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중세 초기
아우구스티노 이후 수백년 동안 서방교회에서는 죽은 후의 정화의 고통에 대한 신앙이 계속 발전되었는데, 이 신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교회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죽기 전이나 후에 그에 알맞는 보속을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에 근거를 둔 고대교회의 참회 실천이다. 중세 초기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교황 대 그레고리오(+604)의 설교이다. 그 자신은 죽은 다음에 가능한 정화의 불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수도자 유스투스(Justus)가 삼십일 동안 계속 그를 위해서 봉헌한 미사 덕분에 불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야기(Dial. 4,57)는 후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는 달리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를 둘러싼 논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다음의 정화에 관한 어떤 생각도 위장된 만물회복설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희랍 교부들은 정화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었다.
3.2.6. 스콜라 신학
중세 스콜라 신학은 영혼의 불멸과 육신의 부활에서 출발하여, 두 가지 진술을 정확하게 서로 관련지으려고 시도하였다.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두 학파가 분명하게 서로 구분된다. 육신과 영혼을 철저히 분리하는 사고의 대표자들(Hugo von St. Viktor, Robertus Pullus, Robert von Melun)은 사실상 인간을 인간의 영혼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죽음과 부활의 중간상태에 육신이 없는 영혼을 생각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있을 육신의 부활이 이미 영혼이 누리던 행복에 더 무엇을 보태주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른 이들(Gilbert de la Porrée와 그의 학파)은 인간의 단일성을 더욱 강조한다. 즉 육신과 영혼이 함께 인격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육신과 영혼의 분리란 인간 존재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분리를 넘어서 지속되는 정신적 영혼은 존재를 거스리는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이런 인간상을 배경으로 하면 육신의 부활은 중요하게 된다. 즉 육신은 부활은 단지 육신만의 부활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기 스콜라 신학이 시작되면서 아욱세레의 빌헬름(Wilhelm von Auserre, +1231)은 인간의 육신-영혼의 구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 의거해서 표현하게 된다: 질료와 형상은 서로 둘로 분리될 수 없는 부분들로서 모든 존재자에 내재하는 서로 상관된 존재의 원리이다. 중기 스콜라 신학의 정식(定式) “anima forma corporis”(영혼은 육신의 본질적 형상이다)는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으로 “존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정식을 다시 한 번 첨예화시킨다: 영혼은 육신의 유일한 본질적 형상이다(anima unica forma corporis). 비엔나 공의회(1311-1312)는 이 질료형상적 정식을 (토마스와 같이 첨예화된 형태로는 아니지만) 인정한다: 정신적 영혼은 “그 자체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영혼의 형상이다”(DS 902).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혼의 본질에는 육신으로 정향되어 있다는 것과 육신 안에서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영혼은 그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육신적 부활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영혼의 불멸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전체성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채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교황 요한 22세(1316-1334)를 둘러싼 14세기의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교황은 1331년 아비뇽에서 선택된 이들의 영혼은 죽은 모든 이들의 부활과 공심판 이후에 비로소 지복직관(至福直觀)에 이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들은 그 이전에는 단지 불완전한 행복만을 누린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특별히 파리의 신학자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지만, 교황 요한 22세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다림의 시간을 언급한 교부들을 의존해서 자신을 변호하였다. 마침내 그는 공개적인 저항에 부딪쳐서 양보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의 후계자인 베네딕또 12세(1334-1342)는 “Benedictus Deus”(1336) 헌장에서 요한 22세의 반대 입장을 구속력 있는 가르침으로 선포하였다: 죽은 후에 정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신자들의 영혼은 “천국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이 영혼은 죽은 후 즉시 혹은 정화 후에 낙원에 있게 되는데…,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 전에 그리고 공심판 전에도 그렇게 된다”(DS 1000).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영혼은 이미 지금 “참으로 행복하게” 된다(DS 1000). 저주받은 이들도 이와 상응한다: “실제로 중죄 속에 죽은 영혼들은 즉시 지옥으로 떨어져서 지옥의 고통 속에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곧 이어서 계속되기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 날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육신과 함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자신의 행실에 대해 해명을 하게 되는데, 이는 각자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 이다”(DS 1002). 한편으로는 “죽은 다음 즉시” 참된 행복 혹은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 날에” 상과 벌을 받는다는 두 가지 긴장된 진술을 통해서 영혼의 불멸성과 인간의 전체성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3.2.7. 연옥 교리의 계속적 전개
중세 초기에 형성된 죽은 다음의 정화에 관한 사상은 스콜라 신학 초기에 참회의 신학과 연결되었고,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죄과(罪過)의 상태(reatus culpae)”와 “벌을 받아야 하는 상태(reatus poenae)”를 구분하면서 신학적 가르침으로 완성되었다: 죄가 사해진다고 해서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에게 초래(招來)한 벌을 받아 마땅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상태는 죄의 사함을 통해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고, 정화의 과정을 통해서, 즉 죽기 전에 그에 상응하는 보속을 행함으로써, 혹은 죽은 후에 수동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정화 사건을 통해서 소멸되어야 한다. 두번째의 경우를 “연옥(purgatorium)”라고 불렀다. 죽은 다음의 정화 과정에서 산 이들은 중재의 기도를 통해서 죽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
연옥 교리에 대해서 동방과 서방의 신학은 차이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영혼은 죽은 다음에 심판날까지 벌이나 상을 받지 않고 미결의 상태에 있는데, 왜냐하면 육신이 없이는 벌이나 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토마스는, 이런 주장은 그리스인들이 모든 벌은 정화를 위한 벌이라는 오리게네스의 오류를 피하려다가 “그와 반대되는 오류”, 즉 죽은 이후에 정화의 벌이란 아예 없다는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에 반대해서 토마스는 영원한 고통과 “대죄 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특정한 정화의 벌”을 구분한다. 토마스는 이런 구분을 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으로 간주한다. 그는 이런 가르침이 신학적으로는 아무도 오점을 지니고서 하늘에 영광에 이르를 수 없다는 성서구절들(지혜 7,25; 이사 35,8; 묵시 21,27), 아우구스티노 이래로 자주 인용된 1고린 3,13-15(“불을 통해서 구원된다”), 죄 사함 이후에도 보속의 의무를 부과하는 교회의 참회 실천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에 근거한다고 본다(De Rat. Fid.). 그러나 정화의 “장소”에 대해서 토마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In Sent. IV d.21 q.1 a.1).
교황 이노첸시오 4세(1243-1254)는 동방교회에 대해서 죽은 다음의 정화와 죽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중재 기도를 확고히 보존할 것을 엄명하고, 그밖에도 동방교회가 라틴교회의 언어용법(“purgatorium”)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DS 838). 황제 마카엘 팔레올로구스(Michael Paläologus)의 신앙고백(1274: DS 856)과 나중에 피렌체 공의회가 선포한 “그리스인들을 위한 훈령”(1439: DS 1304)에서 이 가르침은 확인되었다. 그러나 교황 이노첸시오가 사용한 단어 “장소”, 정화의 “불”은 삭제되었다.
3.2.8. 근세
근세의 신학에서 “불멸의 영혼”과 “중간 상태”에 대한 사상이 무조건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마르틴 루터에게 “인간의 영혼”이란 “육신이 소멸된 다음에서 남아 있는 불멸의 정신”이다. 하지만 그는 불멸성을 실체적으로가 아니라 관계적으로, 즉 하느님과의 관계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영혼은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불멸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집어넣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Promotionsdisputation vom 3.7. 1545: WA 39, II 400f.). 루터는 중간 상태의 가르침을 영혼이 죽음의 잠을 잔다는 주장을 통해서 약화시킨다. 연옥 교리와는 단계적으로 결별을 고한다. 그는 대사(大赦)를 거부하면서 연옥에 대한 신앙은 성서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분명하게 연옥은 “단지 악마의 속임수”라고 하면서 배척하였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전면에는 “연옥을 이용한 장사”, “연옥 미사의 대목장(場)” 그리고 다른 의문스러운 관습들을 극복하려는 실천적인 관심이 있었다(ArtSmalc. 2,2: WA 50. 205f.).
종교개혁자들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연옥(purgatorium)은 있다, 그리고 거기에 붙잡혀있는 영혼들은 신앙인들의 중재 기도를 통해서, 특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단의 제사를 통해서 도움을 받는다”(DS 1820). 동시에 공의회는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사를 받아들여서 연옥에 대한 공상이나 과대한 수식, 마술적으로 오해될 수 있는 기도의 실천, 두려움을 이용한 장사에 대해서 경고를 하였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백성들을 위한 대중적인 설교에서 신앙심 고취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어렵고 세세한 질문들은… 제외되어야 한다… 그들(주교들)은 단지 호기심이나 미신에 속하거나 혹은 추악한 이득을 노리는 것을 신앙인들에 대한 걸림돌과 방해물로 금지시켜야 한다”(DS 1820).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수백년간 일반의 의식 속에서는 영혼불멸의 가르침이 참된 종교의 중심적 특성이 되었다. 철학에서는 “영혼”과 “주체”를 동일시하게 되었고 육신은 영혼불멸의 사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같은 시대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개신교의 신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육신 부활에 대한 희망을 주체의 불멸성으로 해석하였다. 철저하게 교의에 의존하는 가톨릭 신학에서는 우선적으로 영혼의 종말론적 운명에 관심을 둔 중세 후기 교회 교도권의 표명(3.2.6과 3.2.7. 참조)이 계속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날에 있을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는 계속 가르쳤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상실되었다.
3.2.9. 20세기
20세기 전반에 개신교 측에서 “변증법적 신학”의 고유한 특성이면서 새로운 성서학의 지지를 받은 대립적 생각을 통해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학이나 종교와 뚜렷히 대립되고, 히브리 사상은 희랍적 사상과, 성서적 종말론은 계몽주의적 신심과 뚜렷히 대립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교개혁자들의 특색인 양자 택일의 사상이 강화된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 고유의 불멸하는 영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영혼의 불멸성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스럽게 되었다; 이제는 죽음을 단지 육체의 소멸만이 아닌 전체 인간의 소멸, 즉 “총체적 죽음(Ganztod)”으로 정의하였다; 부활은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이다. 죽음과 마지막 날 사이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하느님의 무시간성 안에로 죽어들어 간다”(Carl Stange, Emil Brunner) 혹은 “죽음의 잠”(Oscar Cullmann), 또는 “하느님의 뜻 안에 보존된다”(Paul Althaus)고 말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비로소 1950년에 이르러서 종말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대상으로 새로운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런 토론을 가동시킨 것은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와 성모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과 함께” 승천하셨다는 가르침(1950: DS 3903)의 교의화(敎義化)이다. 토론이 진행되면서 우선 육신에서 벗어난 영혼에 대한 것이 문제시되었고(예를 들어서 칼 라너), 그 다음에는 그레사케(Gibert Greshake)와 로핑크(Gehard Lohfink)가 “영혼”이란 개념의 신학적 사용 가치에 대해서, 중간 상태에 대한 상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그 대신에 “죽음 안에서의 부활(Auferstehung im Tod)”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다. 이제 가톨릭 신학에서도 개신교 신학에서와 유사하게 (신-)플라톤적 영혼 불멸 사상과 성서적 부활의 희망을 구분하는 것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자들은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과는 달리 이런 필요한 구분이 반드시 배타적인 대립 관계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간주한다. 요셉 랕찡어(Josef Ratzinger)는 처음에는 “탈(脫)플라톤 사상적 종말론”에로의 전환을 함께 하였지만 나중에서 이런 경향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4.4.2. 참조).
3.2.10. 요약
교회 역사의 고찰을 통해서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부활을 인류역사와 창조 역사 전체의 완성(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이라고 표현한다)으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 인간의 삶이 죽음, 부활 그리고 심판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것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특히 이미 고대교회는 두 가지 전선(戰線)을 형성하면서 싸워야만 했다: 넓게 퍼져있는 회의적인 사상에 반대해서 플라톤 사상가들과 함께 죽음을 넘어서 희망을 가르쳤고, 플라톤 사상과 영지주의 안에 있는 이원론적 경향에 반대해서는 부활의 육신성을 강조하였다. 그리스적 육체-영혼-용어의 수용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 관한 가르침은 다음 두 가지를 함께 연결하는 하나의 이론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즉 각 개인에게 종말이 가깝다는 것과 마지막 날에 있을 보편적 완성의 중요성이 그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죽음 이후의 정화에 대한 생각도 자리한다. 그러나 그리스적 개념들의 영향으로 사실상 이원론적 사고에 가깝게 육신을 업신여기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바로 여기로부터 오늘날까지 이르는 신학적 논쟁을 설명할 수 있다.
4. 조직신학적 고찰
4.1. 해석학적 성찰에 대한 기억
개인적 종말론은 죽은 다음의 인간의 미래에 대한 표상을 묘사한다: 죽음, 심판, 정화, 부활, 완성이다. 이런 표상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집단적 종말론에서 언급한 해석학적 성찰(I.4.2.), 특별히 희망의 언어는 원래 표상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체험을 넘어선 실재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림이나 표상이 없어서는 안된다. 이런 표상적 성격을 의식하고 있어야만 종말에 대한 언사를 사건의 순서에 관한 정확한 서술로 오해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래야만 표상의 언어가 투명성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구체적인 표상들이 때에 따라서 다른 표상들을 통해서 보충되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점은 정화하는 불의 표상과 같은 개별적 표상이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간에 대한 표상과 같은 상상의 모델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4.2. 죽음
신스콜라 신학은 죽음에 관해서 보통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얘기한다. (1) 모든 인간은 죽어야만 한다. (2)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을 의미한다. (3) 죽음의 죄에 따르는 벌이다. 근래의 신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칼 라너를 통해서 다른 진술이 추가되었다: 죽음은 단순히 인간에게 닥쳐오는 사건으로서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바로 이렇게 수용하고 감수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행위이기도 하다.
4.2.1. 죽음의 일반성
모든 인간은 죽어야만 한다. 이 문장이 과연 신학적 진술인가 하고 물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첫째, 이 문장은 모두가 신앙이나 신학의 도움 없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넘어서지 않고, 둘째, 죽음의 불가피성은 성서에서 본래적 주제가 아니라 단지 전제, 즉 구원의 소식이 선포되는 데에 어두운 체험적 배경을 이루는 것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술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이 진술은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데에 처음부터 죽음을 포함시킨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부정적 측면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 부여를 생각할 수 있다: 삶이란 계속해서 “소모되는 것”이라면, 이런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소모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삶이 움직이는 방향에 부합하는 실천일 것이다(4.2.4. 참조).
4.2.2. “나그네살이의 종결”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삶을 “나그네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삶이 ‘도중에 있음’이며 결단의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대한 반대는 도착했음, 결정됨이다. 신학의 전통에서 흔히 사용되는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것을 말하고자 한다: 죽음과 함께 결단의 시간은 중단된다. 죽는 순간에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결단이 내려진다. 죽음은 단지 지금의 삶을 끝맺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을 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인간의 실존의 무게가 온전히 드러난다: 나의 삶은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다. 기회는 임의대로 자주 반복되지 않는다. 내 결정은 잠정적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진술의 성서적 근거로서 신약성서에 나타난 깨어있으라는 촉구와 시간을 잘 사용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라는 경고를 제시한다(마태 13,33-37; 마태 25,13; 요한 9,4; 에페 5,16; 골로 4,5). 물론 이 말씀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서 한계 지워진 일반적 상황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 특별한 구원의 상황을 대상으로 발설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이 이 세상 삶의 유일회성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결단이 지니는 영원한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런 표현은 내용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성서적 진술과 다소간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4.2.3. 부설: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죽음에서 삶에로의 귀환은 있을 수가 업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의학적으로 죽음이 확인된 사람이 다시 소생한 것에 대한 보고서가 널리 전파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의학으로부터 예상하지 않았던 지원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살아있다는 표지(맥박, 심전도)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가 의학적 소생 조처를 통해서 “다시 살아난” 환자들과 그들이 “죽음”과 “다시 얻는 삶” 사이의 시간에 겪었던 체험에 관한 몇몇 의사들의 기록은 많은 관심을 이끌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환자들은 의사가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그들의 몸밖에 나와 있는 것을 체험하고, 이와 동시에 수술대 위에 남겨진 자신의 육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친척, 친구들이 자신에게 다가 와서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다. 그들에게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빛나는 존재”, “사랑과 온기를 발산하는 존재”가 나타난다. R.A.Moody, Leben nach dem Tod, Reinbek, 1977, 28.
그들은 이 존재로부터 말이 필요 없는 어떤 질문이 나오는 것을 느끼는데, 이 질문은 그들 삶의 전체를 개관(槪觀)하고 평가하도록 한다. 그들은 섬광과 같는 짧은 순간에 그들 삶의 중요한 단계들을 다시 한 번 되돌이켜 본다. 그런 과정에서 “기쁨, 사랑, 평화의 감정이 압도적으로” Ibid.,
채워지고, 그래서 그들중 대부분은 내적인 저항이나 슬픔과 실망 속에서 삶에로 귀환하여 그들의 원래 육신과의 재결합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모두가 이런 체험들을 다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부 사항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보도를 종합하면,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본적 틀을 알아낼 수 있다.
신학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보고서에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죽음, 육신과 영혼의 분리, 변용(變容)된 육신, 죽은 이들과의 재회, 심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새로운 삶 안에서 누리는 행복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내세에 대한 목격 증인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하느님, 초월, 죽음 이후의 삶이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인가?
결정적인 질문은 무엇을 “죽음”이라고 보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 내용상 아주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학의 발전이 스스로 죽음에 대해서 구분을 하기 때문이다. 즉 심장의 정지에 의한 죽음, 뇌사, 세포사 등이다. 신학이 “죽음”(그리고 “죽음 다음의 삶”)을 말할 때 그것은 삶의 결정적인 종점, 이승의 삶으로의 회귀가 더 이상 불가능한 “지점(地點)”을 의미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면 소위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보고서는 근본적으로 “죽은 후의 삶”의 체험이 아니라, 죽음에 근접한 체험, 삶의 가장 끝자리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저승에서의 귀환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 상황에서의 귀환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관심을 갖고 이런 보고서를 대한다. 인간이 극단의 상황에서 체험한 것, 아마도 모든 의지적-이성적 조정이 멈춘 상태에서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른 것, 그것은 아마도 인간 안에 초월에로 향하는 “안테나”가 있다는 간접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여기서 초월이란 인간 안에 깊숙히 자리한 희망,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전하는 희망의 내용에 상응하는 그런 희망에로 향하는 “안테나”를 뜻한다. 이런 한에서 소생에 대한 보고서(그것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간주되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린 시절에 종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환자들까지 포함하는 경우라면)는 초월에 대한 증명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인간의 초월에로의 경향성에 대한 참조가 될 수 있겠다.
개신교 신학자 요한 크리스토프 함페(Johann Christoph Hampe) 참조: J.Ch.Hampe, Sterben ist doch ganz anders, Stuttgart, 1975.
는 이 보고서가 실천 신학적 측면에서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고서는 대체적으로 죽는 것(여기서는 죽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다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이 어둠, 비좁음, 차거움, 외로운, 두려움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따뜻함, 빛, 사랑, 기쁨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도록 한다.
4.2.4.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로 파악한다.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서 때때로 인용되는 창세 2,16-17과 3,19는 사실상 명확한 성서적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창세 2,17에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창세 3장에서 아담의 범죄 이후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에게서는 죄와 죽음의 관련이 명백해진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뚫고 들어왔습니다”(로마 5,12). 그래서 교회 전통은 죄와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통상적으로 로마서를 인용한다(DS 372; 1512 참조).
그러나 죄와 죽음과의 관련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다. 이렇게 해석이 다양한 데에는 “죄에 대한 벌”이란 개념 이해의 차이가 한 몫을 한다(4.5.1. 참조).
전통적인 해석은 낙원에서의 인간은 범죄 이전에는 죽지 않는 “과성(過性) 은혜”를 간직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비로소 죄를 지음으로써 이 은혜를 상실하고 죽게 되었고, 낙원의 원조와 함께 전 인류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해석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 외의 자연 사이의 생물학적, 발생적 관련을 인식하고서도 원래는 인간이 모든 생물에게 해당하는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환경학적, 사회학적으로 볼 때 첫 인간과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았다면 늦게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갈 기회는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심리학적으로 끝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과연 바랄만한 것일까? 바로 인생의 유한성 때문에 삶의 매 순간이 가치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말로 한다면,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닐까,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특별히 성서에 근거를 두고 물어야 할 것이다: 믿는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데도 어떻게 바오로는 죽음이 힘을 잃었다고 찬양할 수 있었을까?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는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는냐?”(1고린 15,55).
여기서 죽음에 대한 승리는 죽음의 제거가 아닌 그 변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죄로 인해서 죽음 그 자체가 왔다고 하기 보다는 죽음을 달리 체험하게 되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근래의 신학은 바로 이런 해석의 방향으로 나간다: 현세의 삶이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가 어느날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죽음을 적대적으로 체험하는 것, 즉 삶의 단절, 삶의 역동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래서 삶 전체의 의미를 의문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체험하는 사실이 죄의 결과이다. “낙원”의 인간은 죽음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사랑의 헌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행복한 탄생으로서 평화롭게 맞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죄는 신뢰와 사랑의 부족이다. 죄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가 와서 내면으로부터 오염시켰다는 것(로마 5,12 참조)이 옳다면, 죄와 죽음의 체험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완성으로 맞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죽음,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 죽음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죄의 결과다. 죽음에 대한 이런 체험은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벌하신 때문이라기 보다는 상황 자체에서 기인한다. 이 “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죄에서 흘러나오는 이기주의적인 자기폐쇄라고 하겠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죄는 “죽음의 독침”(1고린 15,56)인 것이다.
4.2.5. 헌신으로서의 죽음
신학적 전통은 대부분 죽음의 한 면만을 얘기한다. 즉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운명적 불행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이런 부정적 특성은 종말론에서 죄의 극복을 통한 죽음의 무력화보다는 죽음과 죄의 관계를 더 분명한 주제로 삼음로써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신학적 전통은 성서적 진술을 온전히 반영하기 못한채 머무른다고 하겠다.
성서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죽음에 대한 승리(2.8. 참조)와 이미 세상에서 가능하게 된 “죽음에서 삶에로의 전이(轉移)”(요한 5,24; 1요한 3,14)만을 언급하지 않고, 믿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죽음은 적극적 행동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수난”으로, 예수가 찾거나 원하지 않고 참아 받은 것으로서 표현되는데, 예수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지녔고(마태 14,32-41) 이 죽음은 예수를 극도로 버림받은 상태로 내몰았다(마르 15,34). 그러나 다른 한편 특별히 루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이 죽음을 그의 적극적 행동으로서, 아버지의 손에 내맡기는 것(루가 23,46), “아버지께로 가는 것”(요한 14,2.12.28;16,7), “헌신”과 마지막 “실현”(요한 19,30)로 해석한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를 추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로마 6,1-11)으로, 생명을 바치는 것(요한 15,13), 자신을 버리는 것(마르 8,35; 마태 10,39; 16,25; 루가 9,24; 17,33; 요한 12,25),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단순히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늘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2고린 4,10-11)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인생의 종점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상대화시키는데, 그래서 바오로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삶의 능동적 실현이고 “마지막” 죽음, 즉 생을 종결하는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닥쳐와서 인간이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죽음은 능동적 행동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 실존의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특별히 칼 라너에 의해 근래의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는 죽음의 “실제-존재론적 변증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죽음은 “외부의 개입에 의한 단절, 파멸,… 갑작스런 사건,…인간을 극도로 무력화시키는 사건”으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활동적인 완성, 능동적으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 삶의 성과의 참됨을 끝까지 증거하는 것, 자신을 전적으로 소유하는 행동” K.Rahner, Theologie des Todes, Freiburg, 1957, 30.
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라너의 추상적인듯한 명제는 그의 제자 라디슬라우스 보로슈(Ladislaus Boros, +1981)가 “최후결단(Endentscheidung)”이라는 이론을 내세움으로써 구체화된다. 보로슈에 의하면 마지막에,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최초로 모든 것을 결단하는 온전한 인격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안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 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인 행동을 방해하는 육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므로 바로 이 순간에, 아니 비로소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결단과 무조건적인 신앙적 결단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신학에서는 최후결단의 이론에 점점 더 많은 비판이 가해 진다: 죽음 안에서 특별한 결단의 상황을 맞게 된다는 가정은 성서에서는 물론 체험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이론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에 신학에서 의문에 처하게 된 인간학적 모델(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은 실존적-윤리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죽음 이전의 모든 결단은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최후의 결단”을 위해 평가 절하되고 이와 함께 현재 삶에서 진지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죽음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죽는 순간에 아마도 아주 특별한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 보다는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강도(强度)있는 삶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을 선사하며, 신뢰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전체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실존, 이와 함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용상으로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헌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맞는 죽음은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살면서 실현한 사랑의 마지막 완성의 가능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아오는 중에 이미 자신을 하나 하나 하느님께 넘겨 드렸는데, 죽음 안에서 하느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넘겨 드린다.
그러나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무조건 다 실제로 상대방을 위하는 죽음은 아니다. 또한 모든 죽음이 헌신의 죽음은 아니다: 죽음이 단지 패배, 의미없는 단절, 손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생명을 그냥 던져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대로― 투신의 결과, 아끼는 사람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것, 그가 실천해온 헌신적인 삶의 최종적 단계가 될 수 있다. 헌신으로서의 죽음, 이것이야말로 의미 가득하고, 원래 목표로 하는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굶주림, 전쟁, 부주의로 인한 교통 사고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데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주 폭력이나 때 이른 죽음은 자신의 인간에게 사랑의 투신과 자유로운 헌신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명을 보호하고 족진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게 된다.
헌신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에 대한 논리적 전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신앙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항상 부활 사상에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주제로 넘어간다.
종말론 제2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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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중세 초기
아우구스티노 이후 수백년 동안 서방교회에서는 죽은 후의 정화의 고통에 대한 신앙이 계속 발전되었는데, 이 신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교회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죽기 전이나 후에 그에 알맞는 보속을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에 근거를 둔 고대교회의 참회 실천이다. 중세 초기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교황 대 그레고리오(+604)의 설교이다. 그 자신은 죽은 다음에 가능한 정화의 불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수도자 유스투스(Justus)가 삼십일 동안 계속 그를 위해서 봉헌한 미사 덕분에 불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야기(Dial. 4,57)는 후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는 달리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를 둘러싼 논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다음의 정화에 관한 어떤 생각도 위장된 만물회복설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희랍 교부들은 정화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었다.
3.2.6. 스콜라 신학
중세 스콜라 신학은 영혼의 불멸과 육신의 부활에서 출발하여, 두 가지 진술을 정확하게 서로 관련지으려고 시도하였다.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두 학파가 분명하게 서로 구분된다. 육신과 영혼을 철저히 분리하는 사고의 대표자들(Hugo von St. Viktor, Robertus Pullus, Robert von Melun)은 사실상 인간을 인간의 영혼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죽음과 부활의 중간상태에 육신이 없는 영혼을 생각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있을 육신의 부활이 이미 영혼이 누리던 행복에 더 무엇을 보태주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른 이들(Gilbert de la Porrée와 그의 학파)은 인간의 단일성을 더욱 강조한다. 즉 육신과 영혼이 함께 인격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육신과 영혼의 분리란 인간 존재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분리를 넘어서 지속되는 정신적 영혼은 존재를 거스리는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이런 인간상을 배경으로 하면 육신의 부활은 중요하게 된다. 즉 육신은 부활은 단지 육신만의 부활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기 스콜라 신학이 시작되면서 아욱세레의 빌헬름(Wilhelm von Auserre, +1231)은 인간의 육신-영혼의 구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 의거해서 표현하게 된다: 질료와 형상은 서로 둘로 분리될 수 없는 부분들로서 모든 존재자에 내재하는 서로 상관된 존재의 원리이다. 중기 스콜라 신학의 정식(定式) “anima forma corporis”(영혼은 육신의 본질적 형상이다)는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으로 “존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정식을 다시 한 번 첨예화시킨다: 영혼은 육신의 유일한 본질적 형상이다(anima unica forma corporis). 비엔나 공의회(1311-1312)는 이 질료형상적 정식을 (토마스와 같이 첨예화된 형태로는 아니지만) 인정한다: 정신적 영혼은 “그 자체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영혼의 형상이다”(DS 902).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혼의 본질에는 육신으로 정향되어 있다는 것과 육신 안에서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영혼은 그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육신적 부활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영혼의 불멸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전체성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채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교황 요한 22세(1316-1334)를 둘러싼 14세기의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교황은 1331년 아비뇽에서 선택된 이들의 영혼은 죽은 모든 이들의 부활과 공심판 이후에 비로소 지복직관(至福直觀)에 이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들은 그 이전에는 단지 불완전한 행복만을 누린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특별히 파리의 신학자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지만, 교황 요한 22세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다림의 시간을 언급한 교부들을 의존해서 자신을 변호하였다. 마침내 그는 공개적인 저항에 부딪쳐서 양보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의 후계자인 베네딕또 12세(1334-1342)는 “Benedictus Deus”(1336) 헌장에서 요한 22세의 반대 입장을 구속력 있는 가르침으로 선포하였다: 죽은 후에 정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신자들의 영혼은 “천국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이 영혼은 죽은 후 즉시 혹은 정화 후에 낙원에 있게 되는데…,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 전에 그리고 공심판 전에도 그렇게 된다”(DS 1000).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영혼은 이미 지금 “참으로 행복하게” 된다(DS 1000). 저주받은 이들도 이와 상응한다: “실제로 중죄 속에 죽은 영혼들은 즉시 지옥으로 떨어져서 지옥의 고통 속에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곧 이어서 계속되기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 날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육신과 함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자신의 행실에 대해 해명을 하게 되는데, 이는 각자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 이다”(DS 1002). 한편으로는 “죽은 다음 즉시” 참된 행복 혹은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 날에” 상과 벌을 받는다는 두 가지 긴장된 진술을 통해서 영혼의 불멸성과 인간의 전체성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3.2.7. 연옥 교리의 계속적 전개
중세 초기에 형성된 죽은 다음의 정화에 관한 사상은 스콜라 신학 초기에 참회의 신학과 연결되었고,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죄과(罪過)의 상태(reatus culpae)”와 “벌을 받아야 하는 상태(reatus poenae)”를 구분하면서 신학적 가르침으로 완성되었다: 죄가 사해진다고 해서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에게 초래(招來)한 벌을 받아 마땅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상태는 죄의 사함을 통해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고, 정화의 과정을 통해서, 즉 죽기 전에 그에 상응하는 보속을 행함으로써, 혹은 죽은 후에 수동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정화 사건을 통해서 소멸되어야 한다. 두번째의 경우를 “연옥(purgatorium)”라고 불렀다. 죽은 다음의 정화 과정에서 산 이들은 중재의 기도를 통해서 죽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
연옥 교리에 대해서 동방과 서방의 신학은 차이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영혼은 죽은 다음에 심판날까지 벌이나 상을 받지 않고 미결의 상태에 있는데, 왜냐하면 육신이 없이는 벌이나 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토마스는, 이런 주장은 그리스인들이 모든 벌은 정화를 위한 벌이라는 오리게네스의 오류를 피하려다가 “그와 반대되는 오류”, 즉 죽은 이후에 정화의 벌이란 아예 없다는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에 반대해서 토마스는 영원한 고통과 “대죄 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특정한 정화의 벌”을 구분한다. 토마스는 이런 구분을 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으로 간주한다. 그는 이런 가르침이 신학적으로는 아무도 오점을 지니고서 하늘에 영광에 이르를 수 없다는 성서구절들(지혜 7,25; 이사 35,8; 묵시 21,27), 아우구스티노 이래로 자주 인용된 1고린 3,13-15(“불을 통해서 구원된다”), 죄 사함 이후에도 보속의 의무를 부과하는 교회의 참회 실천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에 근거한다고 본다(De Rat. Fid.). 그러나 정화의 “장소”에 대해서 토마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In Sent. IV d.21 q.1 a.1).
교황 이노첸시오 4세(1243-1254)는 동방교회에 대해서 죽은 다음의 정화와 죽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중재 기도를 확고히 보존할 것을 엄명하고, 그밖에도 동방교회가 라틴교회의 언어용법(“purgatorium”)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DS 838). 황제 마카엘 팔레올로구스(Michael Paläologus)의 신앙고백(1274: DS 856)과 나중에 피렌체 공의회가 선포한 “그리스인들을 위한 훈령”(1439: DS 1304)에서 이 가르침은 확인되었다. 그러나 교황 이노첸시오가 사용한 단어 “장소”, 정화의 “불”은 삭제되었다.
3.2.8. 근세
근세의 신학에서 “불멸의 영혼”과 “중간 상태”에 대한 사상이 무조건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마르틴 루터에게 “인간의 영혼”이란 “육신이 소멸된 다음에서 남아 있는 불멸의 정신”이다. 하지만 그는 불멸성을 실체적으로가 아니라 관계적으로, 즉 하느님과의 관계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영혼은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불멸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집어넣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Promotionsdisputation vom 3.7. 1545: WA 39, II 400f.). 루터는 중간 상태의 가르침을 영혼이 죽음의 잠을 잔다는 주장을 통해서 약화시킨다. 연옥 교리와는 단계적으로 결별을 고한다. 그는 대사(大赦)를 거부하면서 연옥에 대한 신앙은 성서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분명하게 연옥은 “단지 악마의 속임수”라고 하면서 배척하였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전면에는 “연옥을 이용한 장사”, “연옥 미사의 대목장(場)” 그리고 다른 의문스러운 관습들을 극복하려는 실천적인 관심이 있었다(ArtSmalc. 2,2: WA 50. 205f.).
종교개혁자들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연옥(purgatorium)은 있다, 그리고 거기에 붙잡혀있는 영혼들은 신앙인들의 중재 기도를 통해서, 특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단의 제사를 통해서 도움을 받는다”(DS 1820). 동시에 공의회는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사를 받아들여서 연옥에 대한 공상이나 과대한 수식, 마술적으로 오해될 수 있는 기도의 실천, 두려움을 이용한 장사에 대해서 경고를 하였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백성들을 위한 대중적인 설교에서 신앙심 고취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어렵고 세세한 질문들은… 제외되어야 한다… 그들(주교들)은 단지 호기심이나 미신에 속하거나 혹은 추악한 이득을 노리는 것을 신앙인들에 대한 걸림돌과 방해물로 금지시켜야 한다”(DS 1820).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수백년간 일반의 의식 속에서는 영혼불멸의 가르침이 참된 종교의 중심적 특성이 되었다. 철학에서는 “영혼”과 “주체”를 동일시하게 되었고 육신은 영혼불멸의 사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같은 시대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개신교의 신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육신 부활에 대한 희망을 주체의 불멸성으로 해석하였다. 철저하게 교의에 의존하는 가톨릭 신학에서는 우선적으로 영혼의 종말론적 운명에 관심을 둔 중세 후기 교회 교도권의 표명(3.2.6과 3.2.7. 참조)이 계속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날에 있을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는 계속 가르쳤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상실되었다.
3.2.9. 20세기
20세기 전반에 개신교 측에서 “변증법적 신학”의 고유한 특성이면서 새로운 성서학의 지지를 받은 대립적 생각을 통해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학이나 종교와 뚜렷히 대립되고, 히브리 사상은 희랍적 사상과, 성서적 종말론은 계몽주의적 신심과 뚜렷히 대립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교개혁자들의 특색인 양자 택일의 사상이 강화된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 고유의 불멸하는 영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영혼의 불멸성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스럽게 되었다; 이제는 죽음을 단지 육체의 소멸만이 아닌 전체 인간의 소멸, 즉 “총체적 죽음(Ganztod)”으로 정의하였다; 부활은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이다. 죽음과 마지막 날 사이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하느님의 무시간성 안에로 죽어들어 간다”(Carl Stange, Emil Brunner) 혹은 “죽음의 잠”(Oscar Cullmann), 또는 “하느님의 뜻 안에 보존된다”(Paul Althaus)고 말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비로소 1950년에 이르러서 종말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대상으로 새로운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런 토론을 가동시킨 것은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와 성모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과 함께” 승천하셨다는 가르침(1950: DS 3903)의 교의화(敎義化)이다. 토론이 진행되면서 우선 육신에서 벗어난 영혼에 대한 것이 문제시되었고(예를 들어서 칼 라너), 그 다음에는 그레사케(Gibert Greshake)와 로핑크(Gehard Lohfink)가 “영혼”이란 개념의 신학적 사용 가치에 대해서, 중간 상태에 대한 상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그 대신에 “죽음 안에서의 부활(Auferstehung im Tod)”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다. 이제 가톨릭 신학에서도 개신교 신학에서와 유사하게 (신-)플라톤적 영혼 불멸 사상과 성서적 부활의 희망을 구분하는 것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자들은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과는 달리 이런 필요한 구분이 반드시 배타적인 대립 관계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간주한다. 요셉 랕찡어(Josef Ratzinger)는 처음에는 “탈(脫)플라톤 사상적 종말론”에로의 전환을 함께 하였지만 나중에서 이런 경향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4.4.2. 참조).
3.2.10. 요약
교회 역사의 고찰을 통해서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부활을 인류역사와 창조 역사 전체의 완성(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이라고 표현한다)으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 인간의 삶이 죽음, 부활 그리고 심판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것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특히 이미 고대교회는 두 가지 전선(戰線)을 형성하면서 싸워야만 했다: 넓게 퍼져있는 회의적인 사상에 반대해서 플라톤 사상가들과 함께 죽음을 넘어서 희망을 가르쳤고, 플라톤 사상과 영지주의 안에 있는 이원론적 경향에 반대해서는 부활의 육신성을 강조하였다. 그리스적 육체-영혼-용어의 수용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 관한 가르침은 다음 두 가지를 함께 연결하는 하나의 이론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즉 각 개인에게 종말이 가깝다는 것과 마지막 날에 있을 보편적 완성의 중요성이 그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죽음 이후의 정화에 대한 생각도 자리한다. 그러나 그리스적 개념들의 영향으로 사실상 이원론적 사고에 가깝게 육신을 업신여기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바로 여기로부터 오늘날까지 이르는 신학적 논쟁을 설명할 수 있다.
4. 조직신학적 고찰
4.1. 해석학적 성찰에 대한 기억
개인적 종말론은 죽은 다음의 인간의 미래에 대한 표상을 묘사한다: 죽음, 심판, 정화, 부활, 완성이다. 이런 표상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집단적 종말론에서 언급한 해석학적 성찰(I.4.2.), 특별히 희망의 언어는 원래 표상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체험을 넘어선 실재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림이나 표상이 없어서는 안된다. 이런 표상적 성격을 의식하고 있어야만 종말에 대한 언사를 사건의 순서에 관한 정확한 서술로 오해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래야만 표상의 언어가 투명성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구체적인 표상들이 때에 따라서 다른 표상들을 통해서 보충되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점은 정화하는 불의 표상과 같은 개별적 표상이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간에 대한 표상과 같은 상상의 모델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4.2. 죽음
신스콜라 신학은 죽음에 관해서 보통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얘기한다. (1) 모든 인간은 죽어야만 한다. (2)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을 의미한다. (3) 죽음의 죄에 따르는 벌이다. 근래의 신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칼 라너를 통해서 다른 진술이 추가되었다: 죽음은 단순히 인간에게 닥쳐오는 사건으로서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바로 이렇게 수용하고 감수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행위이기도 하다.
4.2.1. 죽음의 일반성
모든 인간은 죽어야만 한다. 이 문장이 과연 신학적 진술인가 하고 물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첫째, 이 문장은 모두가 신앙이나 신학의 도움 없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넘어서지 않고, 둘째, 죽음의 불가피성은 성서에서 본래적 주제가 아니라 단지 전제, 즉 구원의 소식이 선포되는 데에 어두운 체험적 배경을 이루는 것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술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이 진술은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데에 처음부터 죽음을 포함시킨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부정적 측면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 부여를 생각할 수 있다: 삶이란 계속해서 “소모되는 것”이라면, 이런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소모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삶이 움직이는 방향에 부합하는 실천일 것이다(4.2.4. 참조).
4.2.2. “나그네살이의 종결”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삶을 “나그네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삶이 ‘도중에 있음’이며 결단의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대한 반대는 도착했음, 결정됨이다. 신학의 전통에서 흔히 사용되는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것을 말하고자 한다: 죽음과 함께 결단의 시간은 중단된다. 죽는 순간에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결단이 내려진다. 죽음은 단지 지금의 삶을 끝맺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을 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인간의 실존의 무게가 온전히 드러난다: 나의 삶은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다. 기회는 임의대로 자주 반복되지 않는다. 내 결정은 잠정적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진술의 성서적 근거로서 신약성서에 나타난 깨어있으라는 촉구와 시간을 잘 사용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라는 경고를 제시한다(마태 13,33-37; 마태 25,13; 요한 9,4; 에페 5,16; 골로 4,5). 물론 이 말씀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서 한계 지워진 일반적 상황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 특별한 구원의 상황을 대상으로 발설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이 이 세상 삶의 유일회성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결단이 지니는 영원한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런 표현은 내용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성서적 진술과 다소간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4.2.3. 부설: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죽음에서 삶에로의 귀환은 있을 수가 업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의학적으로 죽음이 확인된 사람이 다시 소생한 것에 대한 보고서가 널리 전파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의학으로부터 예상하지 않았던 지원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살아있다는 표지(맥박, 심전도)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가 의학적 소생 조처를 통해서 “다시 살아난” 환자들과 그들이 “죽음”과 “다시 얻는 삶” 사이의 시간에 겪었던 체험에 관한 몇몇 의사들의 기록은 많은 관심을 이끌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환자들은 의사가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그들의 몸밖에 나와 있는 것을 체험하고, 이와 동시에 수술대 위에 남겨진 자신의 육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친척, 친구들이 자신에게 다가 와서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다. 그들에게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빛나는 존재”, “사랑과 온기를 발산하는 존재”가 나타난다. R.A.Moody, Leben nach dem Tod, Reinbek, 1977, 28.
그들은 이 존재로부터 말이 필요 없는 어떤 질문이 나오는 것을 느끼는데, 이 질문은 그들 삶의 전체를 개관(槪觀)하고 평가하도록 한다. 그들은 섬광과 같는 짧은 순간에 그들 삶의 중요한 단계들을 다시 한 번 되돌이켜 본다. 그런 과정에서 “기쁨, 사랑, 평화의 감정이 압도적으로” Ibid.,
채워지고, 그래서 그들중 대부분은 내적인 저항이나 슬픔과 실망 속에서 삶에로 귀환하여 그들의 원래 육신과의 재결합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모두가 이런 체험들을 다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부 사항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보도를 종합하면,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본적 틀을 알아낼 수 있다.
신학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보고서에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죽음, 육신과 영혼의 분리, 변용(變容)된 육신, 죽은 이들과의 재회, 심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새로운 삶 안에서 누리는 행복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내세에 대한 목격 증인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하느님, 초월, 죽음 이후의 삶이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인가?
결정적인 질문은 무엇을 “죽음”이라고 보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 내용상 아주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학의 발전이 스스로 죽음에 대해서 구분을 하기 때문이다. 즉 심장의 정지에 의한 죽음, 뇌사, 세포사 등이다. 신학이 “죽음”(그리고 “죽음 다음의 삶”)을 말할 때 그것은 삶의 결정적인 종점, 이승의 삶으로의 회귀가 더 이상 불가능한 “지점(地點)”을 의미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면 소위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보고서는 근본적으로 “죽은 후의 삶”의 체험이 아니라, 죽음에 근접한 체험, 삶의 가장 끝자리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저승에서의 귀환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 상황에서의 귀환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관심을 갖고 이런 보고서를 대한다. 인간이 극단의 상황에서 체험한 것, 아마도 모든 의지적-이성적 조정이 멈춘 상태에서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른 것, 그것은 아마도 인간 안에 초월에로 향하는 “안테나”가 있다는 간접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여기서 초월이란 인간 안에 깊숙히 자리한 희망,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전하는 희망의 내용에 상응하는 그런 희망에로 향하는 “안테나”를 뜻한다. 이런 한에서 소생에 대한 보고서(그것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간주되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린 시절에 종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환자들까지 포함하는 경우라면)는 초월에 대한 증명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인간의 초월에로의 경향성에 대한 참조가 될 수 있겠다.
개신교 신학자 요한 크리스토프 함페(Johann Christoph Hampe) 참조: J.Ch.Hampe, Sterben ist doch ganz anders, Stuttgart, 1975.
는 이 보고서가 실천 신학적 측면에서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고서는 대체적으로 죽는 것(여기서는 죽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다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이 어둠, 비좁음, 차거움, 외로운, 두려움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따뜻함, 빛, 사랑, 기쁨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도록 한다.
4.2.4.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로 파악한다.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서 때때로 인용되는 창세 2,16-17과 3,19는 사실상 명확한 성서적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창세 2,17에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창세 3장에서 아담의 범죄 이후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에게서는 죄와 죽음의 관련이 명백해진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뚫고 들어왔습니다”(로마 5,12). 그래서 교회 전통은 죄와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통상적으로 로마서를 인용한다(DS 372; 1512 참조).
그러나 죄와 죽음과의 관련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다. 이렇게 해석이 다양한 데에는 “죄에 대한 벌”이란 개념 이해의 차이가 한 몫을 한다(4.5.1. 참조).
전통적인 해석은 낙원에서의 인간은 범죄 이전에는 죽지 않는 “과성(過性) 은혜”를 간직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비로소 죄를 지음으로써 이 은혜를 상실하고 죽게 되었고, 낙원의 원조와 함께 전 인류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해석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 외의 자연 사이의 생물학적, 발생적 관련을 인식하고서도 원래는 인간이 모든 생물에게 해당하는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환경학적, 사회학적으로 볼 때 첫 인간과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았다면 늦게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갈 기회는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심리학적으로 끝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과연 바랄만한 것일까? 바로 인생의 유한성 때문에 삶의 매 순간이 가치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말로 한다면,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닐까,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특별히 성서에 근거를 두고 물어야 할 것이다: 믿는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데도 어떻게 바오로는 죽음이 힘을 잃었다고 찬양할 수 있었을까?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는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는냐?”(1고린 15,55).
여기서 죽음에 대한 승리는 죽음의 제거가 아닌 그 변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죄로 인해서 죽음 그 자체가 왔다고 하기 보다는 죽음을 달리 체험하게 되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근래의 신학은 바로 이런 해석의 방향으로 나간다: 현세의 삶이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가 어느날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죽음을 적대적으로 체험하는 것, 즉 삶의 단절, 삶의 역동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래서 삶 전체의 의미를 의문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체험하는 사실이 죄의 결과이다. “낙원”의 인간은 죽음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사랑의 헌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행복한 탄생으로서 평화롭게 맞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죄는 신뢰와 사랑의 부족이다. 죄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가 와서 내면으로부터 오염시켰다는 것(로마 5,12 참조)이 옳다면, 죄와 죽음의 체험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완성으로 맞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죽음,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 죽음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죄의 결과다. 죽음에 대한 이런 체험은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벌하신 때문이라기 보다는 상황 자체에서 기인한다. 이 “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죄에서 흘러나오는 이기주의적인 자기폐쇄라고 하겠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죄는 “죽음의 독침”(1고린 15,56)인 것이다.
4.2.5. 헌신으로서의 죽음
신학적 전통은 대부분 죽음의 한 면만을 얘기한다. 즉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운명적 불행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이런 부정적 특성은 종말론에서 죄의 극복을 통한 죽음의 무력화보다는 죽음과 죄의 관계를 더 분명한 주제로 삼음로써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신학적 전통은 성서적 진술을 온전히 반영하기 못한채 머무른다고 하겠다.
성서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죽음에 대한 승리(2.8. 참조)와 이미 세상에서 가능하게 된 “죽음에서 삶에로의 전이(轉移)”(요한 5,24; 1요한 3,14)만을 언급하지 않고, 믿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죽음은 적극적 행동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수난”으로, 예수가 찾거나 원하지 않고 참아 받은 것으로서 표현되는데, 예수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지녔고(마태 14,32-41) 이 죽음은 예수를 극도로 버림받은 상태로 내몰았다(마르 15,34). 그러나 다른 한편 특별히 루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이 죽음을 그의 적극적 행동으로서, 아버지의 손에 내맡기는 것(루가 23,46), “아버지께로 가는 것”(요한 14,2.12.28;16,7), “헌신”과 마지막 “실현”(요한 19,30)로 해석한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를 추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로마 6,1-11)으로, 생명을 바치는 것(요한 15,13), 자신을 버리는 것(마르 8,35; 마태 10,39; 16,25; 루가 9,24; 17,33; 요한 12,25),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단순히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늘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2고린 4,10-11)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인생의 종점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상대화시키는데, 그래서 바오로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삶의 능동적 실현이고 “마지막” 죽음, 즉 생을 종결하는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닥쳐와서 인간이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죽음은 능동적 행동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 실존의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특별히 칼 라너에 의해 근래의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는 죽음의 “실제-존재론적 변증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죽음은 “외부의 개입에 의한 단절, 파멸,… 갑작스런 사건,…인간을 극도로 무력화시키는 사건”으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활동적인 완성, 능동적으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 삶의 성과의 참됨을 끝까지 증거하는 것, 자신을 전적으로 소유하는 행동” K.Rahner, Theologie des Todes, Freiburg, 1957, 30.
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라너의 추상적인듯한 명제는 그의 제자 라디슬라우스 보로슈(Ladislaus Boros, +1981)가 “최후결단(Endentscheidung)”이라는 이론을 내세움으로써 구체화된다. 보로슈에 의하면 마지막에,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최초로 모든 것을 결단하는 온전한 인격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안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 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인 행동을 방해하는 육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므로 바로 이 순간에, 아니 비로소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결단과 무조건적인 신앙적 결단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신학에서는 최후결단의 이론에 점점 더 많은 비판이 가해 진다: 죽음 안에서 특별한 결단의 상황을 맞게 된다는 가정은 성서에서는 물론 체험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이론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에 신학에서 의문에 처하게 된 인간학적 모델(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은 실존적-윤리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죽음 이전의 모든 결단은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최후의 결단”을 위해 평가 절하되고 이와 함께 현재 삶에서 진지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죽음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죽는 순간에 아마도 아주 특별한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 보다는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강도(强度)있는 삶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을 선사하며, 신뢰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전체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실존, 이와 함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용상으로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헌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맞는 죽음은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살면서 실현한 사랑의 마지막 완성의 가능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아오는 중에 이미 자신을 하나 하나 하느님께 넘겨 드렸는데, 죽음 안에서 하느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넘겨 드린다.
그러나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무조건 다 실제로 상대방을 위하는 죽음은 아니다. 또한 모든 죽음이 헌신의 죽음은 아니다: 죽음이 단지 패배, 의미없는 단절, 손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생명을 그냥 던져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대로― 투신의 결과, 아끼는 사람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것, 그가 실천해온 헌신적인 삶의 최종적 단계가 될 수 있다. 헌신으로서의 죽음, 이것이야말로 의미 가득하고, 원래 목표로 하는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굶주림, 전쟁, 부주의로 인한 교통 사고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데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주 폭력이나 때 이른 죽음은 자신의 인간에게 사랑의 투신과 자유로운 헌신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명을 보호하고 족진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게 된다.
헌신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에 대한 논리적 전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신앙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항상 부활 사상에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주제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