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문 Ⅲ 유대국의 기원과 마지막 유대 전쟁에 대한 타키투스(Tacitus)의 자세한 기록들 ; 유세푸스의 ‘유대고대사'(Jewish Antiquities)에 반대하여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마지막 유대 전쟁에 대한 기록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Jewish War)를거의 모두 직접 인용

 


 논  문  Ⅲ




유대국의 기원과 마지막 유대 전쟁에 대한 타키투스(Tacitus)의 자세한 기록들 ; 유세푸스의 ‘유대고대사'(Jewish Antiquities)에 반대하여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마지막 유대 전쟁에 대한 기록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Jewish War)를거의 모두 직접 인용한 것이 확실함




제 1장




 타키투스(Tacitus)는 로마의 유명한 역사가로서, 유대국의기원, 유대의 지지(地誌)와 케스티우스(Cestius), 베스파시안(Vespasian), 티투스(Titus)통치 때의 최후 유대 전쟁에 관하여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폭넓게 또한 전문적으로 기술한 사람이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는 둘다 로마 황제인 베스파시안, 티투스, 도미티안(Domitian)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생각하였던 사람들이다. 요세푸스가 로마에서 헬라어를 공부하고 헬라 서적들을읽으며, 당시 로마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쓰여지던 언어인 헬라어로 저술활동을 할 때, 혹은 바로 그 직후에 타키투스는 로마의뛰어난 변증가요 역사 저술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타키투스가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잘 모를 것이라는 가정은 거의불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유대와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의 사건들에 대한 그들 양자의 설명을 동시에 비교해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은 매우 놀라운 역설로다가온다. 학자들이 그것도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글을 편집까지 한 학자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두 글들 가운데 언급된 시간과장소에 대한 두 저자 사이의 유사성이나, 다루는 주제와 배경들의 동일성들에 대하여 침묵을 지켜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독특한 사건들, 특별히 유대 지역과 유대국에서만 존재했던 것과 같은 사실들은 요세푸스로부터가 아니면 다른 어떠한외국 저자부터도 얻기가 거의 힘든 것들이다. 그래서 이 이상한 침묵은 특별한 변명이 없는 한 거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유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타키투스가 그런 유대의 사건들에대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저자는 우리가 아는 한 두 사람이더 있기는 하다. 하나는 요세푸스와 동시대 인물로서 유대 역사가인 디베랴의 유스투스(Justus of Tiberias)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안토니우스 율리아누스(Anonoius Julianus)로서 미누티우스벨릭스(Minutius Felix)가 그의 저술 ‘옥타비우스'(Octavius)에서 요세푸스와 동일한 주제를 기술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인물이다. 이 글은 필자가 다른 지면에서 언급하였다.(논문I)그러나 타키투스가 유대의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디베랴의 유스투스로부터 얻은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인용한포티우스(Photius)의 증언(Cod. xxxi)에서 본대로, 타키투스가 디베료(Tiberius)황제 통치하에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술한 본문이유스투스의 글에는 없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 율리아누스는 그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유대인이아닌 로마인이다. 그는 요세푸스에 의해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아마도 그는 타키투스보다 유대에 관한 지리나 역사에 대해결코 더 잘아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그는 타키투스 이전에 역사를 기술했던 진짜 역사가가 아니라 오히려 후에 요세푸스의 글을 요악 발췌했던 사람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 일곱권이그처럼 잘 알려진 그 시기에 타키누스와 같은 정확한 저술가가그처럼 빈약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들에게 흥미를 가졌을리 없다. 당시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로마에서 명성을 얻고있었으며, 황제인 베스파시안, 티투스, 아그립바왕(Agrippa),아켈라오왕(Archelaus), 칼키스(Chalcis)의 왕인 헤롯 등에 의해서 입증을 받고 추천을 받았었다. 또한 그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책들은 로마의 공공 도서관에 비치되었다. 이것은 요세푸스 자신뿐 아니라 유세비우스, 제롬 등에 의해서도 알려진 사실들이다. 우리는 그외에 이러한 명성과입증과 추천을 받은 다른 유대 역사가들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물론 어떤 정보들은 타키투스가 이 전쟁에 관한 로마의 기록에서 얻었을 것이다. 즉 요세푸스가 자신의 ‘자서전'(sect. 65)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스파시안의 전기(戰記, Commentariesof Vespasian)에서 얻었을 수도 있다. 어떤 것들은 전쟁에 관련되었던 로마인들의 진술에서, 또 어떤 것들은 유대 전쟁에 참가했던 나이 먹은 장교들이나 병사들의 기억 속에서 얻었을 것이다. 따라서 타키투스는 이러한 방법으로 약간의 정보를 얻었을것이라고 볼 수 있고, 특별히 요세푸스의 내용과 다르거나 혹은첨가된 내용들이 주로 이러한 방법으로 얻은 정보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보 수집은 전쟁기간 중 3-4년을초과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내용은 그 나라의 지지(地誌)를요약하여 설명하고, 또 그 나라와 관련된 주요 역사적 사실들을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었다. 타키투스의 저서 안에는 그와 요세푸스가 이 마지막 전쟁의 시발점으로 보는, 전쟁 발발전 240년중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시대부터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타키투스는 유대국에 속한 주요 사실(事實)들 곧 모세 시대로부터 혹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시대까지의 큰 사건들에 대해서 로마의 저자들로부터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그들은 매우 한정된 적은 지식밖에는 소유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이교도들은 점차로 정도에서빗나가 부끄럽게도 진리를 왜곡하였던 것이다. 유대국의 기원에대한 타키투스 자신의 설명도 이러한 실수를 하고 있었으므로독자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곧 타키투스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반(反)하게 기술하여그는 직접적으로 그릇된 학설을 말하거나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것이다. 또는 그 사실들을 거짓이나 다름없이 만들어 버리거나실제 일어났었던 사실적인 사건들에 관련된 그 어느것도 거의조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고대사’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장에서 이역사를 논의하면서 더 다루어질 것이다.

 


제 2 장



 이제 우리는 유명한 도시인 예루살렘의 최후의 시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그레데섬(island of Crete)으로부터 나와서 리비아 해변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 사투른(Saturn, 농경의 신)이 쥬피터에 의해서 그의 왕국으로부터 쫓겨났다. 이다(Ida)는 그레데의 유명한 산이다. 그래서 그 산 주변에 사는거주민들은 이대이(Idaei)라 불리웠으며, 고대 그리스가 아닌타국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불리운 이름이 유다이(Judaei, 즉유대인[Jews]라는 이름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이시스(Isis)의 통치 아래 있었던 숫자가 상당히 많았던 애굽의 민족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굽인들은 그들을 놓아주어 짐을 덜기원했으며, 그래서 이 민족은 그들의 지도자인 히에로솔리무스(Hierosolymus)와 유다스(Judas)의 지휘 아래 근처 지역으로이주하였다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케페우스(Cepheus)의 통치 아래서 두려움과 증오로 인해서 그들의 거주지를 옮겨야만 했던 에디오피아인들(Ethiopians)이었다고 한다. 다른 주장도 있다. 곧 그들은 앗수르인들이었다는 것이다.앗수르인들이 땅을 찾아 모여, 애굽 땅의 일부를 얻었다가 다시수리아에 가까운 히브리인들의 땅에 그들의 도시를 세우고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의 기원을 좀더고상한데서 찾는다. 즉 호머의 시에 나오는 유명한 민족인 솔리미(Solymi)가 유대국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이 거기에 세운 도시 이름을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제 3 장



 많은 저술가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동의하고 있다. 애굽에서 극심한 전염병이 발생하여 곧 많은 사람이 감염되었을 때,그들의 왕인 보코리스(Bocchoris)는 함몬(Hammon, 또는 쥬피터)의 신탁을 받으러 가서 신에게 이 악에서 구원해 줄 것을 간구하였으며, 그래서 왕은 신들이 미워하는 전염병에 감염된 자들로부터 나라를 정결케 할 것과, 그러기 위하여 병자들을 다른나라로 추방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래서 그는 샅샅이 뒤져서 병자들을 한데 모아 사막에 버렸다. 버려진 그들은 그곳에서 망연자실 울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추방민들중 모세라 이름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들을 버린 신들이나 인간들의 도움을 구하지 말고 자신을 하늘이 내려준 지도자로 믿어 그들이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하였으며 이에 그들은 동의하였다. 비록 그들은 모든 것에 무지하였지만 무작정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식수의 부족은 그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그들은 큰 실망 가운데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멸망할 것만 같았던 그 때, 야생 나귀떼 한 무리가 풀을 뜯어먹다가 잡목 숲 그늘이 드리워진 바위로 가는 것을 보았다. 모세는 그 근처에 풀이 많을 것이라 짐작하고는 뒤따라 가보았고, 거기에서 많은 물샘들을 발견하였다. 이 물샘들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6일간을 계속 여행했고, 7일째 되던 날 도착한 곳의 주민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도시와 성전이 세워질 땅을 차지하였다.



  제 4 장



 모세는 나라를 자신의 세력 안에 확실히 확보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들의 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새로운 의식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성한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불경스러운 것들이 되었으며 그들이 행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몹시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들은 짐승의 형상(나귀-역자주)을그들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놓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어지러운 환경과 갈증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표인 것이다.

 그들은 함몬(Hammon, 쥬피터[Jupiter])에게 수양을 바쳤다. 황소도 역시 제물로 바쳐졌는데, 이는 애굽인들이 아피스(Apis)라는 이름으로 예배한 것이었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이는 병이 걸리기 쉬운 돼지로 인해 그들에게 가져온 비참한 경험(즉, 전염병-역자주)을기억하기 위해서, 또한 실제로 그들이 불결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긴 기근을 견디어 내야만 했다는 것이, 지금도 여전히하고 있는 그들의 빈번한 금식을 통해 입증된다.

 또한 그들이 땅의 열매들을 훔쳤다는 것은 유대인의 빵 곧 무교병으로부터 입증된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일곱째날 안식하는 것은 그 날이 노동으로부터 [첫번째] 안식을 주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게다가 게으른 삶을 즐기는 것처럼 매 칠년째 되는 해에는 논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투르누스(Saturn)에게 경배한다고 말한다. 또는 아마도 이대이(Idaei)사람들이 이러한 종교의한 부분을 제공했으리라고도 말한다. 이대이인들은[우리가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투르누스는 이대이인들의 국가 신이었다. 다른이유로는 토성(the tar Saturn)이 가장 높은 천체에서 돌며,일곱 별들 중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에너지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방출하는 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천체들이 그들의 힘을 발휘하여 궤도를 도는데 7이라는 숫자에 맞추어서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기도 한다.



  제 5 장



 이 의식들이 처음에 어떤 의미로 시작되었던지간에 옛날부터대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로써 지지를 받고 있다. 그들의 규정은 귀찮고 불결할 뿐더러 부패의 근거가 된다. 조상들의 의식을 경멸하면서도 공물과 세금을 예루살렘에 바쳐서 유대 국가만비대하게 만든다. 자신들 사이에는 항상 신의와 친절을 보이면서도 다른 이들에겐 적의를 품는다. 그들은 의식주에 있어서도다른 민족과 철저히 분리된 민족이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음탕한 국가이지만 그들의 율법에 저촉되지 않아도 외국 여자들과는 관계를 갖지 않는다. 그들은 대대로 할례를 행해 왔으며 이것으로써 다른 민족과 구별되게 한다.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도역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들을 경멸하여 조국을 배반하고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멸시하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자녀를 죽이는 것은 구전으로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종족을 증가시키는 일에는 특별한 열심을 낸다. 또한 그들은 전쟁에서 죽은 자나, 죄로 이하여 죽은 자나 그 영혼이 영원하다고 본다. 그래서 자손은 사랑하고 죽음은 멸시한다.

 그들은 애굽인들로부터 온 풍습대로 시체를 화장하는 대신에매장한다. 애굽인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시체를 다루며, 보이지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신들에대해서는 애굽인들과 반대이다. 애굽인들은 수 많은 동물과 많은 종류의 우상을 숭배한다.

 유대인들은 오직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하나의 신적 존재(one Divine Being, 유일신)를 믿는다.

 그들은 부서질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진 신들의 형상이나 인간 모양의 형상들을 만드는 자를 신성 모독하는 자라고 본다. 그리고 이 유일한 존재만이 최고이며 영원하고, 썩지 아니하며, 변치 않는다는 것을 교리로 내세운다. 따라서 그들의 도시에는 아무 형상이 없으며 성전에도 없다. 왕에게 아첨하거나 황제에게경의를 표하기 위한 형상들도 없다. 그들의 제사장들이 피리(pipe)나 탬버린(timbels)을 연주할 때에는 머리에 담쟁이 덩쿨을 두른다.

 황금으로 된 포도가 성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동방의 정복자인 우리의 조상 바쿠스(Bacchus)를경배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의식은 유쾌하고 축제같은 바쿠스의 의식과는 달리 불합리하고 불결하다.



  제 6 장



 유대의 동쪽 경계는 아라비아에 의해 선이 그어지다. 남쪽에는 애굽이 있고, 서쪽에는 베니게(Phoenicia)와 대해(The [Grear] Sea, 지중해)가 있다. 북쪽으로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수리아의 구역이 있다.

 유대인은 육체도 건강하고 중노동도 잘 견뎌낸다. 비는 잘오지 않으나 토양은 비옥하고 그 수확물은 우리나라의 것과 같이 매우 풍부하다.

 유대에는 우리나라에도 없는 발삼나무(balsam-tree)와 야자나무(Palm-tree)가 있다. 야자나무는 매우 크고 아름다우며 그늘이 진다. 발삼나무는 그리 크지는 않다. 가지가 부풀어 오를때엔 마치 칼로 베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같이 가지를 떤다.그리고 깨진 돌조각이나 조개껍질로 상처를 내어 나오는 즙은건강에 매우 좋다.

 리바누스(Libanus)는 가장 주요한 산이며 매우 높다. 그러나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항상 나무나 눈으로 덮혀 있다. 이 산은 요단과 그 수원에 물을 공급한다. 요단강은 바다로 흘러가지 않고수량이 줄어들지 않은 채 첫째, 둘째 호수를 지나서 세 번째 호수에서 멈춘다. 이 세 번째 호수는 마치 바다처럼 보일 정도로 매우크다. 물맛은 매우 좋지 않으며, 고약한 냄새 때문에 근처 주민들이 고통을 받는다.

 바람과 파도도 일지 않으며 물고기도 없고 이 물을 이용하는새도 없다.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이 호수에서는 몸이 단단한 물체로 지지를 받는 것처럼 뜬다. 그래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도,수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뜬다. 연중 어떤 시기에는 역청이 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다른 기술들처럼 역청을 모아 거두는 방법을 경험으로 배웠다. 이 액체는 검은색이며, 식초를 부으면 서로달라 붙어서 수면으로 떠오른다. 사람들이 손으로 이것을 배 윗머리에 올려 놓으면 그 후엔 더 이상 끌어 올리지 않아도 자르기전까지 배에 가득차게 된다. 놋이나 쇠로 된 기구로도 잘라지지않고, 다만 피나 월경의 분비물에 젖은 천으로만 잘라진다고 고대저술가들은 전한다.

 그러나 이 역청 무더기를 해변가에 가져다가 땅의 열이나 햇빛에 말린 다음 목재나 돌을 자르는 것처럼 도끼나 쐐기(Wed-ges)로 자른다고 그 곳을 잘 아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확인해 준다.



  제 7 장



 이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옛날에는 비옥해서 인구가 많은도시들이 있었으나, 번개와 불에 의해 불타 이제는 없어진 평야가 있었다. 전해지기로는 아직도 파괴된 흔적이 남아 있으며, 땅자체가 불에 탄 땅으로서 원래의 비옥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한다. 그런 이유에서 자생한 식물이건, 심어진 것이든지,또는 잡목이든 꽃이건 완전히 자란 것이건 간에 모든 식물들이검고, 비어 있으며 재같이 되어 있다. 내 생각으로는 옛날에 이곳에 번창한 도시들이 있었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타버린것 같다. 또한 땅은 호수의 증기와 근처의 나쁜 공기 등으로 인해 오염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옥수수건 포도건 열매들이 토양과 공기와 함께 쇠약하여 말라버린 것 같다. 벨루스(Belus) 강도 유대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강 하구 근처에서 나오는 모래에 질산칼륨(nitre)을 섞으면 녹아서 유리가 된다. 해변의 넓이는 좁은데도 얻을 수 있는 거의 양은 거의 무진장하다.



제 8 장



 유대의 대부분의 지역은 작은 마을들이 분산되어 있는 형태이며, 약간 더 큰 마을들이 있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수도로써, 거대한 부가 축적되었던 성전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먼저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다음에는 궁궐이 있었으며 성전이가장 안쪽에 위치하여 있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문근처에도 갈 수 없었고, 모든 제사장들도 문지방 근처에서 출입이 금지되곤 하였다.

 동방이 앗수르, 메대, 바사에 의해서 지배되던 기간에 유대인들은 가장 경멸받는 노예들 중에 노예들이었다.

 마게도냐인(Macedonians)들의 지배 후에, 안티오쿠스(Ant-iochus)왕이 유대인들의 미신을 깨뜨리고 헬라 문화를 유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고약한 나라를 변화시키려던 그의 계획은실패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가 파르티아인(Parthians)들과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또한 이 때에 아르사케스(Arsaces)가 마게도냐로부터 독립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도 이 때를 틈타서 그들의 왕을 세웠는데, 이는 마게도냐인들의 세력이 약해져가고, 파르티아인들이 아직은 그리 강력하지 않았으며 로마인들은 유대인들과 먼 거리에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세워진 왕들은 품위없음을 인하여 쫓겨났다가 다시 내란으로 권력을 잡고는 그 품위없는 행위를 다시 하였다. 도시를 파괴하고, 형제와부녀자들과 아비들을 살육하였으며, 그들의 미신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거기에다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의 확실한 안정을 위하여 대제사장이라는 명예로운 직책까지 겸하였다.



 제 9 장



 유대를 첫 번째로 정복한 로마의 왕은 크네이우스 폼페이우스(Cneius Pompeius)로서 승자가 되어 성전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하여 성전 안은 신의 형상이 없는 텅빈 공간이며, 신비스럽고 가장 비밀스런 장소조차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되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이때 무너졌으나 성전은 존속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우리 나라에(로마를 뜻함-역자주) 내란이 발생하여, 이 자방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유대는 파르티아의 왕 파코루스(Pacorus)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벤티디우스(Ventidius)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파르티아이들은 유브라데강 저편으로 쫓겨났다. 이때에 유다는 카이우스 소시우스(Caus Sosius)가 지배하였다. 안토니우스는 헤롯에게 이 지방을 넘겨 주었고, 아구스도(Augustus)가 안토니우스를 이겼을 때에도 그는 계속하여왕국의 영토를 넓혔다.

 헤롯이 죽고 난 후 시몬이라는 자가 가이사(Caesar)의 허락없이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당시 수리아 총독이었던 퀸크틸리우스 바루스(Quinctilius Varus)에 의해(혹은 명령에 의해) 징벌을 받았다. 그 후에 유대는 영토가 줄었으며 헤롯의 자손들에 의해서 삼등분된 채로 지배되었다. 디베료(Tiberius)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 성전안에 카이우스 가이사(Caius Caesar)의 상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가이사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왕들이 죽거나, 그 지배력이 감소되자 글라우디오(Claudius) 유대 지방을 로마 귀족들에게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들 중안토니우스 벨릭스(Antonius Felix)는 마치 왕이라도 된 듯이모든 종류의 야만적이고 무절제한 방종을 일삼았다. 사실 그는노예 근성을 가진 자였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손녀인 드루실라(Drusilla)와 결혼하여서 그의 손자 사위가 되었다. 글라우디오도 역시 안토니우스의 손자였다.



 ‘연대기'(Annals) 제12권



 성(姓)이 벨릭스(Felix)인 팔라스(Pallas)의 형제는(팔라스처럼) 온유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유대를 다스리면서 그의 권력에 의지하여 갖가지 악한 행동을 저질렀다.

 유대인들은 반란의 본보기를 남겨 주었다. 그들은 카이우스(Caius)의 죽음 후, 그의 명령에는 불복종하였으나, 새로운 통치자가 다시 새로운 명령(통치자의 상을 성전에 세우라는 명령)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벨릭스의 때늦은 치유책은 반란이라는 석탄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었고, 또한 당시에 함께 통치를 하고 있었던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로 하여금 벨릭스와 같은 행동을 하게만들어 그들 사이에서 나라가 분할되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은쿠마누스 치하에 있었고 사마리아는 벨릭스가 통치하던 때였다.이 두 나라는 오래된 앙숙이었는데, 이제 그들 통치자들에 대한경멸까지 겹쳐 그들의 증오가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서로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하였고, 강도떼를 보내어 매복시키기도하였으며 때때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약탈품들을 그들의 로마 행정관들(쿠마누스와 벨릭스)에게 바쳤다. 이 두 행정관들은이러한 것을 좋아하였다.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진압을 위해서병사를 보내었지만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만약 수리아의총독인 쿠아드라투스(Quadratus)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 지방은 전쟁의 화염에 휘말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 개입에 의하여반란 중에 로마 군인들을 죽였던 유대인들을 사형에 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길어지지 않게 디었다. 그들이 죽는 것은 당연했다. 오직 쿠마누스와 벨릭스가 지연시켰을 뿐이었다. 이 반란의 원인을 전해들은 글라우디오(Claudius)는(쿠아드라투스에게), 행정관들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권한을부여하였다. 쿠아드라투스는 벨릭스를 재판관으로 앉혔는데, 이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을 단념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쿠마누스는 벨릭스의 죄까지 포함하여 그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한 보응을 혼자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화는 다시 회복된 것이다.



‘역사'(Histor.)  제5권 제10장



 그러나 유대인들은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행정관이 될 때까지 인내하였다가 그가 취임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수리아의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고, 무력을 쓰기도 하면서 유대인들을 달랬으나 대체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운명이었는지 그의 명이 다하였음이었는지 몰라도 그가 죽자베스파시안(Vespasian)은 그의 명성과 뛰어난 장교들, 그리고막강한 군사력을 힘입어서 여름이 두 번 지나는 동안에 예루살렘을 제외한 전 지역과 전 도시를 장악하는 행운을 얻었다.

 [네로(Nero)가 장관으로 임명한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Flavius Vespasianus)는 3개 군단(legion)으로 유대 전쟁을처리하였다. ‘역사'(Histor.) 1권 10장] 그 다음 해는(본국에, 로마-역자주) 내란이 일어나 유대인들은 평화롭게 한 해를 지낼 수 있었다. 이달리야가 다시 평화를되찾자 변방에 대한 문제가 다시 일어났다. 유대인들은(로마인)들의)분노를 증가시키면서도 견디어낸 유일한 민족이었다. 새정부가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고와 불행을 방지하기 위하여티투스(Titus)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베스파시안은 가장 공략하기 힘들고 어려운 예루살렘의 성벽을 제외하고 유대 전쟁을 다 끝내었다. 이는 성벽이 포위공격을 견디어낼 만큼 강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산의 지형을 하고 있고 유대 미신에 대한 완고한 집착 덕분이었다. 우리는 이미베스파시안이 3개의 군단(legion)으로 전쟁을 수행했음을 언급하였다. ‘역사'(Histor.) 2권 5장] 베스파시안이 젊었을 때 그는 그가 최고의 명예로운 위치까지올라가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 약속을 확증이라도 하듯이 그는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집정관(Consulship)이 되었으며, 유대 전체를 차지하는 승리의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그는 그가 여기까지 이르자 자신이 황제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유다와 수리아 사이에는 갈멜(Carmel)이라는 명칭의 산과 또한 동일한이름의 신이 있었다. 우리의 선조들에 의하면 이 신은 형상이나신전이 없으며 오직 제단과 엄숙한 예배 의식만이 있다고 한다.한번은 베스파시안이 그곳에서 제물을 드렸는데, 그 때 그는 마음 속에 어떤 비밀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때 바실리데스(Basilides)라는 제사장은 그 속을 거듭 바라다 보면서 다음과같이 이야기하였다. “베스파시안이여, 당신이 무엇을 하던간에, 곧 집을 짓고 토지를 확장하든지, 노예의 수를 늘리든지, 그대는 존귀한 자리에 않게 될 것이고 거대한 영토와 수없이 많은사람들을 얻게 될 것이오.” 이 말은 곧 그의 명성과 함께 널리 알려졌으며, 그때마다 달리 해석되곤 하였다. 이것처럼 많은 관심을 갖게 한 것도 드물 것이다. 또한 그러한 종류의 소문들이 많이생겼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예언해 주는것들이었다. 무키아누스(Mucianus)와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이사랴로 각각 떠났다. 안디옥은 수리아의 수도였고, 가이사랴는 유대의 수도였다. 베스파시안의 황제 등극 지명의 시작은 알렉산드리아에서였다. 당시 디베료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가 서둘러서 황제로 추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군대로 하여금 고대 로마력으로 해서 7월 초하루에 베스파시안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이날 이후에 그의 황제 등극의 기념일로7월 초하루는 지켜졌고 유대에서는 7월 5일에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유대의 병사들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가 수리아로부터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나가서 맞이할 정도로그에게 지지를 보냈다(79장). 베스파시안은 그에게 자기 부대중 가장 강력한 부대를 티투스에게 넘겨 주어, 유대 전쟁 중 남은 부분을 마저 수행하도록 하였다.(‘역사’. 4권 51장). 베스파시안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여름철 미풍을 기다리면서, 항해하기 좋은 날씨를 기다리고 있던 수 개월 동안 많은 기적적인 사건들이발생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하늘의 좋은 징조로써, 그를 향한 신들의 호의로 해석되었다. 시력의 약화로 인해 소경으로 알려진알렉산드리아의 한 천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하소연 하기를,세라피스(Serapis)의 신탁이라고 하면서 그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베스파시안에게 간청하였다. 세라피스는 이 나라 사람들이섬기는 신이었다. 그는 황제께서 기뻐하신다면 황제의 침을 자신의 눈에 발라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한 사람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는 손이 불구인 사람이었다. 그 또한 신탁이라고 하면서그의 손을 황제의 바로 밟아 치료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베스파시안은 처음엔 이들을 비웃으면서 물리쳤다. 그러나 이들은계속하여 간청하였고, 그는 혹 자기가 어리석은 자라는 오명을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점차로 주위의 아첨과함께 혹시 고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의사들을 불러 사람의 힘으로 이러한 종류의 병들이 고쳐질 수있는지에 대하여 의견을 제출토록 명하였다.

 의사들의 대답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눈이 먼 사람은완전히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장애물이 제거만된다면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 있고, 또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도 치료의 효력만 발생한다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들이 도와줄 뜻이 있고, 황제는 신의 뜻에 의해서 선택 받은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만약 치료가 성공된다면 황제에게는 영광이고,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천한자들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베스파시안은행운이 도처에서 따라 주었으므로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수 많은 군중들 앞에서, 웃는 얼굴로 나타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그러자 손이 불구인 사람이 즉각 회복되었고 눈먼 사람도 즉시 보게 되었다. 이 두 치유의 사건은 당시 거기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역사’ 제5권 제1장



 같은 해 초에 티투스 가이사(Titus Caesar)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유대 전쟁을 완수하라는 임무를 넘겨 받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황제가 되기 전부터 그의 호전적인 행동으로 유명했다. 이런 그가 이제는 더욱 정열적으로, 명성에 대한 소망을품고 활동하게 되었다. 각 지방과 군대의 지도자들은 서로 더욱열심히 싸움으로 해서 그에게 더더욱 힘을 주었다.

 그 자신 또한 그의 행운에 필적할 만한 사람임을 보여 주려 하였다. 그는 무장을 하고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하여 부드러운 방법으로 하였으며 모든 이들에게 상냥한 태도와 친절한 말로 대하였다. 마치 행운과 행복을 모두에게 비는 듯하였다. 또한 그는생활과 자리를 그의 군대와 함께 하였으며, 이반 사병들과 함께하면서도 장군으로서의 그의 품위를 조금도 잃지 않았다. 유대에서 그는 베스파시안의 3개 군단인 제 5, 제10, 제50군단으로부터 환영받았다. 수리아도 그에게 제12군단을 파견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제 22, 23군단을 그에게 보내었다. 이외에도 8개기병대와 20개 보병대가 합류하였다.

 아그립바왕(King Agrippa), 소헤무스왕(King Sohemus),안티오쿠스왕의 보병대와 아라비아의 강력한 군대 등 인접국에있는 나라에서도 또한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유대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심으로 인하여 참가한 것이었다. 또한 로마의도시에서 온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함께 하였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먼저 갖기 전에 티투스의 호감을 차지하고 싶어했다.

 그는 완전한 전투 진영을 갖추고 이 군대들을 이끌고 원수의나라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주위에 대한 경계를 쉬지 않으면서전쟁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제 10 장



 우리가 방금 언급한 대로 그가 예루살렘의 성벽 앞에 그의 진지를 구축하였을 때 그는 그의 군대가 싸울 태세가 완비되었음을 거만한 태도로 보여 주었다.



 제 11 장



 유대인들은 진지를 성벽 바로 밑에 설치하였다. 만약 그들이 승리하면 더 멀리 진격하고, 패하면 곧바로 그들의 피난처로 들어 가려는 것이었다. 기병대의 본대와 코호르트(Cohort, 로마군단의 1/10에 해당하는 군대, 약 300~600명-역자주)에는 재치있고 힘 있는 자들 만을 뽑아 함께 나가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적들이 우세해졌고, 며칠간은 성문 앞에서 소규모의 전투만이 계속되었다. 결국 많은 손실이 나게 되자 그들은 성안으로 철수하였다. 로마인들은 끈질기게 공격하였는데, 이는 적들이 굶어 죽기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별로 명예롭지 못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에 열심히 참여하였는데, 어떤 이는 참된 용기 때문에, 어떤 이는 야수 같은 잔인함으로, 혹은 포상에 대한 욕심으로 열심히 참여하였다.

 티투스는 로마와 또한 로마의 풍요를 눈 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예루살렘이 빨리 함락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너무도 지체되는 것같이 보였다.

 도시는 놓은 곳에 세워져 있었고, 매우 단단한 공사와 성벽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약 평지에 있더라도 충분히 방어가 될 만큼 강화되어 있는 도시였다. 매우 높은 언덕 2개가 있고, 기술적으로 굽어지게 만든 성벽으로 그 언덕을 둘러 쌓았다.그래서 안으로 들어간 형태로 성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포위하는 자들을 측면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측면에서 창을 던져 공격할수 있었다. 꼭대기는 돌출되어 있고, 그래서 탑의 높이가 바닥에서부터 60피트였다. 만약 평지에 건설했다고 생각하면 120피트가 더 되는 것이었다.

 그 탑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멀리서 보면 똑같아 보였다. 다른성벽들은 궁전 밑에 있었으며, 안토니아(Antonia)탑 근처에 있었다. 이 탑은 그 꼭대기가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것이었다. 탑의이름은 헤롯에 의해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것이었다.



 제 12 장



 성전은 성벽을 갖춘 요새와 같았다. 성전을 쌓기 위하여 성내의 나머지를 쌓는 것 보다도 더 많은 노동력과 수고가 들었다.성전 안에 마당을 둘러싼 회랑도 매우 훌륭한 성벽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산이 묻힐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거기에다 그들은 빗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와 작은 연못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건설한 자들은 인접국들의 생활 양식이 다르다는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주 전쟁하는 모습을 보아왔던 것이다.그래서 아주 오랜 공격에도 견디도록 건설한 것이다. 또한 폼페이에게 함락당한 이후, 이 경험은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부패가성행할 때 유대인들은 돈으로 예루살렘을 강화시킬 기회를 잡았다. 그래서 평화기에도 그들은 성벽을 쌓았고, 마치 곧 전쟁을치루기라도 할 듯하였다. 또한 다른 도시들이 파괴됨에 따라 그곳을 떠나는 거칠고 사나운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이렇듯 완강히 대항하는 무리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도망왔으므로 과거 그어느 때 보다도 더욱 반역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갔다.

 거기에는 3명의 대장이 있고 각각에는 많은 군사들이 있었다.시몬(Simon)은 성의 가장 깊숙한 곳과 넓은 곳을 자신의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

 바르 기오라(Bar Gioras, 기오라의 아들)라고도 불리는 요한은 도시의 중간 부분을, 엘르아살(Eleazar)은 성전을 관할하였다. 요한과 시몬은 군사의 수나 그 힘에 있어서 월등하였고, 엘르아살은 그 위치에 있어서 우월하였다. 그러나 세 쪽 모두 파당을 짓고, 전쟁하고, 방화하는 것은 공히 동일하였다. 그래서 많은 양의 식량이 불에 타 없어져 버리기도 하였다. 후에 요한은번제를 드리는 곳에 자신의 병사들을 보내어 엘르아살과 그의병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성전도 그의 세력권 안에 집어 넣어버렸다. 그래서 도시는 로마인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전쟁으로인하여 양 파당간에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제 13 장



 이 나라는 모든 면에 있어서 미신적인 나라인데, 이들이 로마종교의 의식에 의해 속죄하기를 거부하고,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제물과 맹세로써 신들에게 속죄 받기를 거부하자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싸울 준비가 된 전투하는 군대가 나타났다. 그 군대의 철갑은 밝게 빛나는 색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구름 사이에서 불빛이 성전을 비추거나, 성전문이 저절로 열리고 인간의 음성 이상의 커다란 소리가 나기도 하였다. 그 소리는 신들이 떠난다는 내용이었고 정말 신들이 떠나고 있는듯이 소리와 함께 큰 진동이 일어나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유대에서 어떤 인물이 나와서 세계의 황제 자리를 차지하고 동방이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옛 사제들의 문서내용이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언은 베스파시안과 티투스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경향대로,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역경을 통해 이 착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당시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의 수가 연령과 성 구별없이 60만명 정도였다. 그 숫자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충분히 있었으며, 더욱이 모두가 다 그 무기를 사용할 수있을 정도로 대담하였다.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완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 사느니 보다는 죽음을 택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의 위치가 강공이나 기습같은 공격은 소용이 없는 곳이었으므로 티투스 가이사는 성벽을 두르는 성과 호를 파는 방법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 일을 각 부대별로 분담시켰다. 그리고 고대인들에 의해 고안된 공성(功城)장비나 당시 사람들에 의해 발명된 공격 장비들이 갖추어지기까지는 더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연대기’제15권



 네로는(마치 그 자신이 로마에 불을 지른 것 같은) 소문을 없애기 위하여, 당시 악한 행위로 인하여 미움을 당하고 있던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이라고 불리우던 무리에게 그불을 질렀다는 죄를 덮어 씌웠다. 그는 이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이 이름의 근원자는 그리스도(Christ)였는데, 그는 디베료(tius Pilate)에 의해서 처벌된 인물이었다. 잠시 이 해로운 미신 종교는 부분적으로 그 세력이 줄어 드는 듯하였으나, 곧 이 종교가 처음 발생되었던 유대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까지도 기승을부리게 되었다. 이 종교는 어디로 가든지 잡음을 일으켰으며 온갖 극악하고 부끄러운 악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 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만이 체포되었으나, 후에는 직접많은 자들을 조사하여 유죄로 선고하였는데 그 죄목은 로마에불을 질렀다는 실제적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을 미워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롱을 당하였고,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씌워 죽였다. 또한 개들을 풀어 조각 조각 찢어 죽이기도 하였다.어떤 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혹은 화형당하기도 하였다.그들은 또한 밤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횃불 대신 사용되기도하였다. 네로는 이를 위해 자신의 뜰을 제공하였다. 또한 네로는그들을 원형 경기장의 경기들(Circensian games)에 내보냈다.그리고 그 자신은 전차를 모는 복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평민들 틈 사이에서 혹은 경기장 안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들에게 내린 형벌이 죄인에게 내려지는 마땅한 것들이었음에도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동정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곧 이들에 대한 죽음과 같은 가장 극악한 죄의 경우에 내려지는 형벌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야만적인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과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타키투스의 유대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야비한 중상 모략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나의 견해를 밝히기에 앞서서 먼저 두 이방인들의 기록을 살피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이 기록들은 타키투스의 글과 비교해 볼 때 그 오래됨으로나, 저자들의 권위에 있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것들이다.

 먼저 비두니아(Bithynia) 지방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가 트라얀(Trajan)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에 대한 트라얀의 답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들은 터툴리안, 유세비우스, 제롬 등에 의하여 인용된 것들이다. 이 기록들은 요세푸스의 마지막 편집자였던 하버캠프(Havercamp)의 견해에 의하면 읽을 가치뿐만 아니라 완전히 암기 해야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주후 112년경 트라얀에게 보내는 플리니의 편지



 황제 폐하께.

 저의 모든 의문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문제를 폐하께의뢰하는 것이 바로 제가 항상 해왔던 방법입니다. 누가 폐하보다 더 잘 저의 더딘 방법을 교정해 주시고 저의 무지함을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다른 이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이재판 받는 자리를 참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그들을 심문하는 방법과 어떤 형벌을 어느 만큼 내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또한(형벌을 내릴 때) 연령의 차이를 감안해야 할지, 연약한 어린이들에게도 어른들과 같은 강한 형벌을 내려야 하는지 등을 잘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돌이킨 자들에게 자비의 여지를 두지 말아야 할지, 혹은 전에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혜택은 없는것인지, 단지 이름 때문에, 어떤 실제적인 죄악이 없이 혹은 그이름에 집착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형벌을 내려야 하는 것인지등도 저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문점들입니다. 한편으로 저는그리스도인들로서 제 앞에 붙들려온 자들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루었습니다. 먼저 저는 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대답하면 저는 다시 물어보고, 세번째에는 질문에 위협을 섞어서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고백을 계속 고집하면 저는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고백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이러한 도도함과 꺾일 줄 모르는 완고함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미친 사람들 가운데는 로마 시민들이 가끔 있어서, 저는 그들을로마로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얼마 후에 그 경우는 항상 그렇듯이 죄악은 자생적으로 퍼져서 오히려 더 많은 자들이 제 앞에 끌려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익명의 비방문이 저에게 전달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이름이 적혀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적이한 번도 없었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제가 그들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가져다 준 유황과 포도주를 가지고 폐하의 상 앞에탄원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이 만약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것들 중 아무것도 할 수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을 모두 석방하는 것이 옳다고결정하였습니다. 또 익명의 비방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들 중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자신들이 과거에는 그리스도인들이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물론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3년 전에, 혹은더 훨씬 전에 믿기를 그만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20년 전에 믿기를 그만 두었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폐하의 상과 신들의 상에 경배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실수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것들 뿐이라고 저를 설득시키려 하였습니다. 곧 그들은 일정하게 정하여진 날 밝아지기 전에 함께 모여서 신에게 하듯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성례(聖禮); 성만찬-역자주)를 베풀 따름이지 그 외에 악한 행동은 전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둑질도, 강도질도, 간음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약속을 깨뜨리지도, 맡겨진 물건을 돌려달라고 했을 때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 서로 헤어졌다가 함께 식사를 나누기 위하여 다시 모이는 것이 그저 그들이 하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이 습관도 그러한 비밀 회합을 금한다는 폐하의 명령을 제가 공포한 후에는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의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고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여집사들(Deaconesses)이라 부르는 여자 하인 둘을 잡아서 고문을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이 악하고 터무니 없는미신에 빠져있다는 것 외에는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이에 저는더 이상의 심문을 중지하고, 폐하께 이 사건을 의뢰하여 폐하의자문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위험에빠져 있기 때문에 더욱 폐하의 자문이 필요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모든 연령층과 남, 여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이 위험에 빠질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미신은 마치 전염병처럼 도시나 번화가 뿐만 아니라 외딴지방마을에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미신이 중지되고, 시정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이유가 남아 있습니다.확신하건대, 비어있던 성전들이 다시 번잡해지고 있고,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거룩한 의식들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또한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제물들도 어디서나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되돌아 올 수 있는 여지를 조금 준다면 많은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플리니에게 보내는 트라얀의 편지



 나의 플리니여!

 그대는 그리스도인들이라 고소된 자들에게 적당한 방법으로잘 대하였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확정된, 그리고 일반화된 재판의 과정이 아직은 없다. 이 사람들을 찾기 위해 수색하지는 말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고소되었고 또 그들 스스로 그렇게 고백한다면 그들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만일 그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하고, 우리의 신들게 경배한다면 용서를 해 주어라. 그리고 익명의 고소장에 대해서인데, 이런 것들은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받아들이지 말라. 이런 것들은 매우 악한 것들이며 나의 통치 방식에도 불일치하는 것들이다.



타키투스가 인용한 문장들에 대한 견해



 I. 우리는 여기서 당시 최고의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비록 한번도 요세푸스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으나 그의 역사에대하여 큰 호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키투스는 역사의다른 부분을 쓸 때도 그가 참고하는 로마 저자들의 이름을 거의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상당히 많은 곳에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일곱권을 많이 참고했으며,’유대전쟁사’가 포함하고 있는 240년간의 유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로마와 파르티아간의 전쟁에 대한 요세푸스의 견해를 거의 참고했음을 알 수있다.

 Ⅱ 그러나 또한 타키투스가 로마와 파르티아, 유대에 관한 다른 역사가들의 견해를 따르는 기간에는 오류가 많으며, 그가 참고한 다른 저자들이나 정보원들보다 오히려 그냥 요세푸스에가깝게 그의 견해를 유지하였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Ⅲ. 또한 타키투스가 요세푸스의 ‘고대사’를 알고 있었고, 유대국의 기원에 관해서 쓴 그의 글의 대부분이 이 ‘고대사’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그 견해들이서로 모순되고 있었고, 유치하며, 불합리하고 그 어떤 명확한 증거도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그리고 또한’고대사’에 나오는 요세푸스의 견해가 권위있고 객관적인 것이 거의 다 유대의 고대 기록에 의하여 증명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인접국가들의 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재에도 양자의 글을 자세히 비교하고 고찰하여 보면이와같은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Ⅳ. 그러므로 타키투스는 그가 분명히 볼 수 있었던 요세푸스의 글 속에 있는 유대의 진실한 고대역사의 대부분을 감추고, 이방의 역사가들로부터 입수한 거짓이 많고 근거가 없는 부분적인역사를 기술함으로써 매우 불공평하게 행동을 하였다. 아주 공평하게 기술하겠다고 했던 그의 고백(‘역사’,1권 1장)을 근거로보면 분명히 그는 로마의 역사를 평가하는 것처럼 그 공평함을잃지 말았어야 했으니 이로 볼 때 그의 이러한 행동은 더욱 조잡하게 보여지는 것이다.

 Ⅴ. 타키투스가 하느님의 특별한 자녀들과 유대인들에 대한증오와 경멸, 그리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우상과 미신, 로마의 점성술(astral fatality)에 대한 그가 가진 호감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로마에 관해서는 분별력있는 이성과 형평성을 가지고 보았던 그도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이성과 공정성을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Ⅵ. 타키투스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리스도가 유대인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사도들과 그의 처음 추종자들도 유대인이었고, 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가 유대라는 로마의 속국에서 발생하였음을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이 보통 유대인들과 혼동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그가 유대인들에 대해 품었던 증오와 경멸의 감정을 갖고 있었음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비난을 보편적인 근거가 없으며, 유대인들 대신에 그 자신의 명성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의 비슷한 비난도 그 자신의 인격만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Ⅶ. 그러므로 타키투스는 요세푸스의 고대사가 출판된 직후에이에 반대하여 유대인들에 대한 그런 근거없는 역사를 기술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근거없는 글들 중에는 요세푸스가 아피온(Apion)을 반박하여 쓴 글 중 마네토(Manetho)와 리시마쿠스(Lysimachus)의 글을 인용한 부분과 동일한 부분이 있다. 이 글은 다른 고대사에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요세푸스의 ‘고대사’가 타키투스로 하여금 우리에게 이러한 글을 남기게 한 원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이와같은 사실을 요세푸스로부터 알 수 있다. ‘아피온 반박문’1권 1절은 요세푸스의 ‘고대사’가 유대인들에 대한 아피온의 중상모략적인 저술의 원인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두 권의 책에서 아피온에 반박하여 철저하게 논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만약 타키투스가 이 두 권의 책을 읽었다면,이 두 권의 논박문을 완전히 읽고 난 뒤에 그러한 내용의 책을출판 했다면 이러한 그의 행위는 여전히 고도의 범죄로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그가 요세푸스의 ‘고대사’나 아피온 반박문을읽지 않았다 할지라도 타키투스의 죄는 적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에서는 유대국의 기원에 대한 권위있는 자료들과유대인들의 성격과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시 로마에 매우 많은 숫자가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근거없는 내용의 저서 출간은 변명의 여지가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행위인 것이다.

 Ⅷ. 그러므로 결국 학식있는 비평가들의 타키투스에 대한 찬사와 요세푸스에 대한 강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의 모든(본의 아닌) 실수들은 그의 방대한 작업과 저서들의 양 뿐만아니라 질을 고려해 볼 때, 얼마되지 않는 양 가운데서 타키투스가 범한 유대인들에 대한 조잡한 잘못들과 사실을 왜곡 진술한오전(誤傳)들에 비하여 그 분량에 있어서 비슷하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소수의 비평가들이 헬라의 로마 역사가들을 유대 저술가들 특히 요세푸스보다 더 좋아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런 부류에 속한 소수의 비평가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더욱 깊은 연구 끝에 엄숙하게다음과 같이 선언한 그들의 위대한 선배인 죠셉 스칼리거(Joseph Scaliger)의 판단력과 겸손함을 더 배워야 할 것이다. “요세푸스는 가장 근면하며, 모든 저술가 중 진리를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단언함에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곧 유대의 역사에 대해 뿐만 아니라 외국의 역사에 대해서까지라도, 모든 그리스와 라틴계 저술가들 보다 요세푸스를믿는 편이 더욱 안전하다. 이는 그의 학문에 대한 정확성과 열정이 그의 작품 어느 곳에서나 번득이고 있기 때문이다.”(‘시간 계량론’서언, p.17[De Emend. Temp. Proleqom])

 주의(N.B.). 유대에 대한 기원과 고대 역사에 대해서 우리 주님과 동시대의 이방인이었던 트로구스 폼페이우스(TrogusPompeius)에 의하여 쓰여진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이것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와 동시대 인물인 져스틴(Jus-tin)에 의해서 요약되었다. 이 글은 성경과 요세푸스의 글과 비교되어도 좋을 만한 것이다. 나는 그 글을 모두 옮겨 보겠다. 그리고 약간의 간략한 주(註)를 달겠다. 이 후로 필요할 때마다 이 주들을 인용할 것이다.

 


져스틴,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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