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신비로서의 교회에 대한 재발견-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2.2.1.1. 교회론의 쇄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교회와 신앙 전반에 걸쳐 강력한 각성이 일어나게 되는데 1921년 R. Guardini가 신학잡지 ‘Hochland’에 발표했던 선언적인 말이 이 각성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 “극히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가 영혼들 사이에서 깨어나고 있다.” 도대체 당시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단 말인가?
1) 교회의 측면에서 19c 는 한마디로 ‘부흥’ 과 ‘방어’의 시기였다. 계몽주의 사조는 합리주의를 퇴조시키는 한편 가톨릭 교회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러한 전체적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교회 제도의 방어와 보존의 강화로 나타났다. 즉 신적 질서의 봉사를 위한 힘, 교황권의 강화가 그것이었다. 19c에는 교회 내에 전반적으로 로마 교황의 중앙집권화가 두드러진 시기였고 이것은 사회, 정치 사상 전반의 변화에 대한 교회의 처방이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 부터 제1차 Vatican 공의회(1869-1870) 까지의 상황을 Yves Congar(1904-1995)는 ‘권위의 강화’라는 말로 묘사, 마침내 1870년 제1차 Vatican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을 선언한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교회론은 대체로 교황론, 교계제도론 등의 교회 외적인 테두리로 제한 되게 되어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 와중에 독일 낭만주의 사조와 역사에 대한 인식의 재각성은 교회 내적인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부흥을 주창하였다.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는 세상 안에 교회는 생명력 즉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고 종교적인 진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각성이 대두되었다. 독일에서는 Tubingen 학파를 중심으로 이러한 노력이 개진되었는데 J.A.Möhler (1796-1838) 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로마에서는 Tubingen 학파의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주로 그레고리안 대학을 중심으로한 예수회 학자들,Perrone(1794-1876), Passaglia(1812-1887), Schrader(1820-1875), Franzelin(1816-1876), Schesben(1835-1888)등이 대표적 학자들이다.
프랑스에서는 베네딕도회 솔렘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러한 각성이 대두. D.Gueranger가 대표적. 이러한 재각성 운동은 한편으로 신학사상의 초점, 또 한편으로는 전례생활의 중심으로 부각되었지만 교회 전체의 각성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중단되게 된다. 제1차 Vatican공의회의 교황권강화라는 주안점이 각성 운동을 잠재운 것이다.
2) 제1차세계대전(1914-1918)이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인류의 파멸이라는 고통의 극치를 체험한 사람들은 다시 종교적인 내면과 진실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도라는 틀로 제한되었던 교회라는 실체가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본질에 대한 추구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무엇보다 교회를 신비 안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제도 안으로 한정되었던 교회에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가 부각되게 되었다. J.A.Mӧhler의 사상이 주목받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교회에 대한 재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27 창설된 프랑스 가톨릭 노동 청년운동 (JOC)의 활약이다. 젊은이들 나아가 성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르심에 대한 교회적인 책임감을 강하게 고취하였는데 무엇보다 삶에서의 사도직을 부각시켰다. 나아가 전례의 쇄신과 교회 일치에 대한 모색 등을 추구하게 되었다.
※가톨릭 개혁운동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일어난 신학과 교회 생활 전반의 쇄신 운동은 수많은 가톨릭 개혁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대체로 다음의 4가지로 정리.
1. 성서 운동
성서를 신학과 신앙의 원천으로 재정립하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매일의 성서 읽기를 유도하고 성서로부터 신앙을 회복하고 강화시키게 했다. 그리하여 영적인 교육과 사목적 직무에서 성서의 의미가 회복되고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 운동은 통일적인 주도세력없이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띠면서 부흥되었는데 특히 전례 운동과 깊이 결합되었고 수많은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단체가 생겨나게 되었다.
2. 전례 및 교부 운동
무엇보다 그리스 교부들의 저작들이 주목받게 되었다. Origenes의 성서 주석서들이 재번역되고 영적 진보를 위해 활용. 이러한 교부들에 대한 주목은 동방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전례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이 대두된다. 특히 독일의 청년 운동과 함께 전례 운동이 발전되었는데 평신도들의 전례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참여, 동방 전례에 대한 연구 (특히 성주간 전례), 전례의 모국어 사용 등등 많은 연구가 계속되었다. 인스부룩 대학의 J.A.Jungmann은 현대 전례 신학의 아버지였다.
3. 현대 세계에 대한 개방
지금까지의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인식은 악이 들끓는 세속이었다. 거룩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분되고 세상을 가르치고 악을 물리쳐 거룩한 교회로 인도해야 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세상을 더이상 타파해야 할 적으로 보지 않고 동반자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게 했다.
4. 종교 일치 운동.
동방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 교부들에 대한 재접근은 그리스도 인의 일치를 지향하게 했다. 상호 단죄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감정적인 대립에서 벗어나 진정한 공동 고백에 더 주목하게 하고 서로 다른 입장과 시각을 냉정히 고찰하게 하였다. 불신과 반목, 상호 파문과 저주로부터 이제 상호간의 이해 노력, 공동 고백에 대한 동일한 시각이 처음으로 시도되고 종교 일치라는 커다란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했다.

2.2.1 신비로서의 교회에 대한 재발견-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2.2.1.1. 교회론의 쇄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교회와 신앙 전반에 걸쳐 강력한 각성이 일어나게 되는데 1921년 R. Guardini가 신학잡지 ‘Hochland’에 발표했던 선언적인 말이 이 각성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 “극히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가 영혼들 사이에서 깨어나고 있다.” 도대체 당시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단 말인가?
1) 교회의 측면에서 19c 는 한마디로 ‘부흥’ 과 ‘방어’의 시기였다. 계몽주의 사조는 합리주의를 퇴조시키는 한편 가톨릭 교회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러한 전체적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교회 제도의 방어와 보존의 강화로 나타났다. 즉 신적 질서의 봉사를 위한 힘, 교황권의 강화가 그것이었다. 19c에는 교회 내에 전반적으로 로마 교황의 중앙집권화가 두드러진 시기였고 이것은 사회, 정치 사상 전반의 변화에 대한 교회의 처방이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 부터 제1차 Vatican 공의회(1869-1870) 까지의 상황을 Yves Congar(1904-1995)는 ‘권위의 강화’라는 말로 묘사, 마침내 1870년 제1차 Vatican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을 선언한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교회론은 대체로 교황론, 교계제도론 등의 교회 외적인 테두리로 제한 되게 되어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 와중에 독일 낭만주의 사조와 역사에 대한 인식의 재각성은 교회 내적인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부흥을 주창하였다.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는 세상 안에 교회는 생명력 즉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고 종교적인 진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각성이 대두되었다. 독일에서는 Tubingen 학파를 중심으로 이러한 노력이 개진되었는데 J.A.Möhler (1796-1838) 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로마에서는 Tubingen 학파의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주로 그레고리안 대학을 중심으로한 예수회 학자들,Perrone(1794-1876), Passaglia(1812-1887), Schrader(1820-1875), Franzelin(1816-1876), Schesben(1835-1888)등이 대표적 학자들이다.
프랑스에서는 베네딕도회 솔렘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러한 각성이 대두. D.Gueranger가 대표적. 이러한 재각성 운동은 한편으로 신학사상의 초점, 또 한편으로는 전례생활의 중심으로 부각되었지만 교회 전체의 각성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중단되게 된다. 제1차 Vatican공의회의 교황권강화라는 주안점이 각성 운동을 잠재운 것이다.
2) 제1차세계대전(1914-1918)이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인류의 파멸이라는 고통의 극치를 체험한 사람들은 다시 종교적인 내면과 진실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도라는 틀로 제한되었던 교회라는 실체가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본질에 대한 추구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무엇보다 교회를 신비 안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제도 안으로 한정되었던 교회에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가 부각되게 되었다. J.A.Mӧhler의 사상이 주목받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교회에 대한 재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27 창설된 프랑스 가톨릭 노동 청년운동 (JOC)의 활약이다. 젊은이들 나아가 성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르심에 대한 교회적인 책임감을 강하게 고취하였는데 무엇보다 삶에서의 사도직을 부각시켰다. 나아가 전례의 쇄신과 교회 일치에 대한 모색 등을 추구하게 되었다.
※가톨릭 개혁운동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일어난 신학과 교회 생활 전반의 쇄신 운동은 수많은 가톨릭 개혁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대체로 다음의 4가지로 정리.
1. 성서 운동
성서를 신학과 신앙의 원천으로 재정립하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매일의 성서 읽기를 유도하고 성서로부터 신앙을 회복하고 강화시키게 했다. 그리하여 영적인 교육과 사목적 직무에서 성서의 의미가 회복되고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 운동은 통일적인 주도세력없이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띠면서 부흥되었는데 특히 전례 운동과 깊이 결합되었고 수많은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단체가 생겨나게 되었다.
2. 전례 및 교부 운동
무엇보다 그리스 교부들의 저작들이 주목받게 되었다. Origenes의 성서 주석서들이 재번역되고 영적 진보를 위해 활용. 이러한 교부들에 대한 주목은 동방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전례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이 대두된다. 특히 독일의 청년 운동과 함께 전례 운동이 발전되었는데 평신도들의 전례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참여, 동방 전례에 대한 연구 (특히 성주간 전례), 전례의 모국어 사용 등등 많은 연구가 계속되었다. 인스부룩 대학의 J.A.Jungmann은 현대 전례 신학의 아버지였다.
3. 현대 세계에 대한 개방
지금까지의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인식은 악이 들끓는 세속이었다. 거룩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분되고 세상을 가르치고 악을 물리쳐 거룩한 교회로 인도해야 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세상을 더이상 타파해야 할 적으로 보지 않고 동반자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게 했다.
4. 종교 일치 운동.
동방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 교부들에 대한 재접근은 그리스도 인의 일치를 지향하게 했다. 상호 단죄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감정적인 대립에서 벗어나 진정한 공동 고백에 더 주목하게 하고 서로 다른 입장과 시각을 냉정히 고찰하게 하였다. 불신과 반목, 상호 파문과 저주로부터 이제 상호간의 이해 노력, 공동 고백에 대한 동일한 시각이 처음으로 시도되고 종교 일치라는 커다란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