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공생활의 시작

예수의 모습을 특징지우는 묘사는 삶, 죽음, 부활이다. 이런 증거는 공생활 처음부터 생활한 이들의 증언이다. 부활 이전 스승과의 일치된 삶은 복음 전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구성한다.
사도 10,37-42 “요한이 선포한 세례뒤에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일어났던 일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나자렛 출신 예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셨으니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모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분과 함게 계셨기 때문입니다….이분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미리 선정된 증인들에게, 곧 우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그분을 믿는 사람은 모두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1)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참회적 운동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한다. 이때는 요한의 그늘 안에서 예수가 수행하신 일을 나타낸다. 당시의 요한의 참회운동은 유명하였다. 이 시기는 예수가 첫 빠스카를 거행하기 위해 올라가던 때였다. 어떻든 예수의 공생활의 서언으로 제시된다.

(1) 메시아니즘의 비교
요한에 의해 선포된 세례와 예수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요한은 2열 1,8의 엘리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의 강조점은 엣세네파의 흐름속에 들어가 있다. 마태오는 세례자요한의 메시지와 예수와의 유사성으로 ‘회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말한다 (의도적으로).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를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의 운동은 당시의 종교운동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태어났다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으로 구원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3,9). 혹은 자만에서 나오는 합리적 신심주의를 고발하는 예언자의 노선에서 요한은 움직이고 있다. 하느님의 절박한 심판은 눈앞에 온것 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은 본연의 의미에서의 복음이라 이르기에는 부족하다. 하느님의 종말적 긴급함은 가장 강한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 분의 도래를 선포한다. 마르 1,7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나보다 더 굳건한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허리를) 꾸부려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분노의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의 도래이다. 이 메시아의 사명은 타작마당의 농부(호세 9장, 예레 4장)와도 같고, 악의 가면을 벗길 자(아모 1장,이사 66장), 하느님의 종말적 긴급함은 가장 강한 자로서 묘사되고 가장 강한 분으로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 1, 7에서 요한의 선포,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분노의 하느님, 선의를 가리시고 악을 단죄하실 분으로 정의를 실천하실 분으로 규정시킨다. 종말론적인 심판자로서의 미래의 사명을 분명히 지적한다.
요한은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하느님의 분노가 더이상 어떻게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표현되는 긴급한 인간의 상황앞에서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유일한 방법으로 회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회개에 합당한 결실을 맺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요한은 회개의 세례, 물의 세례, 즉 불의 멸망을 피할 수 있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의 종말적 사건에 대한 준비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 안에 하느님의 업적으로서 이해되고 히느님의 자유로운 선물로서 이해되는 메타노이야를 바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 있었던 참회예절, 정화 등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인간이 홀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애로운 선물인 메타노이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여러 세례의 실천-물에 홀로 들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 즉 나 자신을 하느님께 변화되도록 내어 맡기는 세례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요한의 세례는 마태 21,25의 “하늘로부터 오는 세례”로 규정되고 있다.

(2) 예수의 세례
복음에서는 특히 루가 1-2장은 세자 요한과 예수의 두가지 선포․탄생을 연결시킨다. 그런 복음적 증거는 세자 요한의 참회적 운동과 예수의 공적사명을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받을 것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은 역사적 충실성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예수가 받은 세례는 크리스챤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이 세례는 요한에게 예수가 종속되었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마지막의 종말적 예언자라고 주장한다. 복음적 전승은 예수의 기원에 있어서나 공생활 시작에 있어서나 항상 요한과의 기묘한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염려를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역사적 충실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마태오는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르단을 향해서 갈릴래아로부터 왔음을 주시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부터 예수가 죄인들,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요한에게 참회의 세례를 요구한 것처럼 어찌 보면 메시아의 행위를 이미 앞당겨서 제시하면서 유다이즘 사상과 반대되는 죄인들과의 결속을 드러낸다. 구약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자신, 모든 비천함을 취한 야훼의 종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이미 수난을 예시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의 첫걸음이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러 가는 것이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기다리는 것, 하느님의 성령을 기다리는 것,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곳 바로 그곳으로 예수도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죄인들이 회개하는 곳에서 그들과 일치하기를 원하셨다. 바로 이런 메시아의 모습이 요한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확신했지만 그것을 다른 공동체-꿈란, 엣세네파-에 더 근접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했다. 즉 정의롭고, 엄하고 죄인들과 격리된 종말적 심판을 행사하는 메시아였다. 이렇게 죄인들과 결속되지 않는 메시아는 실제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았다.
세례를 요청하는 메시아 자신이 요한에게도 하나의 사건(스캔들)이었다. 예수는 마태 3,15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이렇게 해야 하느님이 말씀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신다. 성서, 율법,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취는 성서에 표현된 하느님의 원의에 인간의 행위가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원의에 자기 생각을 일치하도록 요한을 초대한다. 도래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일치하는 행위안에서 올바른 세상이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세례안에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선포와 함께 구원의 시기가 시작된다.
복음적 전승은 예수가 나자렛에서 왔음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신학적인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과 예수는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다. 복음에서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의 전기보다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세례의 의미는 루가의 편집안에서 볼때 예수의 기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사건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신적 현시를 통해서 강조되고 있다. 하늘이 열려짐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령의 현시를 나타내고 있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현시는 메시아에 관계되는 두가지 성서 즉 시편 2,7; 이사 42,1을 동반하고 있다. 이런 예언적 언급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는 예수의 메시아성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하늘로부터 확인하고 있다. 왕직에 관계되는 메시아 사상(시편 2,7), 예언직에 관계된 메시아 사상(이사 42,1;61,1)이 요한을 초월하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예수의 위격적 정체성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예수위에 임하시고 예수안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성령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 성령은 종말적 시기에 메시아의 성취를 강조하는 충만한 성령의 현존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마지막에 이스라엘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내릴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주님의 그리스도, 축성받은자의 도래로서 시작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옛 왕과 예언자들은 이런 충만한, 지속적인 성령을 지니지 못했지만 예수는 성령을 충만히 소유하고 계신분, 성령을 세상에 가져오신 분으로 나타난다. 성령을 받았던 예언자나 왕들의 과제는 하느님 백성의 건설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성령이 충만함이 드러나는 것은 그분의 과제가 새 이스라엘의 종말적 완성, 하느님 백성의 건설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약성서에서 이런 재건은 정의의 왕으로서 자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해서 또는 평화와 선을 가져오는 분으로서 우리의 고통과 죄를 짊어지는 속죄의 업적으로써 미래에 장차 오실 메시아로부터 실현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이런 왕직, 예언직, 사제직의 업적을 통해 그리스도가 이룰 사명은 성령과 연결되어 있고 이 성령은 비둘기의 형상으로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의 세례에 있어서 성령의 소리와 표징은 예수의 공적 사명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의미와 성령론적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의 세례 이야기는 새로운 이스라엘, 전체 인류의 역사를 위해서 결정적인 사명을 시작하는 분을 제시한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의 세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가 누구인지 그분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과 현시를 받는 것은 세례자 요한으로 나타난다. 요한 1,32 “이어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영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영이 어떤 분 위로 내려와 그위에 머무는 것을 내가 볼 터인데 그분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후시는 분이시다」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고 그래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증거가 신적 영감을 통해 요한에게 주어졌다. 요한은 이것을 증거하러 온 사람이다. 예수가 종말적 이스라엘에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도래했다. 따라서 예수에 있었던 세례 장면의 모든 것은 예수의 위격적 정체성과 사명을 예수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자 요한에서 처럼 바로 우리들에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지 예수의 지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세례의 의미에 대한 숙고를 하고 있다. 성세성사의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증거자로서 요한을 강조하고 있다. 세자 요한의 가르침과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성취되는 구원사건 안에 관계되어 있고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한은 요한 1,29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1,36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여기에서 요한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동하여 불가능할 것 같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고 따른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만일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약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모순되는 것을 하느님은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른다. 이때 이사악이 질문한다. “제물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대답하기를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복음 사가는 세자 요한의 입을 통해서 말하게 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여기 있다.” 하느님이 희생제물로 바칠 어린양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이다. 세례 장면에서 이미 요한 복음사가는 세자 요한을 예수 수난의 증거자로 제시한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구원의 사건, 죽음, 부활이 이미 세례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3) 종합 ; 예수의 여정에 대한 고찰
① 예수의 독창성
예수의 기원에 대해서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예수 삶의 역사적 연대기에서 역사적 원천들이 거의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예수가 기원전 2-3년 쯤에 생활하셨던 분이란 것, 세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 갈릴리에서 활동했다는 것,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는 것, 때문에 2-3년간의 짧은 공적 생활이 있었다는 것, 인간적을 볼 때 처음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 문화와 충돌하게 되고 결국은 처형당하게 된다.
이렇게 전체적인 줄거리를 통할 때 분명히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세부사항들은 토론이 되고 있고 역사적 방법론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유아시절도 마찬가지다. 이 자료들이 역사적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도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불충분한 불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자료들이 예수의 기본적 행위와 가르침에 대한 많은 인식과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실제로 성서에서 ipsissima verba Jesu(예수의 말씀)에 얼마나 도달 가능성이 있는가는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많는 말씀들이 공동체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예수에서 기원한다. 여기서 복음과 그리스도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너무 회의적으로 빠질 필요는 없다. 빠스카 이전과 이후의 예수의 전체 삶을 볼 때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역사적 신빙성보다 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자료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독특하다는 것은 그분이 역사의 인간적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속해 있고 독창적인 새로움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속에 함께 융화될 수 있는 면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즉 순수한 인간적인 면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Schillebeeckx는 예수와 요한의 차이를 강조한다. 요한은 회개를 요구하는 미래를 향하고 있는 엄격한 금욕주의자로 표현한다. 그래서 요한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교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을 위해서도 이런 엄격한 심판을 선포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은 회개 안에 있고 이는 실천을 동반한 회개라고 선포한다. 따라서 요한은 복음의 선포자가 아니라 다가오는 심판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아모스나 예레미아처럼 공포의 예언자였다. 이는 Schillebeeckx에 의하면 양자택일을 의미한다. 회개의 물의 세례를 받든지 아니면 불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요한은 미래의 기다림을 지금 윤리적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전망 안에서가 아니라 심판의 전망 안에서 이야기한다. 이렇게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차이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설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음이었다. 아무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다. 요한이 주는 인상과 예수의 인상을 분명히 구별하여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구별되는 이런 행위는 죄인들과의 접촉, 모든 행위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그분의 자유 안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에서는 예수를 가장 인간적이고 평범한 그러나 건전한 삶을 갖고 있던 사람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면 예수는 어떤 특이한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올바른 것을 이야기하였고, 현세계에 대해서도 더 나쁘거나 더 좋게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권위있고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예수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분노․슬픔․유혹․우정 등 모든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분은 특이한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 나에 대해서 감히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분이었다. 미리 주어진 스케마에 구애받지 않고 있다. 미리 예정된, 만들어 놓은 스케마 안에 예수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의 독창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창적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다는 말의 동의어도 아니다. 독창성(Originality)은 기원(Origine)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기원에 가까이 있는 사람, 기원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업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기원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사람들을 그 기원에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독창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독창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만 밝힌 것이 아니라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독특한 권능을 가지고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말하고 행한 것은 투명하고 명백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를 즉시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른 인간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는 독창성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과 충돌의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한편으로 당신의 위격, 정체성에 연결된 사람들을 매혹하는 면이 나타나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스켄들을 자극한다. 이런 스켄들은 독창적인 예수의 행위와 말씀안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원의에 가장 많은 것을 집중시킨다. 하느님의 원의에 있기 때문에 예수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원의에 관계된 메시지는 특히 죄인들을 위한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었다. 이외에 어떤 자료에도 얽매이지 않은 분이다. 이런 것이 당시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유대방식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가 당신의 메시지와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구약성서의 메시지를 성취한다고 했을 때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극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환경과 충돌되었고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고발되었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독창성은 요한과의 비교안에서 나타나는 것 뿐 아니라 당시 유대 환경 안에 존재했던 여러가지 사고방식과 비교할 때도 독창성이 드러난다.
카스퍼(W. Kasper) 역시 이런 맥락안에서 제시한다. 예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지만 아버지의 원의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그분은 아버지의 원의에 의해서 전파하는 것 외에는 엄격하지도 않았다. 창조물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부자들․가난한 이들과 자유롭게 식사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그마한 것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여인들과도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두가이들처럼, 율법학자들처럼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는 아니었고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올바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분도 아니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도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삶이었다. 그렇다고 열광적인 방법으로 따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종교상의 기술이나 윤리적 체계를 세운 것도 아니었고, 제대를 세운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계급적 투쟁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게릴라전을 벌인 것도 아니었고 농업의 개혁을 주창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공적인 죄인들과 함께 있었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규정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보프의 이야기처럼 예정된 스케마 안에 당신 자신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음을 강조한다. 오직 중요한 것은 지금 이시간에 실현되어야 할 아버지의 원의였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예수는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겼다. 요한과 예수의 비교에서 알아야 할 것은 공생활 시작에서 예수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는가하는 방향 안에서 앞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스 큉(H. Kꋿng) 역시 마찬가지이다. Christ sein(‘왜 그리스도인인가?’; 분도). 여기에서 큉은 현세상황과 비교해서 비판적 입장에서 묘사한다. 예수가 행한 모든 것이 자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는 모든 삶의 비판기준이 된다. 예수를 특정한 집단 곁에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예수의 행위와 말씀을 기준으로해서 모든 크리스챤들이 자신의 삶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자신(김광식 신부님)의 생각에는 당시의 상황과 현대의 복잡한 상황안에서 모든 것을 예수시대의 상황과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본질에 있어서 어떻게 수용하는가는 우리의 본분이지만 모든 것을 똑같은 상관하에서 적용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여기에는 더 깊은 숙고와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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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공생활의 시작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예수의 모습을 특징지우는 묘사는 삶, 죽음, 부활이다. 이런 증거는 공생활 처음부터 생활한 이들의 증언이다. 부활 이전 스승과의 일치된 삶은 복음 전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구성한다.
    사도 10,37-42 “요한이 선포한 세례뒤에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일어났던 일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나자렛 출신 예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셨으니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모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분과 함게 계셨기 때문입니다….이분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미리 선정된 증인들에게, 곧 우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그분을 믿는 사람은 모두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1)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참회적 운동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한다. 이때는 요한의 그늘 안에서 예수가 수행하신 일을 나타낸다. 당시의 요한의 참회운동은 유명하였다. 이 시기는 예수가 첫 빠스카를 거행하기 위해 올라가던 때였다. 어떻든 예수의 공생활의 서언으로 제시된다.

    (1) 메시아니즘의 비교
    요한에 의해 선포된 세례와 예수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요한은 2열 1,8의 엘리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의 강조점은 엣세네파의 흐름속에 들어가 있다. 마태오는 세례자요한의 메시지와 예수와의 유사성으로 ‘회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말한다 (의도적으로).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를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의 운동은 당시의 종교운동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태어났다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으로 구원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3,9). 혹은 자만에서 나오는 합리적 신심주의를 고발하는 예언자의 노선에서 요한은 움직이고 있다. 하느님의 절박한 심판은 눈앞에 온것 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은 본연의 의미에서의 복음이라 이르기에는 부족하다. 하느님의 종말적 긴급함은 가장 강한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 분의 도래를 선포한다. 마르 1,7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나보다 더 굳건한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허리를) 꾸부려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분노의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의 도래이다. 이 메시아의 사명은 타작마당의 농부(호세 9장, 예레 4장)와도 같고, 악의 가면을 벗길 자(아모 1장,이사 66장), 하느님의 종말적 긴급함은 가장 강한 자로서 묘사되고 가장 강한 분으로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 1, 7에서 요한의 선포,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분노의 하느님, 선의를 가리시고 악을 단죄하실 분으로 정의를 실천하실 분으로 규정시킨다. 종말론적인 심판자로서의 미래의 사명을 분명히 지적한다.
    요한은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하느님의 분노가 더이상 어떻게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표현되는 긴급한 인간의 상황앞에서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유일한 방법으로 회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회개에 합당한 결실을 맺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요한은 회개의 세례, 물의 세례, 즉 불의 멸망을 피할 수 있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의 종말적 사건에 대한 준비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 안에 하느님의 업적으로서 이해되고 히느님의 자유로운 선물로서 이해되는 메타노이야를 바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 있었던 참회예절, 정화 등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인간이 홀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애로운 선물인 메타노이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여러 세례의 실천-물에 홀로 들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 즉 나 자신을 하느님께 변화되도록 내어 맡기는 세례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요한의 세례는 마태 21,25의 “하늘로부터 오는 세례”로 규정되고 있다.

    (2) 예수의 세례
    복음에서는 특히 루가 1-2장은 세자 요한과 예수의 두가지 선포․탄생을 연결시킨다. 그런 복음적 증거는 세자 요한의 참회적 운동과 예수의 공적사명을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받을 것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은 역사적 충실성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예수가 받은 세례는 크리스챤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이 세례는 요한에게 예수가 종속되었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마지막의 종말적 예언자라고 주장한다. 복음적 전승은 예수의 기원에 있어서나 공생활 시작에 있어서나 항상 요한과의 기묘한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염려를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역사적 충실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마태오는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르단을 향해서 갈릴래아로부터 왔음을 주시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부터 예수가 죄인들,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요한에게 참회의 세례를 요구한 것처럼 어찌 보면 메시아의 행위를 이미 앞당겨서 제시하면서 유다이즘 사상과 반대되는 죄인들과의 결속을 드러낸다. 구약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자신, 모든 비천함을 취한 야훼의 종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이미 수난을 예시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의 첫걸음이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러 가는 것이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기다리는 것, 하느님의 성령을 기다리는 것,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곳 바로 그곳으로 예수도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죄인들이 회개하는 곳에서 그들과 일치하기를 원하셨다. 바로 이런 메시아의 모습이 요한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확신했지만 그것을 다른 공동체-꿈란, 엣세네파-에 더 근접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했다. 즉 정의롭고, 엄하고 죄인들과 격리된 종말적 심판을 행사하는 메시아였다. 이렇게 죄인들과 결속되지 않는 메시아는 실제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았다.
    세례를 요청하는 메시아 자신이 요한에게도 하나의 사건(스캔들)이었다. 예수는 마태 3,15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이렇게 해야 하느님이 말씀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신다. 성서, 율법,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취는 성서에 표현된 하느님의 원의에 인간의 행위가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원의에 자기 생각을 일치하도록 요한을 초대한다. 도래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일치하는 행위안에서 올바른 세상이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세례안에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선포와 함께 구원의 시기가 시작된다.
    복음적 전승은 예수가 나자렛에서 왔음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신학적인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과 예수는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다. 복음에서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의 전기보다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세례의 의미는 루가의 편집안에서 볼때 예수의 기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사건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신적 현시를 통해서 강조되고 있다. 하늘이 열려짐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령의 현시를 나타내고 있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현시는 메시아에 관계되는 두가지 성서 즉 시편 2,7; 이사 42,1을 동반하고 있다. 이런 예언적 언급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는 예수의 메시아성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하늘로부터 확인하고 있다. 왕직에 관계되는 메시아 사상(시편 2,7), 예언직에 관계된 메시아 사상(이사 42,1;61,1)이 요한을 초월하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예수의 위격적 정체성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예수위에 임하시고 예수안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성령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 성령은 종말적 시기에 메시아의 성취를 강조하는 충만한 성령의 현존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마지막에 이스라엘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내릴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주님의 그리스도, 축성받은자의 도래로서 시작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옛 왕과 예언자들은 이런 충만한, 지속적인 성령을 지니지 못했지만 예수는 성령을 충만히 소유하고 계신분, 성령을 세상에 가져오신 분으로 나타난다. 성령을 받았던 예언자나 왕들의 과제는 하느님 백성의 건설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성령이 충만함이 드러나는 것은 그분의 과제가 새 이스라엘의 종말적 완성, 하느님 백성의 건설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약성서에서 이런 재건은 정의의 왕으로서 자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해서 또는 평화와 선을 가져오는 분으로서 우리의 고통과 죄를 짊어지는 속죄의 업적으로써 미래에 장차 오실 메시아로부터 실현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이런 왕직, 예언직, 사제직의 업적을 통해 그리스도가 이룰 사명은 성령과 연결되어 있고 이 성령은 비둘기의 형상으로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의 세례에 있어서 성령의 소리와 표징은 예수의 공적 사명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의미와 성령론적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의 세례 이야기는 새로운 이스라엘, 전체 인류의 역사를 위해서 결정적인 사명을 시작하는 분을 제시한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의 세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가 누구인지 그분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과 현시를 받는 것은 세례자 요한으로 나타난다. 요한 1,32 “이어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영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영이 어떤 분 위로 내려와 그위에 머무는 것을 내가 볼 터인데 그분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후시는 분이시다」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고 그래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증거가 신적 영감을 통해 요한에게 주어졌다. 요한은 이것을 증거하러 온 사람이다. 예수가 종말적 이스라엘에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도래했다. 따라서 예수에 있었던 세례 장면의 모든 것은 예수의 위격적 정체성과 사명을 예수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자 요한에서 처럼 바로 우리들에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지 예수의 지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세례의 의미에 대한 숙고를 하고 있다. 성세성사의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증거자로서 요한을 강조하고 있다. 세자 요한의 가르침과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성취되는 구원사건 안에 관계되어 있고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한은 요한 1,29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1,36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여기에서 요한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동하여 불가능할 것 같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고 따른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만일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약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모순되는 것을 하느님은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른다. 이때 이사악이 질문한다. “제물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대답하기를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복음 사가는 세자 요한의 입을 통해서 말하게 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여기 있다.” 하느님이 희생제물로 바칠 어린양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이다. 세례 장면에서 이미 요한 복음사가는 세자 요한을 예수 수난의 증거자로 제시한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구원의 사건, 죽음, 부활이 이미 세례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3) 종합 ; 예수의 여정에 대한 고찰
    ① 예수의 독창성
    예수의 기원에 대해서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예수 삶의 역사적 연대기에서 역사적 원천들이 거의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예수가 기원전 2-3년 쯤에 생활하셨던 분이란 것, 세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 갈릴리에서 활동했다는 것,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는 것, 때문에 2-3년간의 짧은 공적 생활이 있었다는 것, 인간적을 볼 때 처음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 문화와 충돌하게 되고 결국은 처형당하게 된다.
    이렇게 전체적인 줄거리를 통할 때 분명히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세부사항들은 토론이 되고 있고 역사적 방법론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유아시절도 마찬가지다. 이 자료들이 역사적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도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불충분한 불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자료들이 예수의 기본적 행위와 가르침에 대한 많은 인식과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실제로 성서에서 ipsissima verba Jesu(예수의 말씀)에 얼마나 도달 가능성이 있는가는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많는 말씀들이 공동체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예수에서 기원한다. 여기서 복음과 그리스도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너무 회의적으로 빠질 필요는 없다. 빠스카 이전과 이후의 예수의 전체 삶을 볼 때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역사적 신빙성보다 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자료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독특하다는 것은 그분이 역사의 인간적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속해 있고 독창적인 새로움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속에 함께 융화될 수 있는 면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즉 순수한 인간적인 면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Schillebeeckx는 예수와 요한의 차이를 강조한다. 요한은 회개를 요구하는 미래를 향하고 있는 엄격한 금욕주의자로 표현한다. 그래서 요한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교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을 위해서도 이런 엄격한 심판을 선포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은 회개 안에 있고 이는 실천을 동반한 회개라고 선포한다. 따라서 요한은 복음의 선포자가 아니라 다가오는 심판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아모스나 예레미아처럼 공포의 예언자였다. 이는 Schillebeeckx에 의하면 양자택일을 의미한다. 회개의 물의 세례를 받든지 아니면 불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요한은 미래의 기다림을 지금 윤리적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전망 안에서가 아니라 심판의 전망 안에서 이야기한다. 이렇게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차이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설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음이었다. 아무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다. 요한이 주는 인상과 예수의 인상을 분명히 구별하여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구별되는 이런 행위는 죄인들과의 접촉, 모든 행위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그분의 자유 안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에서는 예수를 가장 인간적이고 평범한 그러나 건전한 삶을 갖고 있던 사람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면 예수는 어떤 특이한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올바른 것을 이야기하였고, 현세계에 대해서도 더 나쁘거나 더 좋게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권위있고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예수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분노․슬픔․유혹․우정 등 모든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분은 특이한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 나에 대해서 감히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분이었다. 미리 주어진 스케마에 구애받지 않고 있다. 미리 예정된, 만들어 놓은 스케마 안에 예수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의 독창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창적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다는 말의 동의어도 아니다. 독창성(Originality)은 기원(Origine)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기원에 가까이 있는 사람, 기원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업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기원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사람들을 그 기원에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독창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독창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만 밝힌 것이 아니라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독특한 권능을 가지고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말하고 행한 것은 투명하고 명백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를 즉시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른 인간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는 독창성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과 충돌의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한편으로 당신의 위격, 정체성에 연결된 사람들을 매혹하는 면이 나타나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스켄들을 자극한다. 이런 스켄들은 독창적인 예수의 행위와 말씀안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원의에 가장 많은 것을 집중시킨다. 하느님의 원의에 있기 때문에 예수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원의에 관계된 메시지는 특히 죄인들을 위한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었다. 이외에 어떤 자료에도 얽매이지 않은 분이다. 이런 것이 당시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유대방식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가 당신의 메시지와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구약성서의 메시지를 성취한다고 했을 때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극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환경과 충돌되었고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고발되었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독창성은 요한과의 비교안에서 나타나는 것 뿐 아니라 당시 유대 환경 안에 존재했던 여러가지 사고방식과 비교할 때도 독창성이 드러난다.
    카스퍼(W. Kasper) 역시 이런 맥락안에서 제시한다. 예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지만 아버지의 원의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그분은 아버지의 원의에 의해서 전파하는 것 외에는 엄격하지도 않았다. 창조물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부자들․가난한 이들과 자유롭게 식사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그마한 것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여인들과도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두가이들처럼, 율법학자들처럼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는 아니었고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올바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분도 아니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도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삶이었다. 그렇다고 열광적인 방법으로 따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종교상의 기술이나 윤리적 체계를 세운 것도 아니었고, 제대를 세운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계급적 투쟁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게릴라전을 벌인 것도 아니었고 농업의 개혁을 주창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공적인 죄인들과 함께 있었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규정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보프의 이야기처럼 예정된 스케마 안에 당신 자신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음을 강조한다. 오직 중요한 것은 지금 이시간에 실현되어야 할 아버지의 원의였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예수는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겼다. 요한과 예수의 비교에서 알아야 할 것은 공생활 시작에서 예수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는가하는 방향 안에서 앞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스 큉(H. Kꋿng) 역시 마찬가지이다. Christ sein(‘왜 그리스도인인가?’; 분도). 여기에서 큉은 현세상황과 비교해서 비판적 입장에서 묘사한다. 예수가 행한 모든 것이 자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는 모든 삶의 비판기준이 된다. 예수를 특정한 집단 곁에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예수의 행위와 말씀을 기준으로해서 모든 크리스챤들이 자신의 삶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자신(김광식 신부님)의 생각에는 당시의 상황과 현대의 복잡한 상황안에서 모든 것을 예수시대의 상황과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본질에 있어서 어떻게 수용하는가는 우리의 본분이지만 모든 것을 똑같은 상관하에서 적용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여기에는 더 깊은 숙고와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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