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투스(Donatus, 313~347)에 의해 제창된 북아프리카 교회의 이단사상.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03~305년) 때 교회 안팎에는 많은 배교자가 생겼다. 박해가 멎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이 배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배교한 주교 펠릭스는 체칠리아노(Caecilianus)를 서품한 3인의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말썽이 되어 순교자에 대한 공경과 신앙에 투철한 엄격주의자들인 70명의 주교들은 도나투스의 영향을 받아 카르타고의 주교로서 체칠리아노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마요리노(Majorinus)를 새 주교로 뽑아 임명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체칠리아노에게 호의를 보여 후자의 결정을 몇 차례에 걸친 시노두스를 통해 일축해 버렸다. 이 분쟁은 마요리노 사후 도나투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도나투스는 일종의 엄격주의자, 완벽주의자로 신앙에 대한 열성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나 그의 지나친 완벽주의적 견해는 성사적 의미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즉 배교자나 열교(裂敎)인 이단자들에 의한 성사집행은 무효라는 것이다. 성사는 그 집행에 의해 은총이 주어지는 것[성사의 事效性, ex opere operato]이 아니고 집전자의 성성(聖性)과 정통성에 따라 성사의 유효 · 무효가 결정된다[성사의 人效性, ex opere operantis]는 그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후대 교부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따라서 이단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나[이단자 세례논쟁] 교회는 성인(聖人)들만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극히 제한적이고 엄격한 교리관은 모두 교회에 의해 반박 단죄되었다. 도나투스파는 5세기부터 영향력을 잃었으며 7세기경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