는 또한 상당한수의 나실인들이 머리를 자를[㈜ 문자적인 뜻은 \”깍을\”이다. Whiston과 Mathieu-Hermann이 그 구절을 번역한 것과 같이 유대의 종교(고대. 19권. 7 : 3(331)를 세심하게 관찰한 아그립바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고 하는 나실인들의 서원을 파기할 것을 그들에게 명했을 것 같지 않다(수 6 : 5). 비록 여기의 언급이 당시 나실인들에 관한 것일지라도 모든 이러한 나실인들의 시간 제한이 동시에 만료되었다는 어떤 지시도 없다. 그러므로 가난한 나실인들의 헌납 비용을 도맡았다는 가정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동일한 표현인 le-galeah(\’깍다\’)는 \’나실인들의 헌납 비용을 가져 오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쉬나(Mishnah), \’Nazir\’ ii : 5과 6에서 몇 번 발견되었다. 이 구절은 행 21 : 24에서 유사하게 번역되었다. 그 구절의 기원에 관한 논의와 다른 탈무드의 언급에 관해서는 J. N. Epstein, \’나실인 신분의 용어에 관하여\'(on the Tems of Naziriteship : 히브리어 판), ; \’Magenes Anniversary book\’, 1938, pp.15-16를 참조하라.] 것을 명했다. 더구나 그는 신성한 구역내에 자신의 충성스런 손을 결박한 것과 동일한 무게를지닌, 가이우스 황제가[㈜ 고대. 18권. 6 : 10(237).] 자신에게 선사했던 금목걸이를 보물함[㈜ 성전의 앞마당에는 13개의 나팔 형태의 헌금궤가 있고 그중 6개는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인 헌납용으로 사용되었다(Mishnah, \’Shekalim\’ vi : 5). 아그립바는 자신의 금목걸이를 한 개 이상의 궤에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위에 달아 놓고서 자신의 쓰라린 운명의 회상으로써, 그리고 보다 나은 위치로의 반전(反轉)의 증거로 삼았다. 이것은 위대성이 때때로 무너지고 신은 몰락한 운명을 높이신다는 증거로삼기 위함이었다. 금목걸이의 봉헌은 아그립바왕이 사소한 일로투옥되었고 그의 이전 직으로 복귀하였고 머지 않아 이전보다 더큰 영예를 지닌 왕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승진하였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모든 위대함은 점점 사라지며 몰락한 운명이 다시 찬란한 명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2. 시몬 칸데라스가 대제사장에 임명되다
하느님에 대한 그의 봉헌을 철저히 등한시 했기 때문에 아그립바왕은 대제사장 출신인 아나누스(Ananus)의 아들 데오빌로를 해임시키고[㈜ 참). 고대. 18권. 5 : 3(123).] 칸데라스(Cantheras)라는 별명을 지닌 보에투스(boethus)의[㈜ 알렉산드리아인. 참). 고대. 15권. 9 : 3(320), 17권. 4 : 2(78)과 18 : 1(339), 18권. 1 : 1(3)니이제(Niese)가 편집한 색인에서 \’s.v\’. Bohqo\”는 여기서 언급된 시몬(Simon)의 부친이 대제사장 Simon, Joazar, 그리고 Eleazar의 부친인 Boethus와는 다른 것 같다. 니이제(Niese)의 추정은 두 명의 시몬 사이에 시간이 오래 경과하였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즉 첫 번째 시몬은 약 주전 24년에, 그리고 두 번째 시몬은 주후 41년에 각각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니이제가 두 명의 시몬을 동일인으로 간주했던 것은 헤롯왕과 시몬의 딸과의 혼인에 관한 이전의 이야기를 요세푸스가 언급한 것에 근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의 아들 시몬(Simon)에게[㈜ 참). 고대. 15권. 9 : 3(320-322), 17권. 4 : 2(78), 18권. 5 : 1(109)와 5 : 4(136). 그는 의인 시몬(Simon the Righteous)과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된다(H. Lichtenstein, \”Die Fastenrolle\” \’Hebrew Union Coll. Ann.\’ viii-ix, 1931-1932, p.300)\’. 그는 \”적을 성전에 들이려는 법령은 무효이다\”라는 소리를 성전의 지성소에서 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탈무드에 기록된 사람이다(Sotah 33a).] 데오빌로의 뒤를 잇게 하였다. 시몬에게는 두 명의 형제와[㈜ 요아자르(Joazar : 고대. 17권. 18 : 1(339), 18권. 1 : 1(3)과 2 : 1(26)와 엘르아살(Eleazar : 고대. 17권. 18 : 1(339, 341).] 그의 아버지 보에투스가 있었다. 시몬의 딸은 내가 앞서 밝혔던 것처럼[㈜ 고대. 15권. 9 : 3(320-322).] 헤롯왕과 결혼했다. 따라서 시몬은 그의 형제와 아버지와 같이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대. 12권. 4 : 10(224, 225), 5 : 1(237, 238).] 마게도냐인들의 통치시 오니아스(Oni-as)의 아들인 시몬의 세 아들들의 경우를 반복한 것이다.
3. 도라인이 회당에 황제 동상을 세웠다고 책망받다
이러한 방법으로 대제사장직을 처리한 후에, 아그립바왕은 모든 가구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줌으로써, 자신의 부하에 대하여부성적(父性的)인 사랑으로 갚아줌으로써 예루살렘 주민들의 선의에 보답했다.[㈜ 참). 일반적 관례에 의하여 한 도시의 시민이 그 도시 성벽 축조에 기여하도록 강제한 것을 언급한 미쉬나(Mishnah) \’Baba Batra\’ I : 5.] 그는 또한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실라스(Silas)를 전(全)군대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직후에 거룩함보다는 용감함에 보다 더 큰 가치를 두고서 본성상 무모할 정도로 대담했던 도라(Dora)의[㈜ 갈멜산 가까이에 있는 현(現) 탄투라(Tantura) 마을의 다소 북쪽에 있는 베니게(Phoenicia : 히브리어로는 Dora)의 도시. 참). 아피. 2권. 9(116), 자서. 8(31)등.] 청년들은 가이사의상을 유대의 회당안으로 가져와서 세웠다. 이러한 짓은 조상들의 율법을 전복하는 것과 동등하기 때문에 아그립바왕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수리아의 총독인 푸블리우스페트로니우스(Publius Petronius)를 만나러 가서는 도라 민족을 탄핵했다.[㈜ 참). 고대. 18권. 8 : 2(261)이하.] 페트로니우스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 마찬가지로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러한 율법의 위반은 신성모독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라(Dora)의 지도자들에게[㈜ 여러 사본들에서는 \”배교자들\”로 표기함. 그러나 페트로니우스(Petronius)가 말하고 있는 이 지도자들과 도라(Dora)의 무책임한 젊은이들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고대. 19권. 6 : 3(303)과 6 : 3(307)에 나오는 언급에서 명백해진다.] 화가나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디베료 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 게르마니쿠스(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의 사신인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는 도라의행정장관들에게 고(告)한다. 너희는 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 게르마니쿠스께서 유대인들이 그들 조상의 관습을 준수하도록 한 칙령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이 칙령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역행한 어처구니 없는 호기를 부렸다. 즉 너희 도라인들은 가이사의 상을 회당안에 가져감으로써 유대인들이 집회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 대해서도 불충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것은 황제의 상은 어떤 다른 장소보다도 본래의 성소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포고령에 따르면 자연법에 의해 각자는 자신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들 고유의 관습을 준수하고 헬라인들과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한 황제의 칙령을 언급한 후에 나자신의 포고령을 언급하는 것이 내게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아구스도의 칙령에 반박하여 그렇게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자에관해서는 위범자들 가운데 유명인사로 여겨지는 사람들 조차도 이러한 행위에 대해 분개하였고 신중하고도 개인적으로 제언하지 않고 폭도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였다고 주장하였으므로 나는그들의 설명을 듣기 위하여 백부장 프로클루스 비텔리우스(Pr-oclys Vitellius)를 보내어 그들을 내 앞으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고위의 지방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놈들이 자신의 동의와 의도에 따라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너희들은 백부장에게 그 죄를 지적해 줌으로써 싸움과 전투로 이끌 여지를 허용하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나의 견해로는 놈들이 그러한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친애하는 아그립바왕과 나는 유대인들이 자기방어의 구실로 한 장소에모여 필사적인 조치를 취하여 어떤 기회로 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전반적 사항에 걸친 로마제국의 장엄한 정책을 통지할 수 있도록 황제께서 알렉산드리아에 포고했던 칙령을 동봉하였다. 비록 그들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지만 나의 가장친애하는 아그립바왕은 아구스도에 의해 부여된 유대인의 특권을 박탈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법 앞에서 공포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대들은 선동과 소란의 구실을 주지 않도록 하고 각자자기 고유의 종교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라\”.
4. 아그립바가 시몬 대신 아나누스의 아들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다
이것이 이미 발생했던 율법의 위반을 교정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유사한 범칙행위를 방지하려고 페트로니우스(Petronius)가 취한 조치였다. 아그립바 왕은 시몬 칸데라스(Simon Canther-as)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그 영예에 적합한 아나누스(Ananus)의[㈜ 참). 고대. 18권. 2 : 1(26).] 아들 요나단(Jonathan)을[㈜ 참). 고대. 18권. 4 : 3(95), 5 : 3(123), 고대. 20권. 8 : 5(162-164)에 따르면 그는 행정장관 벨릭스(Felix)의 선동으로 약탈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문장에 대한 각주에서 Mathieu-Hermann은 그의 히브리어 이름 요나단(Jonathan)과 헬라어 이름 데오필루스(Theophilus)가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아나누스(Ananus)의 아들 데오필루스(Theophilus)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이 \”하느님이 주셨다\” 혹은 \”하느님의 선물\”을 뜻하고 데오필루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을 뜻하므로 그 의미는 다소 다르다. 더구나 고대. 18권. 5 : 3(123)에서 데오필루스가 요나단의 뒤를 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제사장인 요세푸스가 그런 문제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것 같지 않다.] 복직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러한 영예의 복귀를 환영할 수 없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다. \”오! 왕이시여! 나는 당신에의해 영화롭게 된 것이 기쁩니다. 그리고 비록 신께서 내가 대제사장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에 따라 나에게 수여된 이러한 최고의 보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나는 이전에 거룩한 제복을 입은 것에 만족하고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시 복직된다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거룩하게 그 제복을 입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께서나보다 그 영예에 더 적합한 다른 사람을 원하신다면 통고할 수있습니다. 오! 왕이시여! 나는 하느님과 황제께 대해서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한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그 영예에 적합한 사람으로 그를 추천합니다\” 아그립바왕은 이 말로 인해 기뻤고 요나단의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여 그의 동생 마티아스(Matthias)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다. 이러한 일이 있은지 오래지 않아 페트로니우스(Petronius)는 마르수스(Marsus)의[㈜ 주후 17년의 집정관인 마르수스(C. Vibius Marsus). 19년에 그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부집정관이었다. 그는 42년에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뒤를 이어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참). 고대. 19건. 7 : 2(326), 8 : 1(340-34) 9 : 2(363) ; 20권. 1 : 1(1).] 뒤를 이어 수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제 6 장
아그립바왕이 유대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과페트로니우스가 유대인을 위해 드리스 주민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1. 아그립바가 유대로 돌아와 금목걸이를 봉헌하다
알렉산드리아와 대부분의 지역에 포고한 이러한 칙령에 따라 글라우디오 가이사는 유대인들에 대해 결정했던 것을 공포하였다. 글라우디오는 이전보다 더 높은 직위를 주고서 유대를 통치하도록 아그립바왕을 보내면서 그 지역의 총독과 행정장관에게 그를 특별히 예우하라는 친서를 주었다. 아그립바왕은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귀향했기 때문에 서둘러 유대로 돌아왔다. 아그립바왕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율법이 명한 의식 중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고 감사의 제물을 바쳤다.[㈜ 아그립바의 부하들 중의 한명이 안전하게 귀환했을 때에 느꼈던 기쁨이 W. Dittenberger, ‘Or. Gr. Inscr. Sel’. I. 1903, no. 418, pp.629-630에서 발견된다.] 그는 또한 상당한수의 나실인들이 머리를 자를[㈜ 문자적인 뜻은 “깍을”이다. Whiston과 Mathieu-Hermann이 그 구절을 번역한 것과 같이 유대의 종교(고대. 19권. 7 : 3(331)를 세심하게 관찰한 아그립바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고 하는 나실인들의 서원을 파기할 것을 그들에게 명했을 것 같지 않다(수 6 : 5). 비록 여기의 언급이 당시 나실인들에 관한 것일지라도 모든 이러한 나실인들의 시간 제한이 동시에 만료되었다는 어떤 지시도 없다. 그러므로 가난한 나실인들의 헌납 비용을 도맡았다는 가정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동일한 표현인 le-galeah(‘깍다’)는 ‘나실인들의 헌납 비용을 가져 오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쉬나(Mishnah), ‘Nazir’ ii : 5과 6에서 몇 번 발견되었다. 이 구절은 행 21 : 24에서 유사하게 번역되었다. 그 구절의 기원에 관한 논의와 다른 탈무드의 언급에 관해서는 J. N. Epstein, ‘나실인 신분의 용어에 관하여'(on the Tems of Naziriteship : 히브리어 판), ; ‘Magenes Anniversary book’, 1938, pp.15-16를 참조하라.] 것을 명했다. 더구나 그는 신성한 구역내에 자신의 충성스런 손을 결박한 것과 동일한 무게를지닌, 가이우스 황제가[㈜ 고대. 18권. 6 : 10(237).] 자신에게 선사했던 금목걸이를 보물함[㈜ 성전의 앞마당에는 13개의 나팔 형태의 헌금궤가 있고 그중 6개는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인 헌납용으로 사용되었다(Mishnah, ‘Shekalim’ vi : 5). 아그립바는 자신의 금목걸이를 한 개 이상의 궤에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위에 달아 놓고서 자신의 쓰라린 운명의 회상으로써, 그리고 보다 나은 위치로의 반전(反轉)의 증거로 삼았다. 이것은 위대성이 때때로 무너지고 신은 몰락한 운명을 높이신다는 증거로삼기 위함이었다. 금목걸이의 봉헌은 아그립바왕이 사소한 일로투옥되었고 그의 이전 직으로 복귀하였고 머지 않아 이전보다 더큰 영예를 지닌 왕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승진하였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모든 위대함은 점점 사라지며 몰락한 운명이 다시 찬란한 명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2. 시몬 칸데라스가 대제사장에 임명되다
하느님에 대한 그의 봉헌을 철저히 등한시 했기 때문에 아그립바왕은 대제사장 출신인 아나누스(Ananus)의 아들 데오빌로를 해임시키고[㈜ 참). 고대. 18권. 5 : 3(123).] 칸데라스(Cantheras)라는 별명을 지닌 보에투스(boethus)의[㈜ 알렉산드리아인. 참). 고대. 15권. 9 : 3(320), 17권. 4 : 2(78)과 18 : 1(339), 18권. 1 : 1(3)니이제(Niese)가 편집한 색인에서 ‘s.v’. Bohqo”는 여기서 언급된 시몬(Simon)의 부친이 대제사장 Simon, Joazar, 그리고 Eleazar의 부친인 Boethus와는 다른 것 같다. 니이제(Niese)의 추정은 두 명의 시몬 사이에 시간이 오래 경과하였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즉 첫 번째 시몬은 약 주전 24년에, 그리고 두 번째 시몬은 주후 41년에 각각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니이제가 두 명의 시몬을 동일인으로 간주했던 것은 헤롯왕과 시몬의 딸과의 혼인에 관한 이전의 이야기를 요세푸스가 언급한 것에 근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의 아들 시몬(Simon)에게[㈜ 참). 고대. 15권. 9 : 3(320-322), 17권. 4 : 2(78), 18권. 5 : 1(109)와 5 : 4(136). 그는 의인 시몬(Simon the Righteous)과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된다(H. Lichtenstein, “Die Fastenrolle” ‘Hebrew Union Coll. Ann.’ viii-ix, 1931-1932, p.300)’. 그는 “적을 성전에 들이려는 법령은 무효이다”라는 소리를 성전의 지성소에서 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탈무드에 기록된 사람이다(Sotah 33a).] 데오빌로의 뒤를 잇게 하였다. 시몬에게는 두 명의 형제와[㈜ 요아자르(Joazar : 고대. 17권. 18 : 1(339), 18권. 1 : 1(3)과 2 : 1(26)와 엘르아살(Eleazar : 고대. 17권. 18 : 1(339, 341).] 그의 아버지 보에투스가 있었다. 시몬의 딸은 내가 앞서 밝혔던 것처럼[㈜ 고대. 15권. 9 : 3(320-322).] 헤롯왕과 결혼했다. 따라서 시몬은 그의 형제와 아버지와 같이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대. 12권. 4 : 10(224, 225), 5 : 1(237, 238).] 마게도냐인들의 통치시 오니아스(Oni-as)의 아들인 시몬의 세 아들들의 경우를 반복한 것이다.
3. 도라인이 회당에 황제 동상을 세웠다고 책망받다
이러한 방법으로 대제사장직을 처리한 후에, 아그립바왕은 모든 가구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줌으로써, 자신의 부하에 대하여부성적(父性的)인 사랑으로 갚아줌으로써 예루살렘 주민들의 선의에 보답했다.[㈜ 참). 일반적 관례에 의하여 한 도시의 시민이 그 도시 성벽 축조에 기여하도록 강제한 것을 언급한 미쉬나(Mishnah) ‘Baba Batra’ I : 5.] 그는 또한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실라스(Silas)를 전(全)군대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직후에 거룩함보다는 용감함에 보다 더 큰 가치를 두고서 본성상 무모할 정도로 대담했던 도라(Dora)의[㈜ 갈멜산 가까이에 있는 현(現) 탄투라(Tantura) 마을의 다소 북쪽에 있는 베니게(Phoenicia : 히브리어로는 Dora)의 도시. 참). 아피. 2권. 9(116), 자서. 8(31)등.] 청년들은 가이사의상을 유대의 회당안으로 가져와서 세웠다. 이러한 짓은 조상들의 율법을 전복하는 것과 동등하기 때문에 아그립바왕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수리아의 총독인 푸블리우스페트로니우스(Publius Petronius)를 만나러 가서는 도라 민족을 탄핵했다.[㈜ 참). 고대. 18권. 8 : 2(261)이하.] 페트로니우스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 마찬가지로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러한 율법의 위반은 신성모독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라(Dora)의 지도자들에게[㈜ 여러 사본들에서는 “배교자들”로 표기함. 그러나 페트로니우스(Petronius)가 말하고 있는 이 지도자들과 도라(Dora)의 무책임한 젊은이들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고대. 19권. 6 : 3(303)과 6 : 3(307)에 나오는 언급에서 명백해진다.] 화가나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디베료 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 게르마니쿠스(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의 사신인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는 도라의행정장관들에게 고(告)한다. 너희는 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 게르마니쿠스께서 유대인들이 그들 조상의 관습을 준수하도록 한 칙령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이 칙령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역행한 어처구니 없는 호기를 부렸다. 즉 너희 도라인들은 가이사의 상을 회당안에 가져감으로써 유대인들이 집회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 대해서도 불충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것은 황제의 상은 어떤 다른 장소보다도 본래의 성소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포고령에 따르면 자연법에 의해 각자는 자신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들 고유의 관습을 준수하고 헬라인들과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한 황제의 칙령을 언급한 후에 나자신의 포고령을 언급하는 것이 내게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아구스도의 칙령에 반박하여 그렇게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자에관해서는 위범자들 가운데 유명인사로 여겨지는 사람들 조차도 이러한 행위에 대해 분개하였고 신중하고도 개인적으로 제언하지 않고 폭도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였다고 주장하였으므로 나는그들의 설명을 듣기 위하여 백부장 프로클루스 비텔리우스(Pr-oclys Vitellius)를 보내어 그들을 내 앞으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고위의 지방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놈들이 자신의 동의와 의도에 따라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너희들은 백부장에게 그 죄를 지적해 줌으로써 싸움과 전투로 이끌 여지를 허용하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나의 견해로는 놈들이 그러한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친애하는 아그립바왕과 나는 유대인들이 자기방어의 구실로 한 장소에모여 필사적인 조치를 취하여 어떤 기회로 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전반적 사항에 걸친 로마제국의 장엄한 정책을 통지할 수 있도록 황제께서 알렉산드리아에 포고했던 칙령을 동봉하였다. 비록 그들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지만 나의 가장친애하는 아그립바왕은 아구스도에 의해 부여된 유대인의 특권을 박탈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법 앞에서 공포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대들은 선동과 소란의 구실을 주지 않도록 하고 각자자기 고유의 종교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라”.
4. 아그립바가 시몬 대신 아나누스의 아들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다
이것이 이미 발생했던 율법의 위반을 교정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유사한 범칙행위를 방지하려고 페트로니우스(Petronius)가 취한 조치였다. 아그립바 왕은 시몬 칸데라스(Simon Canther-as)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그 영예에 적합한 아나누스(Ananus)의[㈜ 참). 고대. 18권. 2 : 1(26).] 아들 요나단(Jonathan)을[㈜ 참). 고대. 18권. 4 : 3(95), 5 : 3(123), 고대. 20권. 8 : 5(162-164)에 따르면 그는 행정장관 벨릭스(Felix)의 선동으로 약탈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문장에 대한 각주에서 Mathieu-Hermann은 그의 히브리어 이름 요나단(Jonathan)과 헬라어 이름 데오필루스(Theophilus)가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아나누스(Ananus)의 아들 데오필루스(Theophilus)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이 “하느님이 주셨다” 혹은 “하느님의 선물”을 뜻하고 데오필루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을 뜻하므로 그 의미는 다소 다르다. 더구나 고대. 18권. 5 : 3(123)에서 데오필루스가 요나단의 뒤를 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제사장인 요세푸스가 그런 문제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것 같지 않다.] 복직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러한 영예의 복귀를 환영할 수 없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다. “오! 왕이시여! 나는 당신에의해 영화롭게 된 것이 기쁩니다. 그리고 비록 신께서 내가 대제사장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에 따라 나에게 수여된 이러한 최고의 보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나는 이전에 거룩한 제복을 입은 것에 만족하고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시 복직된다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거룩하게 그 제복을 입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께서나보다 그 영예에 더 적합한 다른 사람을 원하신다면 통고할 수있습니다. 오! 왕이시여! 나는 하느님과 황제께 대해서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한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그 영예에 적합한 사람으로 그를 추천합니다” 아그립바왕은 이 말로 인해 기뻤고 요나단의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여 그의 동생 마티아스(Matthias)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다. 이러한 일이 있은지 오래지 않아 페트로니우스(Petronius)는 마르수스(Marsus)의[㈜ 주후 17년의 집정관인 마르수스(C. Vibius Marsus). 19년에 그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부집정관이었다. 그는 42년에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뒤를 이어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참). 고대. 19건. 7 : 2(326), 8 : 1(340-34) 9 : 2(363) ; 20권. 1 : 1(1).] 뒤를 이어 수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