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열-분열의 결정적 원인인 수위권(성화상 논쟁)

 

1.1.1. 성화상 논쟁


동방 교회의 성화상 문제와 이에 대한 서방교회와의 논쟁이 동서방 교회 갈등의 골을 깊게 하는데 주도했다. 구약 때는 어떠한 모상이나 신상도 금지되었다(출애 20,4; 레위26,1; 신명4,16-19).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강생한 이후로 구약 성서적인 모상 금지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 5C 성화상은 신심의 대상이 되었고 6-7C에 성화상 숭경은 신심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다. 성화상 숭경은 신자들과 성인들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 통공 교리에 근거.


성화상 배척 견해 : 많은 주교들과 지식층들은 세 가지 이유로 성화상 숭경 경계.


① 모상과 공경 대상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오는 우상숭배의 위험.


② 예수의 신성을 부정할 위험


③ 성화상을 싫어하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의 개종에 어려움을 준다.


성화상 지지 견해 : 특히 Chalcedon공의회(451)에서 확정한 그리스도교의, 말씀이 육신을 받아들였다는 교의를 근거로 성화상 인정. 즉 성화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신학적 해석과 함께 하느님께 향한 숭배는 ‘예배’ 또는 ‘흠숭’, 성인들에 대한 숭배는 ‘공경’이라고 해왔다. 특히 Damaskus의 Johannes(675-749?)는 성화상을 ‘침묵의 설교’, ‘문맹자를 위한 교리서’라고 설명.


동로마 제국 황제 Leo Ⅲ(717-741)는 성화상 공경을 일체 금지. 모든 성당 성화상 철거 및 파괴를 명령. 다음 황제 Konstantinus Ⅴ(741-775)는 주교들을 소집,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754)에서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 이에 대해 교황 Gregorius Ⅱ(715-731)는 성화상 파괴를 이단으로 배척. 동서방이 갈등.


786년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성화상 공경 신심을 회복하였고 마침내 제2차 Nicaea공의회(787)에서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하였던 Konstantinopel 교회회의 결정을 무효로 선언. 843년 Konstantinopel 교회회의는 성화상 공경 회복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성화상 부흥은 동방교회에서 꽃을 피워 비잔틴 종교 예술이 크게 발전 예술, 문학, 성가, 전례 등에서 중요한 역할. (Ikon)


그러나 이로 인한 동서방 교회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있게 되었고 동방교회는 황제의 통제로부터 점차 자율권을 갖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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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열-분열의 결정적 원인인 수위권(성화상 논쟁)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1.1. 성화상 논쟁

    동방 교회의 성화상 문제와 이에 대한 서방교회와의 논쟁이 동서방 교회 갈등의 골을 깊게 하는데 주도했다. 구약 때는 어떠한 모상이나 신상도 금지되었다(출애 20,4; 레위26,1; 신명4,16-19).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강생한 이후로 구약 성서적인 모상 금지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 5C 성화상은 신심의 대상이 되었고 6-7C에 성화상 숭경은 신심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다. 성화상 숭경은 신자들과 성인들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 통공 교리에 근거.

    성화상 배척 견해 : 많은 주교들과 지식층들은 세 가지 이유로 성화상 숭경 경계.

    ① 모상과 공경 대상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오는 우상숭배의 위험.

    ② 예수의 신성을 부정할 위험

    ③ 성화상을 싫어하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의 개종에 어려움을 준다.

    성화상 지지 견해 : 특히 Chalcedon공의회(451)에서 확정한 그리스도교의, 말씀이 육신을 받아들였다는 교의를 근거로 성화상 인정. 즉 성화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신학적 해석과 함께 하느님께 향한 숭배는 ‘예배’ 또는 ‘흠숭’, 성인들에 대한 숭배는 ‘공경’이라고 해왔다. 특히 Damaskus의 Johannes(675-749?)는 성화상을 ‘침묵의 설교’, ‘문맹자를 위한 교리서’라고 설명.

    동로마 제국 황제 Leo Ⅲ(717-741)는 성화상 공경을 일체 금지. 모든 성당 성화상 철거 및 파괴를 명령. 다음 황제 Konstantinus Ⅴ(741-775)는 주교들을 소집,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754)에서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 이에 대해 교황 Gregorius Ⅱ(715-731)는 성화상 파괴를 이단으로 배척. 동서방이 갈등.

    786년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성화상 공경 신심을 회복하였고 마침내 제2차 Nicaea공의회(787)에서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하였던 Konstantinopel 교회회의 결정을 무효로 선언. 843년 Konstantinopel 교회회의는 성화상 공경 회복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성화상 부흥은 동방교회에서 꽃을 피워 비잔틴 종교 예술이 크게 발전 예술, 문학, 성가, 전례 등에서 중요한 역할. (Ikon)

    그러나 이로 인한 동서방 교회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있게 되었고 동방교회는 황제의 통제로부터 점차 자율권을 갖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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