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韓國社會의 宗敎混合的 傳統의 延長이다.
“옛적에는 판이 적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亂局)을 바로 잡을 수 있었거니와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混亂)을 바로 잡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증산은 현대사회의 諸 문제는 단일 기성종교의 역할이나 기능만으로는 수습될 수 없으며 모든 종교의 장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종교혼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각 종교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기성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하에서 각 종교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증산교의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본다.
1) 유교적 측면
유교에 대해서는 그는 당시의 유교를 부유(腐儒)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유교가 조선시대 오백년간의 지배계급의 윤리로서 대두되었지만 그것이 조선사회의 부패를 가져온 주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仁義禮智信의 五德을 찬양하고 誠·敬·信으로써 인격 수양을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忠․孝․烈의 윤리적 기강(紀綱)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유교의 大學이나 孔子, 通鑑 및 書伝과 같은 경전을 추종자들에게 권함으로써 유교의 도덕적인 윤리와 범절을 자신의 종교에 포함시켰다.
2) 불교적 측면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즉 불교의 자기구원 방법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죄를 짓지 말고 전생부터의 묵은 業을 깨기 위하여 심법을 닦는 것인데, 수도의 도량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세계이다. 따라서 무수한 윤회과정을 통하여 점진적 자기 완성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도덕적 접근에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자손을 두어야 하는 우주 자연법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成佛한 자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성불은 선천우주의 상극성에 비추어 보아 비현실적이며, 이에 따라 불교의 구원관에는 우주의 순환원리가 결여되어 있어 마음 닦는 것에 치중한다는 문제가 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彌勒佛로 자인(自認)하였으며 자신이 세계에 강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상에 30년동안 의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나는 원래 미륵불이었는데, 人世에 환생하여 5만년의 용화세계 運道를 짜놓고 금산사의 미륵불로 귀의하여 있을 것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찾아 오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불양답이나 차지하리라.”2)고 함으로써 불교와 관련시키고 있다. 실제로 종도 김형렬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靈體로 신봉하였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지만 증산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륵불과 같은 이러한 진인 출현설은 정확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 폭압과 현실적 고통이 심할수록 민중에게 설득력있는 신앙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고, 민중들은 미륵의 하생과 함께 이 眞人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퇴조기에는 일단 사라지거나 불신되지만 17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기록만 보더라도 민중운동의 상승기에는 역사의 새로운 움직임과 밀착되어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형성되는 이야기처럼 긴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하고 규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미륵신앙의 증산교적 수용은 증산이 20세기에 출세한 미륵이므로 한층 더 구체화한 것이고, 증산사상에 나타나는 후천선경은 용화세계보다 현대감각에 알맞게 발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2. 韓國社會의 宗敎混合的 傳統의 延長이다.
“옛적에는 판이 적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亂局)을 바로 잡을 수 있었거니와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混亂)을 바로 잡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증산은 현대사회의 諸 문제는 단일 기성종교의 역할이나 기능만으로는 수습될 수 없으며 모든 종교의 장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종교혼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각 종교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기성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하에서 각 종교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증산교의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본다.
1) 유교적 측면
유교에 대해서는 그는 당시의 유교를 부유(腐儒)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유교가 조선시대 오백년간의 지배계급의 윤리로서 대두되었지만 그것이 조선사회의 부패를 가져온 주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仁義禮智信의 五德을 찬양하고 誠·敬·信으로써 인격 수양을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忠․孝․烈의 윤리적 기강(紀綱)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유교의 大學이나 孔子, 通鑑 및 書伝과 같은 경전을 추종자들에게 권함으로써 유교의 도덕적인 윤리와 범절을 자신의 종교에 포함시켰다.
2) 불교적 측면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즉 불교의 자기구원 방법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죄를 짓지 말고 전생부터의 묵은 業을 깨기 위하여 심법을 닦는 것인데, 수도의 도량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세계이다. 따라서 무수한 윤회과정을 통하여 점진적 자기 완성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도덕적 접근에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자손을 두어야 하는 우주 자연법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成佛한 자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성불은 선천우주의 상극성에 비추어 보아 비현실적이며, 이에 따라 불교의 구원관에는 우주의 순환원리가 결여되어 있어 마음 닦는 것에 치중한다는 문제가 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彌勒佛로 자인(自認)하였으며 자신이 세계에 강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상에 30년동안 의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나는 원래 미륵불이었는데, 人世에 환생하여 5만년의 용화세계 運道를 짜놓고 금산사의 미륵불로 귀의하여 있을 것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찾아 오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불양답이나 차지하리라.”2)고 함으로써 불교와 관련시키고 있다. 실제로 종도 김형렬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靈體로 신봉하였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지만 증산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륵불과 같은 이러한 진인 출현설은 정확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 폭압과 현실적 고통이 심할수록 민중에게 설득력있는 신앙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고, 민중들은 미륵의 하생과 함께 이 眞人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퇴조기에는 일단 사라지거나 불신되지만 17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기록만 보더라도 민중운동의 상승기에는 역사의 새로운 움직임과 밀착되어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형성되는 이야기처럼 긴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하고 규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미륵신앙의 증산교적 수용은 증산이 20세기에 출세한 미륵이므로 한층 더 구체화한 것이고, 증산사상에 나타나는 후천선경은 용화세계보다 현대감각에 알맞게 발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