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권 제 4장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

 


제 4 장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



 1.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



 예루살렘은 3개의 성벽으로 요새화 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한쪽은 접근하기 힘든 계곡으로 막혀 있다. 이곳은 한 겹의 성벽만으로도 충분했다. 예루살렘은 중앙계곡에[㈜ 근대의 도시에서는 엘-와드(El-Wad)로 알려진 앝은 계곡 티로포에온(Tyropoeon).] 의해 나누어지는 2개의 서로 마주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계곡에서 줄지어 늘어서 집들의 행렬이 끝난다. 상부도시가 세워진 한쪽 언덕은 더 높았으며, 다른 쪽 언덕보다 비탈이 더 쭉 뻗었다. 성전의 첫 건축자인 솔로몬의 부친인 다윗왕이 \’요새(Sfrong hold)\’라[㈜ 참).삼하 5 :7.] 이름 붙인 성전을 우리는 상부 집회소(upper agors)라[㈜ 대다수의 고고학자는 지금 요세푸스가 본문과 다윗의 여부스(Jebus)점령기사(전쟁.7권. 4 : 1(65)에서 고대 형세학 지형(地形學)에 관하여 실수를 하고 그리고 \’다윗의 성\'(The City of David)혹은 \’시온\’은 서쪽이 아니라 동정녀의 샘(Virgin\’s spring) 위 오펠(Opher)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동쪽 언덕 위에 있다고 주장한다(G.A.Smith. \’Jersalem\’ I. 134이하. 161이하). 사가(史家)의 실수는 현대 전문 술어에 계속된다. 즉 현재의 성(城)에 있는 소위 다윗의 망대(David;s Tower)는 파사엘(Phasael)에 있는 헤롯 망대의 기반위에 세워진 야퍄(Jaffa)문 가까이에 서있다.] 부른다. 두 번째 언덕은 아크라(Acr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하부도시(Lower City)를 받치고 있는 깎아 세운 듯한 산등성이였다.[㈜ 문자적으로 \’하현달(gibbous)\’.] 이 두 번째 언덕 맞은 편에 세 번째 언덕이 있었는데, 아크라보다 더 낮고 넓은 계곡에 의해 나누어져 있었다. 하스모네안왕조(the Hasmonaeans)가 통치할 때, 도시와 성전을 연결하려고 계곡을 메꾸었으며 성전의 전망을 가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밑을 깎아서 아크라 높이로 낮추었었다.[㈜ 참).전쟁. 1권. 2 : 2(50)과 고대. 13권. 6 :7(215-217)에서의 보다 상세한 기록 ; 두 개의 참고 구절에서는 시몬(Simon)이 Acra땅을 고르게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시몬이 그것을 요새화했다는 마카비1서 14 : 37과는 조화될 수 없다. 요세푸스는 그의 당대 2세기 전에 사라진 rjut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의 기록은 어떤 점에 있어서 잘못 되었을 것이다. 그 작업은 힐카누스 1세(Hycanus Ⅰ)가 했으며, 그 성전의 북서쪽에 위치한 바리스(Baris)나 성의 축조가 남쪽에 자리한 수리아 아크라의 몰략을 가져왔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Smith, \’예루살렘\’, I : 159., Schurer, \’G.J.V.\'<3판>, I : 247).] 치즈 만드는 자의 계곡(valley of the Cheese makers)은[㈜ 티로포에온(Tyropoeon).] 상부도시의 언덕과 하부도시의 언덕을 가르는 계곡으로 실로암(Siloam)까지 연결되어있다. 실로암은 맑고 풍부한 물이 있는 샘이다. 도시가 세워진 2개의 언덕 외곽은 깊은 계곡으로 에워싸여 있고 그 양쪽에 가파른 절벽이 있어 시내로 접근할 수 없게 만든다.



[제 1 혹은 고대성벽]



 3개의 성벽 중 가장 오래된 성벽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가장 접근하기 힘든 성벽이다.그러나 위치상의 잇점 외에도 그 성벽은 튼튼하게 세워졌으며,다윗, 솔로몬 그 밖의 후계 왕들이 그 성벽 건설 작업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성벽은 북쪽으로[㈜ 북서쪽에서.] 히피쿠스(Hippicus)라[㈜ 아래에 나온다. 전쟁. 5권. 4 : 3(163).] 부르는 망대에서 시작하여 키스투스(Xystus)[㈜ 경기장은 대중 연설 회장으로 이용되었으며, 성전과는 교각으로 연결되었다. 전쟁.2권. 16 : 3(344)를 참고하라.]까지 이르며, 의사당(council-chamber)을[㈜ 성전 구역의 남쪽 내부에 있거나 인접해 있는 강당에서 산헤드린(Sanhedrin)은 회합을 가졌다. 미쉬나(Mishna)의 미도트(Middoth),4절(홀쯔만<Holtzmann>), 쉬러(Schurer), \’G.J.V.\'(3판) ii : 211 ; 로마인들에 의한 소각은 6권 354에서 언급되었다. 미쉬나에 표기된 Lishkath hag-Gazith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쪼개진 석실(石室)이라기 보다 \’실내 경기장 옆 방\’을 의미한다 ; 70인역에서는 Gazith는 xustov\”(실내경기장)를 나타낸다(쉬러<Schurer>).] 통해 성전의 서쪽의 회랑에서 끝난다. 이 성벽은 똑같은 지점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벳소(Bethso)라는 곳을 지나 내려가서 에세네파의 문(gate of the Essenes)[㈜ 확인되지 않음.]까지 이르러서 실로암 연못 위 남쪽으로 돌아서 다시 동쪽으로 솔로몬 연못(Solomon\’s pool)으로 내려가서 오프라스(Ophlas)라는[㈜ 성경상의 Ophel(=\”둥근 언덕\”), 느3:26등 ; G.A.Smith경은 시온(Sion)과 동의어로 본다. \’Jerusalem\’, I ; 153.] 곳을 통과하여, 마지막으로 성전의 동쪽회랑과 이어졌다.



 [제2성벽]



 두 번째 성벽은 겐나트(Gennath)라는[㈜ 아마도 \’뜰 현관\'(Garden Gate)일 것이다. 두 번째 성벽과 같이 그것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어떤이들은 히피쿠스(Hippicus)와 파사엘(Phasael)사이에 위치했다고도 하며, 다른 이들은 파사엘의 망대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 위의 책 i:243.] 제일 성벽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의 북쪽 관할구만을 에워싸면서 안토니아(Antonia)까지 이어졌다.



[제3성벽 혹은 아그립바 성벽]



 제3성벽은 히피쿠스 망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푸세피우스망대까지 이르고, 헬레나 기념비(아디아베네(Adiabene의 왕비이자 이자데스(Izates)의 딸)[㈜ 전쟁.5권.2:2(55).] 맞은 쪽으로 내려가서 왕실의지하 동굴을 지나 훌러의 무덤(Fuller\’s tome) 건너편에 있는모둥이탑 주변을 돌아서 옛 성벽을 통해 마지막으로 기드론 골짜기까지 이어졌다.[㈜ 세피누스(Psephinus)를 따르는 세 번째 성벽의 길은 확실치 않다;어떤이들은 현재의 북쪽 성벽과 동일시하고, 다른 이들은 세 번째 성벽이 훨씬 더 북쪽에 있는 보다 넓은 지역을 포함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발굴(1926)로 볼 때 후자의 가설이 타당하다.] 이 성벽은 아그립바가 세운 것인데, 완벽하게 막히지 않은 성벽이며 예루살렘시까지 에워싸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시내는 주민들로 넘쳐나서 점점 더 성벽 밖으로 밀려 나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성진 북쪽의 언덕[㈜ 상부 도시가 있는 곳에.]까지 갔으며,심지어 제4 언덕이 집으로 가득찰 정도까지 퍼져 나갔다. 벳새다(Bezetha)라 불리는 이 언덕은 안토니아와 반대 쪽에 위치해있으나 깊은 도랑에 의해 안토니오와 갈라져 있었다. 이 도랑은언덕에서 안토니오까지 갈라 놓으려는 목적으로 팠으며, 따라서한 번에 접근하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도랑의 깊이는 탑의 높이를 더 높게 만들었다. 최근에 세워진 지역은 유대어로 벳새다(Bezetha)라 부리고, 헬라어로는 신 도시(New Town)라고[㈜ 전쟁. 2권. 530에서는 보다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그 지역은 벳세다(Bezetha)와 또한 \’신도시\'(카에노폴리스<Caenopolis>)로 불리운다.\” 벳새다는 아마도 \’올리브의 집\'(beth-zaith)을 의미하며(Smith, \’Jerusa-lem\’.i :224 참고) \’신도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사한 어원학적 진술이 고대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번역된다. 현재 왕의 아버지인 아그립바 I 세는 이지역의 주민들이 방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앞에서 말한 성벽을 쌓기시작했었다. 그러나 아그립바 I 세가 계획한 성벽의 광대한 규모를 클라우디우스 가이사(Claudius Caesar)가 보고 혁명이나반역을 꾀하는 것으로 의심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그립바I 세는 단지 기초만 만들어 놓고 중단하였다. 성벽 건축을 시작했을 때 처럼 계속 진행되었다면 예루살렘은 접근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시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벽은 가로 20규빗(Cubit) 세로 10규빗의 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벽은 아주 총총히 연결되어 있어 쇠도구로 팔 수도 없었고, 공성장비로 공격해도 끄떡없을 정도의 성벽이었다. 성벽의 폭도10규빗이다. 만일 아그립바 I 세의 야망이 좌절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넓은 성벽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그 성벽이 유대인들에 의해 급히 세워졌다 해도 20규빗의 높이로 쌓아올렸고, 게다가 2규빗의 흉곽과 3규빗 높이의 보루를 합해 전부 25규빗의 높이를 이루었다.



 3.성벽 위에 세워진 망대에 대하여



 성벽 위에는 넒이 20규빗, 높이 20규빗으로 성벽처럼 튼튼한 정사각형의 망대가 세워졌다. 그 망대의 접합부분이나 돌의 아름다움은 성전 못지않았다. 이러한 단단한 높이 20규빗의 돌 건축 위로 거대한 방들이 있고, 그 위로 위층 방들과 빗물을 받는 물통이 있고, 각 망대들은 넓은 나선형 계단이 있다. 이런 망대들 가운데 제3성벽은 90개의 망대를 갖고 있었으며, 200규빗의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가운데 성벽 위에는 14개의 망대가 세워져 있으며, 오래된 성벽은 60개의 성벽이 있다. 예루살렘의 성둘에는 33퍼얼롱이다.[㈜ 33스타데스(stades)는 약3.8마일이다. 주전 2세기에 \’수리아의 토지 측량가\'(유세비우스와 동시대인. \’Praep.Ev\’.ix:36)는 그 둘레를 27스타데스로 추정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40~50스타데스라고 과장해서 말했다. 아피. 1권.22) (197)을 참고하라. 주후. 1세기의 것으로는 보다 큰 도시의 둘레가 되는 이둘레는 현존하는 북쪽 벽의 것 보다 셋째 성벽이 더 북쪽에 위치했음을 보여준다.]



[프세피누스 망대]



 그러나 제3성벽은 전체적으로 훌륭하게 이어졌고 프세피누스망대는 훨씬 더 훌륭했는데, 성벽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그 맞은 편에 티투스가 진을 쳤다. 왜냐하면 프세피누스 망대는높이가 70규빗으로 아라비아와 바다까지 이르는 히브리의 경계선을 거의 포함하는 전망을 해뜰 때 볼 수 있다. 프세피누스 망대는 8각형이다.



[헤롯이 세운 세 망대]



 프세피누스 망대 맞은 편으로 히피쿠스(tower Hippicus)망대가 있는데, 다른 2개의 탑과 가까이에 있었다. 이 망대들은 제1성벽에 헤롯왕이 세운 탑들로서 아름다움과 튼튼한 규모에있어 세계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왜냐하면 헤롯은 천성적으로 아량이 있고 예루살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이런 망대들을 훌륭히 건설해서 개인적 감정을 만족시키려고 생각했다. 헤롯왕은 그 탑에 형제나 친구, 아내의 이름을 따서 불렀으며,[㈜ 바사엘(Phasael), 히피쿠스(Hippicus, 헤롯통치에 관한 서술에서 간과된 것이 이상함), 마리암메(Mariamme).] 가장 애정이 많이 가는 형제, 친구, 아내에게 탑을 지어 기념으로 헌정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헤롯이 아내를 사랑한 나머지 살해했으며[㈜ 전쟁. 1권(443).] 친구나 형제들은 맹렬한 전투에서 잃어버렸다.[㈜ 파르티아인(Parthian)이 잡아가 죄수가 된 바사엘(Phasael)은 자살했다. 전쟁.1권(271) ; 다른 사람들의 종말에 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다.]



 [히피쿠스 망대]



 히피쿠스 망대는[㈜ 현재 성의 북서쪽 망대(Smith, \’Jerusalem\’, I:240)일 것이다. 세 개의 헤롯 망대는 후대의 찬사를 위해 디도(Titus)에 의해 보존되었다. 전쟁. 7권 (1)이하.] 그의 친구의 이름을 따서 헌정한 것인데,정사각형으로 길이와 넓이가 각각 25규빗이며, 높이가 30규빗의전체적으로 단단한 건물이었다. 이 단단하고 총총한 석조건물위에 빗물을 받아 저장하는 깊이가 20규빗이나 되는 저장소가있다. 그 위에는 25규빗 높이의 방이 있었는데 지붕은 여러 가지색깔의 이중지붕이었다. 그 위에 2규빗되는 작은 탑과 3규빗 높이의 흉벽이 있어서 전체 높이가 80규빗에 이르고 있다.



[파사엘 망대]



 2번째 망대는 파사엘(Phasael)이라고[㈜ 현재 성의 북서쪽 망대는 \’다윗의 망대\'(David\’s tower)로 잘못 불려졌다. 그러한 치수는 요세푸스의 대략적 진술(40규빗의 입앙은 약600피트이다)에 접근하는데, 실제로 65.6피트(높이)x55.78피트(넓이)x70.21피트(길이)이다. 위의 책. 191.] 헤롯의 형의 이름을따 불렀으며, 길이와 넓이가 각각 40규빗이며, 단단하고, 견고한기초석의 높이도 40규빗이다. 그 망대 위 주위에는 10규빗의 회랑이 있었으며, 흉장과 흉벽으로 인해 방어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 위로 회랑 가운데에 또 다른 망대가 세워져 있는데, 욕실을 갖춘 화려한 방들이 있어서 왕궁의 모습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꼭대기에는 흉벽과 흉장이 있었고, 전체 높이는 90규빗 쯤되었다. 이 망대는 형태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등불을 비춰주는 파로스망대(Phanos)와 비슷한데[㈜ 전쟁. 6권(613).] 그 둘레는 훨씬 컸다. 이제 이 망대는 폭정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시몬의 자리가 되었다.



 [마리암메 망대]



 3번째 망대는 마리암메(Maniamme)망대로[㈜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사엘(Phasael)의 동쪽 지역인 것이 분명하다.]-이것은 왕비의 이름을 따서 붙힌 망대이다. 높이가 넓이 길이가 모두 20규빗의 규모로 단단한 건물이다. 망대 위쪽은 다른 망대들에 비해 좀더 화려하고 호사스럽다. 왜냐하면 왕은 외면상으로는 여자의이름을 따서 붙힌 망대가 남자의 이름을 따서 붙힌 망대보다 화려해야 하며, 건물의 튼튼함에 있어서는 남자의 이름을 따서 붙힌 망대는 여자 이름의 망대보다 더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3번째 망대의 전체높이는 55규빗이다.



 4. [헤롯 궁전에 대하여]



 3개의 망대들의 높이는 그 위치 때문에 훨씬 더 커 보였다. 왜냐하면 3개의 망대가 있는 제1성벽은 높은 언덕에 세워졌고 게다가 언덕 위에 30규빗 높이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언덕 위에 망대까지 세워졌기 때문에 더 높아 보이는 것이다. 또한 돌들의 규모도 엄청났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보통 흑석이나 표석(漂石)과 같이 사람들이 운반할 수 있는 돌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흰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건물이다. 각 돌들의 길이는 20규빗이며,너비는 10규빗, 높이는 5규빗이며 하나하나가 아주 섬세하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망대들이 마치 하나의 자연석과 같았으며, 후에 석공들이 모서리와 귀퉁이를 손으로 반질반질하게 닦았기 때문에 아주 멋진 건물이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음새가 눈에 띄지 않았다.

 북쪽 성벽에 있는 이 망대들의 안쪽에 왕의 궁전이 있었다. 이 헤롯의 궁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그사치나 장식들이 다른 어떤 건축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헤롯 궁전도 30규빗의 높이로는 사방이 성벽으로 완전히 둘러쳐져있었으며, 같은 간격으로 장식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어마어마한 연회석을 갖추고 있었고, 100명의 손님들을 위한 침실도 있었다. 그 안의 기구들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고, 각 나라의 희귀한 각종 보석들이 풍부히 장식되어 있었으며, 장의 경우 표면의 장식이 화려함은 물론 대들보의 길이 또한 어마머마했다. 방들은 다양하게 내부장식이 되어있고, 모든 가구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물건들은 금이나 은으로 되어 있었다. 많은 둥근 회랑들이 사방에 있었으며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기둥들은 각각 다르고 궁전앞 넓은 마당은 모두 잔디밭이었다. 갖가지의 나무들이 길을 따라 심어져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깊은 운하가 있었다. 곳곳에 샘들이 동상들과 함께 군데군데 있었으며, 그 동상들에서 물이 뿜어 나왔고 그 분수 주위에는 길들이 비둘기들을 위한 수많은 비둘기 집들이 있었다. 그러나 왕궁을 적절히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며 성전에 강도들이 불을 질러 파괴한 것을 생각하나 안타깝다. 왜냐하면 그 왕궁은 로마군이 불지른 것이 아니라 이미 말했듯이[㈜ 전쟁. 2권. 17 : 7(430-440) ; 반란자들은 먼저 안토니아(Antonia)를 방화하고서 헤롯 궁전에 있는 로마 주둔군을 포위했으며, 그들의 진영을 불태웠다(주후 66년 9월).] 성 안에 있던 공모자들이 반역하는 개시 신호로 불을 지른 것인데, 안토니아에서 처음 붙은 대화재는 궁전과 3개의 망대 지붕까지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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