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라는 말은 기원전 5세기 로마공화국에 있어서 통령(統領)에 의해서 임명된 독재관(dictator)이 외국과의 전쟁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경우 6개월 동안 정권을 장악하게 된 제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독재란 한 사람 또는 소수의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여 국민 또는 공동체 구성원의 권리나 자유를 억압하는 현상 또는 체제를 말하고 있다. 독재의 대표적 예는 히틀러(A. Hitler)나 무솔리니(B. Mussolini)에 의한 파시스트독재, 레닌(V.I. Lenin), 스탈린(I. Stalin)에 의한 공산주의독재, 일부 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군사독재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자기들만이 국가와 민족의 안전을 지키고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킨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독재자는 기존사회나 체제의 혼란을 이용하는 게 특색이다. 그들은 전통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때 ‘질서의 보호자’ 또는 ‘구국’(救國)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등장한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가치나 이념을 전적으로 배격하고 새로운 신화(神話)를 창조하려고 한다. 이러한 새로운 신화에는 권위 · 민족 · 피 · 계급 등이 포함된다. 독재자에게는 설득 · 타협 · 대화 등의 용어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 그들은 토론이나 대화는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힘에 의한 획일적 일치만이 유일한 질서하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독재는 때때로 어떤 특정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기가 사라진 후에도 독재자는 그들의 권력을 양도하지 않고 그대로 권좌에 앉아서 독재자 자신이나 자기를 지지하는 집단만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이 상례다. 독재자는 자기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부터 독재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들은 합헌적(合憲的)인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무력 · 폭력 등의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독재자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수단의 신성성(神聖性)이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의 선(善)을 공동선(共同善)이라고 과정 한다. 독재자는 공동선을 말할 때 편협한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계급의식, 국민적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선의 보편적 의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목적과 수단의 전도다. 수단이라는 것은 목적에의 과정이며 실현과정에 있는 그 목적자체이기 때문에 수단은 목적에 알맞고 또 목적에 합당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나쁜 수단이 본질적으로 좋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정치에 있어서의 기술적 합리화와 윤리적 합리화의 문제는 인간 역사가 직면하고 있는 드라마다(J. 마리탱). 파시즘이나 나치즘은 민족, 국가를 지상목표로 내세웠으나 자기들만의 민족과 국가를 강조한 나머지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이나 인권의 침해를 합리화하였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공산당만을 위한 독재를 수립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독재자들은 처음부터 인민의 동의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하르가르텐(Hargarten)은 정치적 독재에는 고전적 독재, 초혁명독재, 반혁명독재, 유사혁명 독재의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전적 독재는 시민혁명과정에서 신흥계급이 전통적 지배층을 몰아내고 수립한 크롬웰(O. Cromwell)이나 나폴레옹 1세(Napoleon I)의 독재를 의미하고, 초혁명적 독재는 시민혁명과정에서 과격파가 온건파를 축출하여 대중의 기반 위에서 행하는 독재로서 로베스피에르(M. de Robespierre)나 레닌의 독재를 말하며, 반혁명독재는 시민혁명 후에 구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여 혁명세력을 분쇄하는 경우로서 스페인의 프랑코(F. Franco)를 예시했으며, 유사혁명 독재로는 나치즘이나 파시즘을 들었다.
그러나 독재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남용이나 악용에서 오는 현상이다. 본래의 권력은 하느님인 인간들에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가치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권력을 전체 공동체나 타인을 위해서 행사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행사는 데서 독재는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는 종교적인 악이라 할 수 있다. 독재에 의해서 희생이 가장 큰 것은 인간의 권리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자기의 의사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 자기의 생각을 아무 제한 없이 발표할 수 있는 권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권리들이 독재체제 하에서는 전혀 행사될 수 없다. 독재 치하에서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잔인한 것은 정신적 억압이다. 이러한 정신적 억압은 인간을 비인격화하며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해 버린다. 오늘날 독재국가에서 가장 슬픈 현상은 양심범에 대한 탄압이다. 양심은 하느님과 인간이 은밀히 만나는 곳이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지성소다. 그러나 독재는 이러한 양심의 소리를 못 듣게 하고 양심의 외침을 말살하고 만다. 그리하여 독재정치 하의 인민은 어린이같이 취급되어 국가의 보호 하에 둠으로써 인간적 성숙이 불가능하다. 독재정치 하에서는 인간이 선과 악을 식별하지 못하고 정의와 부정을 의식하지 못한다. 환언하면 독재정치는 인간을 로보트화하는 것이다. 독재정치는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것은 기계를 조작하는 기술뿐이다. 이러한 기술 중에는 조종, 기만, 매수, 간계(奸計)가 포함된다. 이러한 기술들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킨다. 독재는 그것이 정치적이건 아니건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다양하게 창조하였으며 다양한 인간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재자는 모든 인간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획일주의와 착각하고 있다. 인간사회는 성격, 능력 등에 있어서 여러 가지 상이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다. 따라서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은 이러한 다양성이 유기적으로 조화됨으로써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다. 다양성이 무시된다는 것은 바로 불안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는 다양성의 인정은 자기 권위에 대한 많은 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오직 침묵과 맹목적 복종만을 강요한다. 독재자는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지지보다도 입과 눈과 귀를 막아버림으로써 성립되는 무언(無言)의 상태를 일치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독재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게 된다. 독재자는 인간은 누구나 창조주에 의하여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싫어한다. 그와 반대로 자기만이 하느님의 사랑의 받고 있다는 선민(選民)사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독재자는 때때로 복음의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독재자는 권력은 오직 물리적 힘에 의해서만 뒷받침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힘이야말로 정치권력의 기초라고 생각되어 무력이 신성시된다. 따라서 권력의 윤리성, 도덕성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따라서 독재자에게는 정의나 진리는 하나의 잠꼬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정의의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기만하고 있다. 이들의 정의는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 의미를 주는 하느님의 정의가 아니라 자기와 특정집단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때때로 인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강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민에 대한 경멸이나 불신은 인민의 자유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독재자는 때때로 자기가 인민의 대표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혼자만의 말이다. 독재자는 자기가 전체의 이름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에 빠진다. 그리하여 자기와 전체를 동일시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거시야말로 인민을 무시하는 일이다. 자기가 인민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민의 자유로운 승인이 있어야 한다. 독재자는 때때로 자기가 예언자(豫言者)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제로 하는 엘리트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의 뜻에 의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독재자와 권위자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타인 위에 서서 지도 · 감독 · 명령하는 점에서 동일할는지는 모르나 권위자는 구성원의 의사를 무시하거나 탄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 구성원에 봉사는 자세를 갖는다. 그러기 때문에 지배자의 영성이 독재자와 권위자를 구분하는 기준의 된다.
독재의 문제에서 생각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독재가 독재를 낳는다는 것, 즉 독재의 악순환이다. 독재자는 자기 스스로 합법적 절차를 밟아서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없다. 비록 합법적 절차를 밟았다고 하더라도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 폭력에 의해서 정권을 획득한 사람이나 계층은 반드시 자기 권력의 국민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인민투표 하는 형식을 밟는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실시되는 인민투표는 강압적 분위기 하에서 실시되기 때문에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받는 것이 상례(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3세)다. 따라서 이것은 민주적 제도의 악용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합헌적으로 권력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에 반항하는 사람들도 폭력을 통해서만이 독재자를 타도할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독재가 출현하게 되고 이것이 악순환 된다. 군사 쿠데타가 또 다른 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가끔 독재적 현상을 볼 수 있다. 소위 성직독재(聖職獨裁 clerical facism)가 그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교계제도가 권위에 의한 하향적 제도가 되는 경우와 사목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대화도 없고 평신도의 참여 없이 교회가 운영되어 가는 경우를 말한다. 교회에 있어서 권위는 존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권위의 본질은 명령과 복종의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권위는 일치의 원천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대화를 통한 일치를 갈망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사항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권위자의 역할이지만 결정되기 이전까지는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야 한다. 만일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 사이에 이러한 대화의 관계가 없을 때,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토의와 설득의 과정이 없이 어떠한 결정이 내려졌을 때 이것은 분명히 독재라 할 수 있다. 주교가 교구 내의 제반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각종 협의기구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만 본당신부가 본당의 사목에 관하여 결정할 때 본당신자의 선의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는 것도 교회의 독재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규정하고 서로서로가 공동체로서 자체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韓庸熙)
[참고문헌] H. Arendt, The Origin of Totalitarianism, 1951 / M. Duverger, De la dictature, 1961 / 교회헌장, 제2장 및 제4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