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일원을 관할하는 교구. 대전교구의 관할지역인 충청남도(忠淸南道)는 한국 초기 교회사에서 순교유적지(殉敎遺蹟地)로 가장 빛나는 고장이다. 이 고장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전교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인데, 그는 천안(天安)사람으로 일찍이 조선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에게서 세례를 받고, 고향에 내려와 전교에 힘써, ‘내포(內浦)의 사도(使徒)’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충청남도 지방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신자가 많았고, 연이은 박해 때마다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어 이 지방을 순교성적지로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지켜 내려온 신자의 대다수가, 그가 개종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가 천주교 전교에 남긴 공헌은 매우 크다. 더욱이 훗날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그의 조카딸의 손자이며, 최양업(崔良業)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임을 볼 때, 그의 감화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비롯한 여러 성직자들이, 한 때 박해를 피해 피신한 곳이 합덕 신리(合德 新里)였고, 이곳에서 병사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랑드르(Landre, 洪) 신부의 묘소도 합덕 황무실에 있다. 이에 앞서 제3대 교구장으로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공주군 신하면 봉신리(公州郡 新下面 鳳申里)에서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를 발족시켰다.
이렇듯 빛나는 역사를 지닌 충청도인 만큼 1882년 한국에 어느 정도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부터 그 교세는 급격히 늘어나, 1895년 합덕 양촌(楊村) 공세리(貢稅里)본당을 위시하여 도내 여러 곳에 본당이 속속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서울교구가 한국인 주교에게 위임됨에 따라 서울교구 당국은 서울과 대구의 파리 외방전교회원들에게 독립된 지역에서 전교를 전담케 할 필요를 느끼고 충청남도를 1948년 ‘독립된 포교지’로 분할 독립시켰다. 동시에 전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享根) 주교가 이 포교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아직 정식 교구체제는 아니었고 1958년 6월 23일 대목구(代牧區)가 됨으로써 비로소 교구가 되었다.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정식 교구로 승격되어 그 해 7월 24일 라리보 주교의 착좌식이 대전 대흥동 성당(1921년 창설)에서 거행되었고 이후 대흥동 성당은 대전교구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1965년 라리보 주교가 노쇠하여 교구장직은 사임함에 따라 1965년 3월 22일 황민성(黃旼性) 신부가 교구장에 임명되어, 그해 5월 31일 주교로 성성됨으로써 대전교구도 한국인 주교가 관리하는 교구가 되었다. 1984년 2월 13일 황민성 주교의 사망 이후 현재 교구장은 경갑룡(景甲龍) 주교이다.
1983년 말 현재 대전교구의 교세를 살펴보면 신자 수 8만 8,803명, 본당 53개소, 공소 264개소, 한국인 신부 94명, 외국인 신부 7명, 한국인 수사 11명, 한국인 수녀 207명, 대신학생 40명, 소신학생 7명, 인쇄소 1개소, 남자수도단체 3개, 여자수도단체 10개, 병원 3개소, 양로원 1개소, 나병수용소 1개소, 유치원 20개소,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 4개교, 주일학교 53개소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