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년부터 본격화된 동방교회. 수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양(兩)교회 사이의 오해의 결과로서 1054년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천도(330년)와 더불어 시작된 양교회의 수위권 논쟁, 종교에 대한 정치철학의 차이 등은 신학적 논쟁들과 더불어 계속 양 교회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발단은 교황 성 레오(Leo) 9세(재위 : 1049~1054)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체룰라리우스(Michael Caerularius)가 그의 관할지역에서 라틴전례의 관습을 금지시킨 일에서 시작되었다. 교황은 교황특사 훔베르트 추기경을 파견하여 로마교황의 지위를 능가하는 ‘전 세계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폐기하고 문제시된 ‘필리오케’(Filioque) 문구를 신경(信經)에 채택하도록 요구하였다. 양측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총대주교는 서방대표를 파문하였다. 1054년의 이 사건은 보통 동방이교의 시작으로 간주되지만 이 일은 특사를 파견한 레오 교황이 이미 사망한 후였으므로 서방측의 파문은 그 합법성이 의심스러우며 동방측의 행위도 교황이나 라틴 교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특사들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것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동시대인들은 이교(離敎)의 진전을 모르고 있었으며 성 레오 9세를 이은 빅토리오(Victorius )2세, 스테파노(Stephanus) 9세, 알렉산데르(Alexander) 2세 등은 곧 비잔틴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특히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7세는 터키와 교전 중에 있는 동로마제국을 돕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에 의한 교황권의 위협과 비잔틴의 적인 노르만족과 교황 사이의 친교 등이 화해의 희망을 유산시켰다. 더구나 십자군 원정 중에 일어났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서방측의 잔혹행위로 반(反)라틴 감정이 대중 속에 구체적으로 퍼져 1182년 분노한 그리스 군중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라틴구역에 대한 대량학살이 있었고 이에 대한 보복조치가 데살로니카에서 취하여졌다. 또한 세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한 원인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다는 여론이 서방측에 조성되자 제4차 원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1204년), 양교회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를 회복시키려는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교황의 수위권과 서방에 대한 그리스 성직자들의 적대감은 일치회복을 위한 리용 공의회(1274년)와 피렌체 공의회(1439년)에서의 노력을 무산시켰다. 1472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피렌체 공의회에서의 일치를 정식으로 파기한 것을 마지막으로 양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양 교회의 일치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으나 1965년 교황 바오로(Paulus) 6세와 동방교회의 총대주교 디미트리우스 1세는 1054년의 파문들을 무효화하고 화해의 인사를 나누었다. 또한 요한 바오로(Joannes paulus) 2세는 동방교회와의 완전한 일치를 모색하기위하여 1979년 교황청에 신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고문헌] J. Herhenrother, Photius, Patriarch von Konstantinople, 4b. in3, Regensburg 1867~1869 / W. Norden, Das Papttum und Byzanz, Berlin 1903 / S. Runciman, A History of the Crusades, 3v, Cambridge, Eng, 1951~1954 / The Easter Schism, Oxford 1955 / B. Roberg Ostrogorsky, Die Union zwischen der Griechuschen und der Lateinischen Kirche auf dem, Konzil von Lyon 1274, Bonn 19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