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美山里)에 위치한 이 산골은 184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 교우들이 옮겨와 안장한 후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성지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된 곳이다. 1888년 수원군 갓등이에 한수(漢水)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왕림본당]이 설정되자 미리내는 이 본당의 가장 큰 공소가 되었다. 미리내는 1896년 비로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신부로 부임한 이는 페낭 신학교 유학생으로 국내에서 처음 신품을 받은 한국인 성직자의 한 사람인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였다. 본당이 창설되던 때는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고 동학혁명군의 패잔병들이 안성군에도 많이 몰려 전교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으나 강 신부는 부임초 한옥 1간을 사들여 성당으로 사용하며 포교에 전념하였다.
1901년 5월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시복(諡福) 준비를 위해 서울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었지만 1907년에는 180평의 새 성당을 지어 9월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강 신부는 또 해성학원(海星學院)을 설립하여 경영하는 한편,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묘소를 지성으로 관리하고 1928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업(遺業)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산소 옆에 김 신부 기념 경당을 신축하였다. 강 신부 때 남곡리(南谷里) 본당이 분할되어 나갔고, 이 남곡리 본당은 6.25 뒤 양지(陽智)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강신부가 선종한 뒤 뤼카(Franciscus Lucas, 陸加恩) 신부가 부임하여 3년간 전교하다가 1932년 전임되고, 3대는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여 1952년까지 20년간 사목하였다. 이 본당은 그 뒤 점차 쇠퇴하여 6.25후에는 양지본당 공소가 되었다가 1955년 4월 신종호(申宗浩,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전교하였고, 그 후 다시 신부들이 휴양차 임시로 체재하는 준본당이 되었다. 1963년에는 또 수원교구에 편입되어 안성 대천동 본당 공소가 되었다가 1976년 정행만(鄭行萬,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한 후 준본당으로 부활, 성지 개발사업이 대규모로 전개되고 수십만명의 참배자가 일시에 집회할 수 있는 광장이 마련되었으며 미리내로 들어가는 5km의 길은 말끔히 포장되었다. 성모성심수녀회에서 상주하며, 신자수는 490명(1984년 현재), 산하공소는 1개소이다.
