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박해 [한] 己亥迫害

1839년 헌종(憲宗) 5년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대박해로서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 뒤에 일어났다. 박해는 3월 5일(음)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원인은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서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安東)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한 벽파(僻派) 풍양(豊壤) 조씨가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벽파와는 달리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어서 헌종치세(憲宗治世) 초기에도 천주교에 대하여 개의치 않으려 하였고, 나이 어린 임금이 성년이 될 때까지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다.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 대왕대비의 아버지 김조순이 1832년 4월(음)에 죽고, 세도권은 그 아들 김유근(金逌根, 1785~1840)에게 돌아갔다. 1834년 11월(음)에 순조임금이 돌아가고 순조의 손자인 헌종이 8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오라버니 황산(黃山) 김유근이 대비의 정사를 보필하였다. 김유근은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다가 당상(堂上)[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 역관(譯官)이며 교우인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로 1836년 5월(음) 세례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천주교에 대한 관대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조선 교회는 18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황산이 중병에 몸이 쇠약하여 마침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자 정권은 우의정(右議政)인 이지연(李止淵)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지연은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적대시할 뿐만 아니라 풍양 조씨의 세도를 등에 없고, 대왕대비가 천주교도를 처형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천주교도의 체포는 이미 박해 전년 말부터 시작되어 감옥은 이미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의 형조판서(刑曺判書) 조병현(趙秉鉉)은 가능한 한 교도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배교(背敎)를 권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따라서 이제는 석방이든 처형이든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병현은 사정을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고하였고, 이지연은 1839년 3월 5일(음)에 천주교회 박멸책을 김 대왕대비에게 올렸다. 그 내용은, 천주교인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이니 ‘역적’(逆賊)이니 하는 중상과 비방을 되풀이하고, 나아가서 좌우포장(左右捕長)에게 조사와 시찰을 강화토록 하며, 형조판서는 매일 재판을 하여 뉘우치지 못하는 자를 처형할 것이고, 지방에도 공문(公文)을 보내며,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청(奏請)에 어린 헌종은 그대로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에도 대왕대비는 단독으로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왕대비도 천주교도는 나라를 망하게 할뿐만 아니라 신유년의 박해도 도리어 만족치 못한 것 같다는 등의 말로 오히려 대신보다도 천주교를 한층 가혹히 비방하였다. 그리고 대신이 언급치도 않은 궁녀에 대해서도 증거가 확실하면 체포해도 좋다 하고, 교인이 아니더라도 성물(聖物)을 가진 자도 중형(重刑)에 처할 것을 지시하였다. 대왕대비는 선교사들의 체험에 의하면, 천주교에 가끔 호의적이었다고 하는데, 풍양 조씨라는 당신의 강력한 세력의 압력에 의해 이런 무서운 박해령에 수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비의 하교(下敎)가 있은 지 보름이 지나도 요인은 한 명도 잡히지 않았다. 이 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정기화(鄭琦和)는 만약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의 근절을 기할 수 없다는 요지의 상소를 3월 20일에 올렸다. 요인(要人) 체포가 더딘 주요 원인은, 포졸들에게 가택의 수색과 가산의 약탈을 금지시킨 데 있었던 것이었다. 형조판서의 3월 20일(음)자 보고에 의하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도가 도합 43명인데 그 중 15명이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동월 28일자 보고에 의하면, 나머지 28명 중 11명이 배교하여 곧 석방될 예정이라 하였다. 이어 5명이 배교하였으나 남명혁(南明赫), 궁녀 박희순(朴喜順) 등은 끝내 신앙을 지켜 참수(斬首) 순교(殉敎)하였던 것이다.

박해는 4월 말부터 기세가 누그러져 약 1개월 동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 때 박해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형판(刑判) 조병현이 참판과 더불어 사임하고, 홍명주(洪命周)와 임성고(任聖皐)가 각각 판서와 참판에 임명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이 뜸해지자, 박해에 대비하여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전하러 급히 서울로 돌아왔었던 앵베르(Imbert, 世世亨) 주교도 4월 22일(음) 수원(水原)으로 피신하였다. 주교가 피신한지 한 달이 지나서 조정의 세도는 조병구(趙秉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헌종의 외삼촌으로 금위대장(禁衛大將)의 지위에 앉아 국사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그는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인물이라서 등장과 함께 교우들을 색출하기 위해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5월 25일(음)에는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새로운 칙령(勅令)이 반포되었는데, 내용은 교우색출에 더욱 착념(着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색은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황산 김유근의 사망과 천주교인 김순성(金淳性)의 배신행위로 정찰(偵察)은 뜻밖의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김순성은, 김여상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교우의 가면을 쓰고 들어와서 교회의 사정을 상세하게 관(官)에 제공했던 것이다. 그의 제보로 6월 7일에는 유진길이 잡혔고, 전후하여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조선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달아 잡히게 되었다. 수원의 양감(陽甘)이란 동리에 숨어 있던 앵베르 주교는 김순성과 포졸들이 행방을 알고 추적하는 중에 7월 3일(음) 포졸 앞에 자현(自現)하였다. 앵베르 주교의 체포는 조정을 매우 놀라게 하였는데, 조정은 체포되지 않은 나(羅)와 정(鄭) 두 신부를 잡도록 지시하고 7월 13일(음)에는 이들을 잡기 위해 충청도에 오가작통법을 엄격히 적용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현을 권고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두 신부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모방(Mau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포청은 8월 5일(음)과 7일(음)에 3명의 선교사를 신문하였다. 이들은 천주교를 전하러 이 땅에 자원하여 왔으며, 교우들은 고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들은 곧 의금부로 이송되어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과 같이 추국(推鞫)을 받게 되었다.

첫 번째 신문에서, 신부들은 국적과 입국 목적을 명백히 한 다음, 입국시 의주(義州)로부터 조신철과 정하상의 인도를 받았고, 서울에서는 정하상의 집에 거처했다는 사실만을 자백하고, 그 밖의 물음에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판관은 바른 대로 말하면 본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고발을 유도했지만, 이들은 계명대로 남을 해하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더욱 형신(刑訊)이 가해졌으나, 대왕대비는 이들이 주뢰(周牢)와 주장(周杖)으로 죽을 염려가 있고 진상을 밝힐 단서도 없으니 신유년의 주문모(周文謨)의 예에 의하여 효수경중(梟首警衆)[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뭇사람을 경계함]하라 하였다. 이에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는 중죄인처럼 극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도 국청신문을 받게 되었다. 유진길은, 선교사가 천주교에 불가결하여 조선에 데리고 왔으며 이는 교회에 관련되는 일이며 역절(逆節)이 아니라 하고, 부귀공명을 위해 천주교를 믿은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교법(敎法)을 행하려는 절차였다고 단정하였다. 정하상도, 사람은 만물의 조물주인 천주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면 천주는 모든 민족의 기원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라에 해가 될 때 임금과 재상들이 이 교(敎)를 금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백서가 주장한 소위 외구(外寇)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천주교 교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미 체포에 앞서 몇몇 교우와 함께 호교문(護敎文)을 만들어 당시의 재상인 이지연에게 제출한 바 있었는데, 이것이 신유년 박해 때 만들어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와 아울러 교회사상의 귀중한 자료이자 유일한 호교론(護敎論)인 <상재상서>(上宰相書)이다.

정부는, 정하상과 유진길을 역적으로 몰아 결국 참형(斬刑)을 선고하였다. 조신철도 신앙을 끝까지 지켜서 소위 사서(邪書)를 강습하여 인심을 미혹하였다는 죄목으로 참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앞서 6월 10일(음)에는 이광렬(李光烈)과 여교우 7인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7월 26일(음)에는 박후재(朴厚載)와 여교우 5인이 같은 장소에서 참형되었다. 또한 7월 25일(음)에는 연경(燕京)에서 잡서(雜書)까지도 구입을 금한다는 하교가 내렸는데, 이는 사학에 관련된 문물의 수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8월 14일(음) 새남터에서 선교사 3인의 효수형이 거행되고 이튿날 서소문 형장에서 유진길, 장하상이 참형을 받았으며, 4일 뒤에 같은 곳에서 조신철을 위시하여 9명이 처형되었다. 선교사의 처형으로도 박해는 끝나지 않았고, 배신자 김순성은 교우를 고발하는 데 더욱 열을 올리며 이지연 대신 우의정이 된 조인영(趙寅永)은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옥중 교우들을 교수형(絞首刑)에 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의 최초 희생자는 유진길의 아들 13세의 대철(大喆)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론은 이같이 많은 처형을 염려하고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잔인성을 불평하기 시작하여, 이에 정부는 10월 18일(음)에 박해의 종말을 알리는 한편 그간의 박해를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잔인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조인영이 제진(製進)하였던 ‘척사윤음’(斥邪綸音)을 김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서울과 지방에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전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남은 교우들의 형집행을 서둘러 11월 24일(음)에는 최창흡(崔昌洽) 외 6명의 여교우들을 참수하고, 조인영은 옥중의 교우들을 옥에서 비밀리에 처형케 하였다. 12월 27일(음)과 28일(음)에는 박해를 끝내려는 의도에서인지 박종원(朴宗源), 이문우(李文祐) 등 10명을 새남터 못미처 ‘당고개’의 사장(沙場)에서 사형을 공개적으로 집행하였다.

기해박해는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경기도와 수도(首都)에서 가장 큰 박해가 가해지고 순교자도 많이 배출했지만, 교우라면 전국적으로 박해를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당시의 기록인 ≪긔해일긔≫의 목격자담과 김대건(金大建) 등이 순교한 1846년의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뽑아 교황청에서는 1925년 7월 5일에 이들을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하였다. 기해박해는 천주교와 관련된 세력을 정치적으로 분쇄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5년 뒤인 1845년엔 조선교구의 제3대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을 동반하고 입국하였다. 박해가 심하고 규모도 전국적이었던 만큼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유식층(有識層)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적 신앙에서 복음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갔다. 박해 때마다 교우들이 산간벽지로 이주하여 점차 지방종교로 변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도 짙어졌다. 신앙의 견지에서 박해의 결과는 역시 교회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교회의 고유한 무기인 피와 눈물을 통한 승리인 것이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中 · 下, 분도出版社, 1979~1980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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