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티아서의 수신인 및 집필년대
사도 바오로는 1장 1-2절에서 “나 바오로가,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가 갈라티아의 여러 교회에 인사합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편지를 갈라티아의 여러 교회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티아는 본래 갈리아의 두 지방 곧 Gallia cisalpina와 Gallia transalpina 지방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던 지명입니다. 옛 갈리아 지방은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합니다. 거기서 살던 부족을 갈리 또는 갈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갈라티아족 또는 갈라티아인들은 원래 아시아의 인도-아리안 계통의 한 부족이라고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 켈트족이라 했고, 로마인들은 갈리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qui ipsorum lingua Keltae, nostra Galli appellantur” [J. Caesar, Bell. gall. 1.1]).
이들은 차츰 동방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279년에는 다뉴브 강 하류와 마케도니아로 침입하여 그리스 반도까지 여세를 몰아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인들이 그 이듬해 이들의 침입을 저지하자 남은 자들은 헬레스폰트를 건너 소아시아로 쳐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여기저기서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베르가모의 아탈로스 1세 왕이 이들을 격퇴하는데 성공합니다. 239년경이었습니다. 왕은 이들의 거주지를 산가리우스 강과 할리스강 사이에 있던 일대로 제한하고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중심지는 안키라(Ancyra), 펫시누스(Pessinus), 타비움(Tavium) 세 곳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웃 원주민들에게는 귀찮고도 괴로운 존재였습니다. 마침내 189년에 로마인 만리우스 울소(Manlius Vulso)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합니다. 로마인들이 본도의 미트리다티스 왕들과 동방의 패권을 겨루며 전쟁을 하는 동안 갈라디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 대가로 그들의 거주 지역은 차츰 넓어져 갔습니다. 40년경 비시디아, 프리기아 외에도, 리카오니아, 팜필리아, 파플라고니아, 이사우리아 그리고 험준한 길리기아가 갈라티아에 속하게 됩니다. 이 일대는 나중에 바오로 사도가 선교사로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게 될 갈라티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방이기도 합니다.
바오로가 편지를 써 보낸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로 이 지방 사람들이었다는 근거를 일부 여기에 두고 있습니다. 이 곳까지도 갈라디아 지방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5년에 갈라티아인들의 마지막 왕 아민타스(Amyntas)가 그의 왕국을 로마인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편입된 다음 갈라티아라는 이름의 속주가 됩니다.
바오로가 이 편지의 수신인들을 “갈라티아의 교회들”이라고 했을 때 그는 과연 어느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요?
옛날부터 주석가들은 여기의 갈라티아를 북부 갈라티아를 가리킨다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1784년 J.J. Schmidt가 후에 남부 ‘갈라티아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이론을 처음으로 내세우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이론은 E. Renan과 그리고 유명한 아나톨리아 지방 탐험가인 W.M. Ramsay와 같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남방 설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그리고 데르베와 같은 갈라티아 남부 지방의 교회들에 이 편지를 썼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바오로는 루카와는 달리 지명을 사용할 때 로마 속주의 공식적 명칭을 주로 사용합니다. 예)아카이아(로마 15, 26), 마케도니아(1데살 1, 7-8), 아시아(로마 15, 26). 따라서 갈라티아라는 지명도 로마의 속주 갈라티아를 가리키는데 로마의 속주 갈라티아에는 남부 지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② 사도행전 16, 6과 18, 23에 따르면 바오로 일행이 갈라티아 지방을 지나간 것은 틀림없는데 그가 그 지방에 교회들을 세웠다는 말은 이 두 구절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일행이 선교를 하지 않고 거저 지나친 곳은 북부 갈라디아이지 남부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갈라티아 남부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③ 예로니모에 의하면 갈라티아 방언은 그때까지도 사어가 아닌 활어로서 그 지방에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말로 이 편지를 쓴 것을 보면 이 갈라티아 사투리 또는 방언을 몰랐었던 것 같습니다. 알았다면 그리스말로는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말 편지를 받아 읽을 수 있는 교우들은 남부 갈라디아의 헬라식 도시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④ 갈라 3, 2-3. 13-14. 23-24; 4, 2.5; 5, 1을 읽어보면 독자들은 유다 계 그리스도인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 유다인은 주로 남부 갈라티아에 살고 있었지 북부에는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① 바오로가 지방 명칭을 사용할 때 공식 명칭만 사용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1, 21만 보아도 시리아와 길리기아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두 지방의 이름은 속주의 공식 명칭이 아니고 재래식 명칭입니다. 1, 17에서는 아라비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 지방이 로마의 속주가 된 것은 서기 106년이었습니다. 바오로가 순교한지 40년이 지난 다음의 일입니다. 그리고 3, 1에서 바오로는 “갈라티아 인들이여!”하면서 독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서구라파에서 건너온 야만족의 이름이지 비시디아와 리카오니아와 같은 헬라 식 도시에 사는 문화인들을 이런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② 사도행전 16, 6과 18, 23으로 말하면, 교회 창설 언급이 없다고 해서 교회 설립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티아 지방을 언급하면서도 교회 창설에 관해서 언급이 없는 이유는 달리 해명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필자의 관심은 유럽 교회 창설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의 선교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비디니아, 에게 해변의 여러 도시에 대해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갈라티아 교회 창설은 계획된 것이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는 갈라 4, 15등의 바오로의 진술이 사도 16, 6과 일치하면 했지 어긋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사실 사도행전 18, 23은 그곳에 이미 교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16, 6의 가장 자연스런 설명으로서는 바오로 일행이 리스트라와 이고니온에서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거쳐 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는 갈라티아 “속주”라는 말도 없지만 갈라티아를 “거쳐 가지” 않고 즉 들르지 않고 그저 “지나쳤다”는 식으로 알아들어서는 곤란합니다. “갈라티아 지방”이라는 표현이 18, 23에도 다시 한번 나온다는 사실에 유의한다면 ‘지방’을 ‘속주’로 알아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16, 6이 제2 차 전도여행 때 바오로의 우연한 제1 차 갈라티아 방문을 전한다면 18, 23은 제3 차 전도여행 때 그 제2 차 방문을 전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한 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이 제3 차 전도여행의 종착지인 에페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 사이에 갈라티아 지방에서 매우 우려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불길한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쓴 편지가 바로 이 갈라티아서입니다.
③ 바오로가 갈라티아 방언을 몰라서 교회를 세우기가 어려웠다던가, 편지를 쓸 때도 그리스말로 쓴 것으로 보아 갈라티아 남부의 헬라 식 도시의 교우 주민들에게 써 보낸 것이 틀림없다고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바오로는 통역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말 편지를 갈라티아 방언으로 통역해줄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4, 11은 이 점에서 다소의 흥밋거리를 제공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의 기적을 본 그곳 사람들이 리가오니아 말로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 바오로는 과연 그 말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복음도 그곳 말로 선포했을까? 혹은 통역을 썼을까? 그도 아니라면 그곳 주민들은 자기네 고유의 리가오니아 방언과 그리스어 두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주민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쪽도 단언하기 어렵다면 이런 논거로는 남부 갈라티아 설을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④ 갈라티아에서 암약하던 바오로의 반대자들이 유다 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주장과 함께 도대체 유대인들은 북부 아닌 남부 갈라디아에서만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갈라티아서의 독자들 역시 남부 갈라디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었다는 주장은 그 전제가 입증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바오로의 수신인들이 유다인이었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의 독자들은 이방계 출신임이 거의 확실시됩니다(참조: 갈라 4, 8; 5, 2-3; 6, 12-13). 침묵을 논거로 기용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추리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와 리스트라에는 예로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그곳에서 율법으로 자유로운 복음을 선포했다면 갈라티아에서와 비슷한 논란이 제기되었을 법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이나 바오로의 친서에서는 이 두 곳에서 그런 논란이 일었었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왜일까요? 오히려 갈라티아의 교우들이 유다교 의식에 홀딱 반한 것은 그들이 교우가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갈라 1, 6)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방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문제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안티오키아와 리스트라에서 율법 문제로 이렇다할 논란이 일었다는 말이 없는 것은 사실상 그런 논란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 두 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유다인들이라면 이런 논란은 유다인 사이에서는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더라도 유다교 습속을 존중하던 유다인들은 얼마든지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바오로라고 해서 여기에 시비를 걸었을 리 만무하고 또 이런 유다인들에게 율법을 폐기하고 할례를 지워 버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종합하면서
1. 바오로 사도와 갈라티아 교우들과의 관계
먼저 바오로와 갈라티아 교우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이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 창설자는 바오로입니다(1, 8: 바오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1, 9: 갈라티아인들은 그가 전한 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4, 19: 바오로는 갈라티아 교우들을 영적으로 낳아준 아버지다). ②그는 이 지방 인근 일대에 여러 교회를 세웠다(갈라 1, 2 참조).
2. 갈라티아 선교
바오로는 위에서 말한 대로 갈라티아에서 선교할 계획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병이 나서 그곳에 지체하는 바람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4, 15등). 바오로는 그때 그들의 정성어린 환대를 받았다고(4, 14) 회고합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갈라티아 방문이었습니다(4, 13: 이 대목은 그 후 두 번째 방문이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에는’이라는 말은 ‘전에, 왕년에, 지난번에, 옛날에’라는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또한 1코린 16, 1에 따르면 갈라티아 지방 교회에서 모금을 했습니다. 이 모금은 아마 그의 두 번째 방문 때 있었을 것입니다. 초면부터 돈을 희사하라고 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3. 갈라티아서의 수신자 및 집필 년대
지금까지를 정리해 본다면, ① 19세기에는 남부 갈라티아 지방의 여러 교회가 수신인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이 가설이 맞을 경우, 갈라티아서는 제1차 선교 여행조금 뒤 곧 49년쯤에 안티오키아에서 발송한 것으로,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서간이 됩니다. 이 서신을 쓴 시기도 사도행전 16,6에서 언급되는 여행 이후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②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받아들이는 것은 사도행전 18,23에 나오듯이, 바오로사도는 북부 갈라티아 지방을 두 번째로 가로지른 다음에(갈라4,13) “갈라티아 사람”이라고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그 곳 신자들에게 이 서간을 써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쓴 시기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서 비교적 길게 체류하던 때(아마도 56-57년의 겨울)의 끝 무렵, 그러니까 로마서를 집필하기 여섯 달 전이 됩니다. 이로써 이 두 서간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