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1915~1965). 법조인. 세례명 바오로. 전북 김제군 금사면 원평리(院平里)의 한 농가에서 부(父) 김재운(金在雲)과 모(母) 강재순(姜在順)의 독자로 태어났다. 1926년 원평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全州)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중 링컨의 전기(傳記)를 읽고 감동하여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뒤 1939년 닛뽕(日本)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했고,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자 이듬해 귀국, 김병로(金炳魯)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법조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44년 김준연(金俊淵)의 3녀 김자선(金子善)과 결혼하고 이듬해 광복이 되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어 1946년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조지폐 사건을 담당하면서 명성을 떨쳤으나 이해 9월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사임한 후 뚝섬에서 농사를 지으며 전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의 간청으로 3개월만에 법조계에 복귀,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는 한편 1948년부터는 중앙(中央)대학에서 법리학(法理學)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50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53년 서울지방법원장을 역임하고 이때부터 최남선(崔南善)과 친교를 맺고 신앙문제를 토의한 끝에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어 1953년 9월 온 가족과 함께 영세 입교하였다. 그 뒤 1956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1959년 전주지방법원장. 1960년 대원판사, 대법관 직무대리, 1961년 광주지방법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4년부터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이듬해 3월 16일 간암으로 사망,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에 있는 전곡본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김홍섭은 평소 청렴강직한 구도자적 생활로 법조계와 종교계의 귀감으로 존경받았고, 많은 죄수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돌봐주며 신앙으로 인도하여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법의(法衣)속에 성의(聖衣)를 걸친 사람’, ‘사도법관’(使徒法官), ‘남을 위해 산 사람’ 등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또한 인간에 대한 형벌의 궁극적 근거에 대해 깊이 고민한 끝에 자신의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 중국의 오경웅(吳經熊), 일본의 다나까 고오따로(田中耕太郞)와 함께 동양의 3대 가톨릭 법사상가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이뿐 아니라 김홍섭은 시, 그림, 등산 등을 즐기는 한편 교회사적(敎會史蹟)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전주지방법원장 시절 전주 치명자 산에 이순이(李順伊)의 순교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972년 율곡법률 문화상이 추서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무명≫(無明, 1954), ≪창세기초≫(創世記抄, 1954), ≪무상≫(無常)을 넘어서≫(성바오로출판사, 1964)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법조인 11인, 新東亞, 1965. 1 / 崔鍾庫, 使徒法官 金洪燮, 育法社, 1975 / 韓龍煥 · 徐相堯, 福音의 證人,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 / 金政壎,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성바오로출판사, 19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