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버니게가 플로루스에게 유대인들을 아껴줄 것을 간청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또한 반란이 진압된 후 어떻게 플로루스가 다시 불씨를 당겼는지에 대하여
1. 여왕 버니게(Bernice)가 플로루스에게 한 청원도 소용없었다
이무렵 아그립바 왕은 부재중이었는데, 네로에게서 신임을 얻었고, 최근 애굽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파견된 알렉산더를[㈜ 이전에 유대 지방의 집정관(전쟁.2권. 11:6(220)의 각주)이자 버니게(Bernice) 형제인 디베료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고대.19권. 5:1 (276)이하).] 축하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갔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의 여동생 버니게(Bernice)는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불법한 행동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그녀는 끊임없이 그녀의 기병대장과 경호원들을 플로루스에게 보내 대학살을 중지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살된 사람의 수나 자신에게 탄원하는 자의 높은 신분도 무시하고, 단지 약탈에서 생기는 이익에 눈이 멀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병사들의 광란이 여왕에게 미쳤다. 그들은 여왕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포로를 고문하고 죽일 뿐 아니라 그녀가 왕궁 안으로 급히 피신하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 죽일 기세였다. 그녀는 왕궁에서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군대가 공격할까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맹세를 이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던 터였다. 왜냐하면 병이나 기타 재난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이 제사를 드리기 전 30일 동안[㈜ 나실인의 서약.참).행21:23-26. 샴마이(Shammai) 학파는 Palestine에서 나실인 서약을 지키는 정결기간을 30일을 정했다. 힐렐(Hillel) 학파는 이보다도 더욱 엄격했다. 미쉬나(Mishina) 나시르(Nasir),iii:6. 쉬러(Schurer)의 인용.] 술을 멀리하고 머리를 단정히 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관습 때문이었다. 이 의식을 수행하고 있던 버니게는 재판정 앞에 맨발로 나아와, 그녀에게 아무런 예우도 보이지 않는 플로루스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탄원하곤 했다.
2. 유대인들의 통곡[주후 66년[㈜ 니이제의 환산법에 따른 수치.]6월 3일]
이와 같은 일이 아르테미시우스(Artemisius) 월 제6일째 되는 날에 발생하였다. 다음날 절망에 휩싸인 군중들은 상부 광장(Upper agora)으로 모여들어 죽은 자들을 위해 심히 슬퍼하면서, 플로루스에 대한 저주를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돌발 사태에놀란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고 군중의 한사람 한사람의 발 앞에 엎드리며, 제발 자제하여 플로루스를 자극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결국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만행을 보기까지는 참아내었다. 군중들은 그들에게 호소하는 자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플로루스가 그들에게 더 극악한 행위를 범하지 않고 살려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 속에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의 권고를 따랐다.
3. 플로루스는 가이사랴에서 2개 보병대를 데려옴
총독은 소요가 진정된 것에 화가 나서, 다시 소요에 불을 놓을 목적으로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을 불러모으고 백성들이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뜻을 증명할 단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곧 두 보병대(300~600명)로 가이사랴로부터 오고 있을때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그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동안, 플로루스는 그 부대의 백부장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인사에 답례하지 말도록 지시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경멸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무기를 사용하라고 말하였다. 한편백성들을 성전에 모이게 한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으로 오는 로마군인들을 맞이하도록 권유하고 그 병사들을 정중하게 영접하여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을 방지하자고 설득하였다. 이 충고에 대해 혈기 왕성한 무리들은 따르기를 거절하였고 희생된 자들에대한 기억에 치를 떤 군중들은 좀더 과격한 쪽으로 기울었다.
4. 유대인들이 플로루스의 제안을 수락하도록 권유하는 제사장
그때 성스러운 기명(器皿)을 들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입는 제사장복을 입은 모든 제사장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과하프를 타는 자들과 악기를 지닌 성가대원들이 무릎을 꿇고 온마음을 다해 백성들에게, 그들을 위해 이 성스러운 치장용품들이 보존되고 하느님의 성전 보물 창고가 약탈당하지 않도록 로마 사람들을 화나게 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심지어 대제사장들도 그들의 머리 위에 재를 뒤집어 쓴 모습이 보였으며, 그들의드러난 가슴과 찢어진 의복도 보였다. 그들은 귀족들 한사람 한사람 호명하여 개인적으로 호소하였고, 백성들에게는 전체적으로 사소한 일로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서 이 나라를 약탈하기에 열심인 그들에게 빌미를 주어 나라를 넘겨주지 말라고 호소하였다. 제사장들은 이렇게 설득했다. \”결국 군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영접을 받는다 해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영접하러 나가지 않는다고 하여 과거 사건에 무슨 보상이됩니까? 반대로 우리가 로마군인들을 전례대로 정중하게 맞는다면, 플로루스로부터 모든 적대 행위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될 것이며, 우리나라를 되찾고 학대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 안되는 반역자에 의해 이끌린다면 얼마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꼴입니까? 지금은 오히려 다수의 힘으로 이 불만 세력을 합리적인 정책쪽으로 강제로라도 합류하게 해야 할 때입니다.\”
5. 부대들의 영접과 첫 충돌
이 간언(諫言)에 의하여 제사장들은 군중들을 회유하고, 반란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존경심에호소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그후 그들은 조용한 가운데 정해진형식에 따라 그 군대를 맞이하러 나아가 들어오는 군대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전혀 반응이 없자, 반란자들은 플로루스를 비난하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공격하라는 신호가 되었다. 순간적으로 백성들을 둘러싼 군인들은진압봉으로 내려치기 시작하였고, 달아나는 자들은 기병들이 뒤쫓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 사람들의 공격에 쓰러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동포들에 깔려 죽음을 당하였다. 성문 근처에서의 참상은 끔찍하였다. 각자가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도주가 지체되었다. 넘어진 사람들의 운명은 무시무시하였다. 쓰러진 채로 군중들에 의해 짓밟혀 질식하고 그들의 몸에 난도질 당한 것같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친척들이 매장하려 해도 누구인지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군인들은 도망자들을 뒤쫓아 그들의 손에 걸리는 자는 누구든지 무자비하게 내리쳤고, 벳새다(Bez-etha)라고[㈜ 혹은 아그립바Ⅱ세의 미완성 성벽 내에 들어 있는 최북단 외곽지역인 \”신도시\”(전쟁.5권. 4:2(151)이하).] 불리는 지역을 통해 백성들에게 돌진하여, 강제로길을 내게 한 뒤 성전과 안토니아(Antonia) 망대를 점거하려 하였다. 같은 목적을 지닌 플로루스도 왕궁에서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와 망대에 접근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막혀 꼼짝도 못하고 백성들은 방향을 그에게 돌려 그의 진출을 막았다. 지붕에올라간 자들은 로마 사람들을 계속 공격하자, 위로부터 날아오는 무기들에 압도당하고 백성들 사이로 길을 낼 수 없었던 병사들은 왕궁에 인접한 그들의 진영으로 퇴각하였다.
6. 유대인들은 안토니아와 연결된 회랑을 부수었다
그러나 플로루스가 다시 공격하여 안토니아 요새를 점거하고 성전까지 점령하게 될까 두려워한 유대인 반란의 무리들은 두 건물들을 연결시키는 회랑(回廊)에 올라가 그 연결 부분을 끊어버렸다. 이 작전은 플로루스의 욕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탐내었던 것은 하느님의 보물들이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안토니아를 점거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 회랑이 끊어져 버린 이상 그의 열정은 제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원로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신은 그 성을 단념했다고말하며, 그들이 원하는 수비대를 남겨놓겠다고 말하였다. 이에대답하기를, 그들은 완전한 질서를 유지토록 할 것이며, 그가 하나의 부대를 남겨놓되 백성들이 그들이 당한 고통으로 원한을품고 있을 것이므로 이 전쟁에 참여치 아니한 부대를[㈜ 다시 말하자면 플로루스(Florus) 자신이 그 도시 안으로 데려 왔던 군부대로서(296) 도시의 상부 시장을 약탈하였다. 플로루스는 가이사랴로부터 막 도착한 군부대 중에서 하나를 남겨 두었다.] 남겨놓는다면 혁명을 막는 일에 노력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부대를 교체하고 그의 병력의 나머지 인원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돌아갔다.

제 15 장
버니게가 플로루스에게 유대인들을 아껴줄 것을 간청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또한 반란이 진압된 후 어떻게 플로루스가 다시 불씨를 당겼는지에 대하여
1. 여왕 버니게(Bernice)가 플로루스에게 한 청원도 소용없었다
이무렵 아그립바 왕은 부재중이었는데, 네로에게서 신임을 얻었고, 최근 애굽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파견된 알렉산더를[㈜ 이전에 유대 지방의 집정관(전쟁.2권. 11:6(220)의 각주)이자 버니게(Bernice) 형제인 디베료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고대.19권. 5:1 (276)이하).] 축하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갔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의 여동생 버니게(Bernice)는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불법한 행동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그녀는 끊임없이 그녀의 기병대장과 경호원들을 플로루스에게 보내 대학살을 중지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살된 사람의 수나 자신에게 탄원하는 자의 높은 신분도 무시하고, 단지 약탈에서 생기는 이익에 눈이 멀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병사들의 광란이 여왕에게 미쳤다. 그들은 여왕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포로를 고문하고 죽일 뿐 아니라 그녀가 왕궁 안으로 급히 피신하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 죽일 기세였다. 그녀는 왕궁에서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군대가 공격할까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맹세를 이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던 터였다. 왜냐하면 병이나 기타 재난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이 제사를 드리기 전 30일 동안[㈜ 나실인의 서약.참).행21:23-26. 샴마이(Shammai) 학파는 Palestine에서 나실인 서약을 지키는 정결기간을 30일을 정했다. 힐렐(Hillel) 학파는 이보다도 더욱 엄격했다. 미쉬나(Mishina) 나시르(Nasir),iii:6. 쉬러(Schurer)의 인용.] 술을 멀리하고 머리를 단정히 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관습 때문이었다. 이 의식을 수행하고 있던 버니게는 재판정 앞에 맨발로 나아와, 그녀에게 아무런 예우도 보이지 않는 플로루스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탄원하곤 했다.
2. 유대인들의 통곡[주후 66년[㈜ 니이제의 환산법에 따른 수치.]6월 3일]
이와 같은 일이 아르테미시우스(Artemisius) 월 제6일째 되는 날에 발생하였다. 다음날 절망에 휩싸인 군중들은 상부 광장(Upper agora)으로 모여들어 죽은 자들을 위해 심히 슬퍼하면서, 플로루스에 대한 저주를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돌발 사태에놀란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고 군중의 한사람 한사람의 발 앞에 엎드리며, 제발 자제하여 플로루스를 자극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결국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만행을 보기까지는 참아내었다. 군중들은 그들에게 호소하는 자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플로루스가 그들에게 더 극악한 행위를 범하지 않고 살려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 속에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의 권고를 따랐다.
3. 플로루스는 가이사랴에서 2개 보병대를 데려옴
총독은 소요가 진정된 것에 화가 나서, 다시 소요에 불을 놓을 목적으로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을 불러모으고 백성들이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뜻을 증명할 단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곧 두 보병대(300~600명)로 가이사랴로부터 오고 있을때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그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동안, 플로루스는 그 부대의 백부장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인사에 답례하지 말도록 지시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경멸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무기를 사용하라고 말하였다. 한편백성들을 성전에 모이게 한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으로 오는 로마군인들을 맞이하도록 권유하고 그 병사들을 정중하게 영접하여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을 방지하자고 설득하였다. 이 충고에 대해 혈기 왕성한 무리들은 따르기를 거절하였고 희생된 자들에대한 기억에 치를 떤 군중들은 좀더 과격한 쪽으로 기울었다.
4. 유대인들이 플로루스의 제안을 수락하도록 권유하는 제사장
그때 성스러운 기명(器皿)을 들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입는 제사장복을 입은 모든 제사장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과하프를 타는 자들과 악기를 지닌 성가대원들이 무릎을 꿇고 온마음을 다해 백성들에게, 그들을 위해 이 성스러운 치장용품들이 보존되고 하느님의 성전 보물 창고가 약탈당하지 않도록 로마 사람들을 화나게 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심지어 대제사장들도 그들의 머리 위에 재를 뒤집어 쓴 모습이 보였으며, 그들의드러난 가슴과 찢어진 의복도 보였다. 그들은 귀족들 한사람 한사람 호명하여 개인적으로 호소하였고, 백성들에게는 전체적으로 사소한 일로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서 이 나라를 약탈하기에 열심인 그들에게 빌미를 주어 나라를 넘겨주지 말라고 호소하였다. 제사장들은 이렇게 설득했다. “결국 군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영접을 받는다 해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영접하러 나가지 않는다고 하여 과거 사건에 무슨 보상이됩니까? 반대로 우리가 로마군인들을 전례대로 정중하게 맞는다면, 플로루스로부터 모든 적대 행위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될 것이며, 우리나라를 되찾고 학대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 안되는 반역자에 의해 이끌린다면 얼마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꼴입니까? 지금은 오히려 다수의 힘으로 이 불만 세력을 합리적인 정책쪽으로 강제로라도 합류하게 해야 할 때입니다.”
5. 부대들의 영접과 첫 충돌
이 간언(諫言)에 의하여 제사장들은 군중들을 회유하고, 반란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존경심에호소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그후 그들은 조용한 가운데 정해진형식에 따라 그 군대를 맞이하러 나아가 들어오는 군대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전혀 반응이 없자, 반란자들은 플로루스를 비난하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공격하라는 신호가 되었다. 순간적으로 백성들을 둘러싼 군인들은진압봉으로 내려치기 시작하였고, 달아나는 자들은 기병들이 뒤쫓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 사람들의 공격에 쓰러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동포들에 깔려 죽음을 당하였다. 성문 근처에서의 참상은 끔찍하였다. 각자가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도주가 지체되었다. 넘어진 사람들의 운명은 무시무시하였다. 쓰러진 채로 군중들에 의해 짓밟혀 질식하고 그들의 몸에 난도질 당한 것같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친척들이 매장하려 해도 누구인지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군인들은 도망자들을 뒤쫓아 그들의 손에 걸리는 자는 누구든지 무자비하게 내리쳤고, 벳새다(Bez-etha)라고[㈜ 혹은 아그립바Ⅱ세의 미완성 성벽 내에 들어 있는 최북단 외곽지역인 “신도시”(전쟁.5권. 4:2(151)이하).] 불리는 지역을 통해 백성들에게 돌진하여, 강제로길을 내게 한 뒤 성전과 안토니아(Antonia) 망대를 점거하려 하였다. 같은 목적을 지닌 플로루스도 왕궁에서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와 망대에 접근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막혀 꼼짝도 못하고 백성들은 방향을 그에게 돌려 그의 진출을 막았다. 지붕에올라간 자들은 로마 사람들을 계속 공격하자, 위로부터 날아오는 무기들에 압도당하고 백성들 사이로 길을 낼 수 없었던 병사들은 왕궁에 인접한 그들의 진영으로 퇴각하였다.
6. 유대인들은 안토니아와 연결된 회랑을 부수었다
그러나 플로루스가 다시 공격하여 안토니아 요새를 점거하고 성전까지 점령하게 될까 두려워한 유대인 반란의 무리들은 두 건물들을 연결시키는 회랑(回廊)에 올라가 그 연결 부분을 끊어버렸다. 이 작전은 플로루스의 욕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탐내었던 것은 하느님의 보물들이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안토니아를 점거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 회랑이 끊어져 버린 이상 그의 열정은 제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원로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신은 그 성을 단념했다고말하며, 그들이 원하는 수비대를 남겨놓겠다고 말하였다. 이에대답하기를, 그들은 완전한 질서를 유지토록 할 것이며, 그가 하나의 부대를 남겨놓되 백성들이 그들이 당한 고통으로 원한을품고 있을 것이므로 이 전쟁에 참여치 아니한 부대를[㈜ 다시 말하자면 플로루스(Florus) 자신이 그 도시 안으로 데려 왔던 군부대로서(296) 도시의 상부 시장을 약탈하였다. 플로루스는 가이사랴로부터 막 도착한 군부대 중에서 하나를 남겨 두었다.] 남겨놓는다면 혁명을 막는 일에 노력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부대를 교체하고 그의 병력의 나머지 인원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