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그 이후1

5. 죽음과 그 이후


1) 죽음


그는 1901년 7월 5일 道를 얻었다고 선언한 후부터 그가 죽은 1909년 8월 9일(陰曆 6월 24일)까지 9년동안 인류사회와 천계의 혼란을 광정(匡正)한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그들이 앞으로의 살기 좋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동학교도였던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답답한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초조해 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모의한다는 죄목으로 고부경찰서에 증산이 체포된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때는 포교를 시작한 지 5년후인 1907년이었다. 추종자들도 함께 구속되었는데, 당시에는 의병혐의로 체포되면 총살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日兵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된 추종자들은 사형을 당하리라는 불안을 갖게 되었으며 증산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만에, 증산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믿고 있던 증산의 카리스마적 권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어 증산을 멀리하였다. 


또한 세간에서는 이상한 술객(術客)인 증산이 사람들을 속여서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증산이 평소에 말하는 천지개벽이 늦음을 그에게 원망하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자살을 하겠다고 하면서 조속한 천지개벽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 원일 이라는 종도는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한 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한 지도 여러 번인데,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들의 의혹이 자심(滋甚)합니다. 하루 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하자 증산은 人事란 機會가 있고, 天理에는 度數가 있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에 재앙을 끼치고 억조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또 기유년 6월 초 열흘, 모든 종도들을 구릿골 약방에 모으고 모든 종도들을 한 줄로 꿇어앉히고 묻기를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하자 모두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증산은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하고 묻자 그들은 “죽어도 믿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증산은 “나는 이미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하자 종도들은 “공사를 마쳤으면 나서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증산은 사람이 없어서 못나선다고 하였고, 이에 김 경학이라는 종도가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려 합니다.”하자 “그렇게는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증산은 그에 대한 추종자들의 회의가 증대되는 가운데 39세인 1909년 8월 9일 아침 꿀물 한 그릇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2) 증산 사후의 교단


그의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으며, 몇몇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3) 그들은 원래 강일순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보다는 현세복리적인 기대로 증산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증산이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부급에 속한 사람들은 오랜 실의와 진통을 거친 후 증산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선화(仙化)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증산이 평소에 제자들을 향하여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한다고 말해 왔으며, 사망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佛養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나의 얼굴을 잘 익혀두라. 후일에 내가 출세할 때에는 눈이 부시어 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神仙이란 말을 전설로만 들어왔고 본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1) 증산교의 재건


그러나 와해된 증산종교운동의 재건은 1911년 그의 부인이었던 고씨(高氏)부인(본명은 高判禮)의 졸도 사건에 기인한다. 고씨 부인은 강일순의 본처가 아니라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이종사촌 누이이며 과부(寡婦)로서 차경석의 천거로 강일순의 부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였는데, 깨어난 후부터는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말하였다. 


高氏 婦人에게 강일순의 권능이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한일합방 직후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새롭게 모여든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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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5. 죽음과 그 이후

    1) 죽음

    그는 1901년 7월 5일 道를 얻었다고 선언한 후부터 그가 죽은 1909년 8월 9일(陰曆 6월 24일)까지 9년동안 인류사회와 천계의 혼란을 광정(匡正)한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그들이 앞으로의 살기 좋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동학교도였던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답답한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초조해 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모의한다는 죄목으로 고부경찰서에 증산이 체포된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때는 포교를 시작한 지 5년후인 1907년이었다. 추종자들도 함께 구속되었는데, 당시에는 의병혐의로 체포되면 총살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日兵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된 추종자들은 사형을 당하리라는 불안을 갖게 되었으며 증산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만에, 증산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믿고 있던 증산의 카리스마적 권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어 증산을 멀리하였다. 

    또한 세간에서는 이상한 술객(術客)인 증산이 사람들을 속여서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증산이 평소에 말하는 천지개벽이 늦음을 그에게 원망하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자살을 하겠다고 하면서 조속한 천지개벽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 원일 이라는 종도는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한 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한 지도 여러 번인데,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들의 의혹이 자심(滋甚)합니다. 하루 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하자 증산은 人事란 機會가 있고, 天理에는 度數가 있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에 재앙을 끼치고 억조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또 기유년 6월 초 열흘, 모든 종도들을 구릿골 약방에 모으고 모든 종도들을 한 줄로 꿇어앉히고 묻기를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하자 모두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증산은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하고 묻자 그들은 “죽어도 믿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증산은 “나는 이미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하자 종도들은 “공사를 마쳤으면 나서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증산은 사람이 없어서 못나선다고 하였고, 이에 김 경학이라는 종도가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려 합니다.”하자 “그렇게는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증산은 그에 대한 추종자들의 회의가 증대되는 가운데 39세인 1909년 8월 9일 아침 꿀물 한 그릇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2) 증산 사후의 교단

    그의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으며, 몇몇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3) 그들은 원래 강일순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보다는 현세복리적인 기대로 증산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증산이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부급에 속한 사람들은 오랜 실의와 진통을 거친 후 증산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선화(仙化)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증산이 평소에 제자들을 향하여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한다고 말해 왔으며, 사망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佛養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나의 얼굴을 잘 익혀두라. 후일에 내가 출세할 때에는 눈이 부시어 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神仙이란 말을 전설로만 들어왔고 본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1) 증산교의 재건

    그러나 와해된 증산종교운동의 재건은 1911년 그의 부인이었던 고씨(高氏)부인(본명은 高判禮)의 졸도 사건에 기인한다. 고씨 부인은 강일순의 본처가 아니라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이종사촌 누이이며 과부(寡婦)로서 차경석의 천거로 강일순의 부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였는데, 깨어난 후부터는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말하였다. 

    高氏 婦人에게 강일순의 권능이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한일합방 직후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새롭게 모여든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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