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무의 단골 조직과 성무과정

제 2 절 세습무의 단골 조직과 성무과정




세습무는 호남, 영남, 제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무인데 그중에서도 호남지역은 무의 인위적 제도로서의 단골조직이 잘 보존 계승되어 있으면서도 강신무의 일종인 ‘명두’가 양립하고 있어서 두 가지 형태의 특징을 비교 관찰하기 좋은 이점이 있다.


1. 단골조직


단골(당골, 단골네, 당골네, 단골에메, 당골에미 등으로도 불림)이란 세습무의 무당이나 신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골은 각자가 무속제도 상의 독립된 관할구역인 ‘단골판’을 핵으로 주민신도 전체와 단일적 결합조직을 갖는 제도적이고 고정‧정착된 공공적 성격을 지닌 무로 존재한다. 단골의 일체의 무권한은 단골판과 함께 혈통을 따라 세습.계승된다. 하지만 무속상으로 신도들을 통솔하는 공공적 성격은 단골들 상호간에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횡적 유대와 규제의 조직력에서 우선적으로 기인한다. 단골이란 말의 어원도 이러한 현상적 입장에서 찾는 견해가 강하다.


단골판은 자연부락 단위 내지는 문중 단위로 구획되어 있고 단골 사이에 규제가 심해서 자기 단골판 이외에는 들어가 굿을 할 수 없다. 들키면 무구를 빼앗기고 심한 매를 맞는다. 이사 갈 때는 다른 단골에게 팔수도 있고 사정이 있을 시에는 전세를 놓기도 한다. 매매시에는 매도증서를 작성하여 단골 쌍방의 성명과 단골판의 지역명을 명기 날인하여 쌀이나 돈을 받는다. 


1965-69년 조사자료에 의하면 단골판은 규모가 5-6개에서 10여개 정도 부락에 500호-1500호 내외이며 신도 주민들은 단골이 무의식을 주관해 주는 대가로 ‘받걷이’라고 해서 봄‧가을로 벼와 보리 2승-5승정도 많으면 1두 내외를 주었다. 1975년 조사한 단골 고인 박만준에 의하면 규모가 3개 마을에 150호 정도이며, 단골이 일을 해주면 일당(하루 4인이 굿을 하고 10,000을 받음)을 계산해서 받고 가을에만 ‘도부’라고하는 벼 5가마 정도의 별도 곡물을 받는다고 한다. 같은 해에 조사된 단골 박선내의 경우는 6개의 마을을 단골판으로 갖고 있고 300호 정도가 신도라고 한다.  


그러나 명두(죽은 女兒의 영을 주신으로 봉안하고 그 영력으로 점을 치는 것을 주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점바치‧점쟁이라고도 부른다)가 단골판을 침입하여 자의로 굿까지 겸해서 하기 때문에 질서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명두는 단골판과 같은 신도들의 단일 결합조직이 없기 때문에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난립되어 자유경쟁을 벌이는 유동적이고 개별적인 무로 볼 수 있다. 호남지방을 제외한 영남지방과 제주도의 세습무도 동일한 난립적 경쟁성을 보인다. 


2. 단골의 무계계승체계


단골의 무계계승체계에 핵심은 단골판이라는 조직과 무권한이다. 단골은 상호간의 혼인을 통하여 무계의 혈통을 이어 나가면서 무권한을 대대로 세습‧계승한다. 단골무계는 무제의의 핵심인 가무를 하는 여무와 가무반주자인 남무로 구성된다(남무역를 고인이라고 한다). 아버지 고인은 아들에게 무악기 연주법을 가르치고, 딸에게는 어머니 여무가 무가를 가르쳐서 다른 무가문에 출가시킴으로써 무계를 계승해 나가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고인 박남준과 단골 박선내는 사촌간이며 두 사람의 친가‧외가 모두 단골 무계로 계승되어 왔고 자손들 역시 다른 단골 무계와 혼인한 사실이 발견된다.


단골무계는 전적으로 부계계승체이다. 여자가 친정 어머니로부터 무가를 학습해서 출가하여 무제의의 핵심을 이루는 무가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그 후계는 딸이 아니라 시집오는 며느리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여자는 무권한의 상속자인 남자와의 결혼을 전제로 해서 무권한을 대행하는 형식인 것이다. 무권한을 그만 둘 경우에도 그 권한은 아들에게 계승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제도의 영향보다는 단골판 없이는 굿을 할 수 없는 제도적 조직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하겠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으로 무를 천시해 온 사회적 풍조 때문에 많은 무계가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다. 단골 상호간의 결혼이 계속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무의 자녀들을 천민으로 여겨 결혼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은 무끼리 결혼하는 실정이다. 직업에 있어서도 대부분이 단골판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다른 업종에 종사함으로써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박남준의 경우 1남 3녀를 두었고 모두 단골무계와 혼인하였으나 현재는 상업에 종사하고 있고 박선내의 경우도 아들은 죽고 며느리 박복례만이 무계를 계승하고 있을 뿐 그 손주들(2남1녀)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어 사실상 무계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강신무는 무의 구역제가 없기 때문에 무가 되는 전제조건으로 결혼이 필요없다. 언제든지 강신이 되면 처녀라도 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강신무의 자유경쟁적 무질서 난립상황에서 이러한 단골조직이 형성되기 까지는 초기의 개인적 영적 카리스마가 사회적으로 연장되어 지배력을 갖게 되고 사회적으로 정착되면서, 제도적‧사회적 카리스마로 바뀌었고 일정한 관할영역을 형성하면서 사제권으로 세습되는 발전 과정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 세습무의 성무과정과 기능학습전수


무계 남자가 무가의 반주자로 무악기를 다루는 기능을 배워 고인이 되는 것은 무계를 따라 아버지로부터 가업으로 배우게 된다. 남자가 아버지로부터 무악반주 기능을 학습해서 고인이 되어 처의 무가무의 반주자가 되고, 그리하여 부부가 완전히 제의의 기능을 보유함으로써 무의 사제권이 계승‧유지되는 것이다.


무계 여자는 10세경부터 어머니로부터 무가를 배워서 시집간 후 시어머니가 굿청에 데리고 다니면서 굿하는 법을 가르쳐 단골로 만드는 것이다. 무가는 친정어머니를 통해 계승되지만 굿에 참여 하지는 않는다. 여자는 출가해야만 시가의 단골 무계에 참여하여 시어머니로부터 굿하는 법을 배우고 비로서 무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박남준의 경우는 그의 맏형인 박성준으로부터 장고,징,피리,가야금,아쟁 등의 무악기 연주법을 배워 30세에 독립하였고, 박선내의 경우는 10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무가를 배웠고 18세때 출가하여 시어머니의 권유로 굿판을 따라다니며 굿을 배웠으며 시어머니가 별세하신 후에 독립하였다고 한다. 그녀 역시 그의 딸인 이복심에게 11살 때부터 무가를 가르쳐 고인 강만술에게 출가 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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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무의 단골 조직과 성무과정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2 절 세습무의 단골 조직과 성무과정


    세습무는 호남, 영남, 제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무인데 그중에서도 호남지역은 무의 인위적 제도로서의 단골조직이 잘 보존 계승되어 있으면서도 강신무의 일종인 ‘명두’가 양립하고 있어서 두 가지 형태의 특징을 비교 관찰하기 좋은 이점이 있다.

    1. 단골조직

    단골(당골, 단골네, 당골네, 단골에메, 당골에미 등으로도 불림)이란 세습무의 무당이나 신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골은 각자가 무속제도 상의 독립된 관할구역인 ‘단골판’을 핵으로 주민신도 전체와 단일적 결합조직을 갖는 제도적이고 고정‧정착된 공공적 성격을 지닌 무로 존재한다. 단골의 일체의 무권한은 단골판과 함께 혈통을 따라 세습.계승된다. 하지만 무속상으로 신도들을 통솔하는 공공적 성격은 단골들 상호간에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횡적 유대와 규제의 조직력에서 우선적으로 기인한다. 단골이란 말의 어원도 이러한 현상적 입장에서 찾는 견해가 강하다.

    단골판은 자연부락 단위 내지는 문중 단위로 구획되어 있고 단골 사이에 규제가 심해서 자기 단골판 이외에는 들어가 굿을 할 수 없다. 들키면 무구를 빼앗기고 심한 매를 맞는다. 이사 갈 때는 다른 단골에게 팔수도 있고 사정이 있을 시에는 전세를 놓기도 한다. 매매시에는 매도증서를 작성하여 단골 쌍방의 성명과 단골판의 지역명을 명기 날인하여 쌀이나 돈을 받는다. 

    1965-69년 조사자료에 의하면 단골판은 규모가 5-6개에서 10여개 정도 부락에 500호-1500호 내외이며 신도 주민들은 단골이 무의식을 주관해 주는 대가로 ‘받걷이’라고 해서 봄‧가을로 벼와 보리 2승-5승정도 많으면 1두 내외를 주었다. 1975년 조사한 단골 고인 박만준에 의하면 규모가 3개 마을에 150호 정도이며, 단골이 일을 해주면 일당(하루 4인이 굿을 하고 10,000을 받음)을 계산해서 받고 가을에만 ‘도부’라고하는 벼 5가마 정도의 별도 곡물을 받는다고 한다. 같은 해에 조사된 단골 박선내의 경우는 6개의 마을을 단골판으로 갖고 있고 300호 정도가 신도라고 한다.  

    그러나 명두(죽은 女兒의 영을 주신으로 봉안하고 그 영력으로 점을 치는 것을 주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점바치‧점쟁이라고도 부른다)가 단골판을 침입하여 자의로 굿까지 겸해서 하기 때문에 질서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명두는 단골판과 같은 신도들의 단일 결합조직이 없기 때문에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난립되어 자유경쟁을 벌이는 유동적이고 개별적인 무로 볼 수 있다. 호남지방을 제외한 영남지방과 제주도의 세습무도 동일한 난립적 경쟁성을 보인다. 

    2. 단골의 무계계승체계

    단골의 무계계승체계에 핵심은 단골판이라는 조직과 무권한이다. 단골은 상호간의 혼인을 통하여 무계의 혈통을 이어 나가면서 무권한을 대대로 세습‧계승한다. 단골무계는 무제의의 핵심인 가무를 하는 여무와 가무반주자인 남무로 구성된다(남무역를 고인이라고 한다). 아버지 고인은 아들에게 무악기 연주법을 가르치고, 딸에게는 어머니 여무가 무가를 가르쳐서 다른 무가문에 출가시킴으로써 무계를 계승해 나가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고인 박남준과 단골 박선내는 사촌간이며 두 사람의 친가‧외가 모두 단골 무계로 계승되어 왔고 자손들 역시 다른 단골 무계와 혼인한 사실이 발견된다.

    단골무계는 전적으로 부계계승체이다. 여자가 친정 어머니로부터 무가를 학습해서 출가하여 무제의의 핵심을 이루는 무가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그 후계는 딸이 아니라 시집오는 며느리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여자는 무권한의 상속자인 남자와의 결혼을 전제로 해서 무권한을 대행하는 형식인 것이다. 무권한을 그만 둘 경우에도 그 권한은 아들에게 계승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제도의 영향보다는 단골판 없이는 굿을 할 수 없는 제도적 조직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하겠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으로 무를 천시해 온 사회적 풍조 때문에 많은 무계가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다. 단골 상호간의 결혼이 계속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무의 자녀들을 천민으로 여겨 결혼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은 무끼리 결혼하는 실정이다. 직업에 있어서도 대부분이 단골판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다른 업종에 종사함으로써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박남준의 경우 1남 3녀를 두었고 모두 단골무계와 혼인하였으나 현재는 상업에 종사하고 있고 박선내의 경우도 아들은 죽고 며느리 박복례만이 무계를 계승하고 있을 뿐 그 손주들(2남1녀)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어 사실상 무계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강신무는 무의 구역제가 없기 때문에 무가 되는 전제조건으로 결혼이 필요없다. 언제든지 강신이 되면 처녀라도 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강신무의 자유경쟁적 무질서 난립상황에서 이러한 단골조직이 형성되기 까지는 초기의 개인적 영적 카리스마가 사회적으로 연장되어 지배력을 갖게 되고 사회적으로 정착되면서, 제도적‧사회적 카리스마로 바뀌었고 일정한 관할영역을 형성하면서 사제권으로 세습되는 발전 과정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 세습무의 성무과정과 기능학습전수

    무계 남자가 무가의 반주자로 무악기를 다루는 기능을 배워 고인이 되는 것은 무계를 따라 아버지로부터 가업으로 배우게 된다. 남자가 아버지로부터 무악반주 기능을 학습해서 고인이 되어 처의 무가무의 반주자가 되고, 그리하여 부부가 완전히 제의의 기능을 보유함으로써 무의 사제권이 계승‧유지되는 것이다.

    무계 여자는 10세경부터 어머니로부터 무가를 배워서 시집간 후 시어머니가 굿청에 데리고 다니면서 굿하는 법을 가르쳐 단골로 만드는 것이다. 무가는 친정어머니를 통해 계승되지만 굿에 참여 하지는 않는다. 여자는 출가해야만 시가의 단골 무계에 참여하여 시어머니로부터 굿하는 법을 배우고 비로서 무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박남준의 경우는 그의 맏형인 박성준으로부터 장고,징,피리,가야금,아쟁 등의 무악기 연주법을 배워 30세에 독립하였고, 박선내의 경우는 10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무가를 배웠고 18세때 출가하여 시어머니의 권유로 굿판을 따라다니며 굿을 배웠으며 시어머니가 별세하신 후에 독립하였다고 한다. 그녀 역시 그의 딸인 이복심에게 11살 때부터 무가를 가르쳐 고인 강만술에게 출가 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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